[212화] 11장-상봉
"...네가 어째서 이곳에?"
"스, 스승님이 왜 여기에.."
검후님과 검후님의 제자는 모두 서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곳에서 서로를 만날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
'당연하지..'
이걸 어떻게 생각한단 말인가.
검후님 입장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제자가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우리 집에 묶여있는 상황이었고 제자 입장에선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스승님이 갑자기 집으로 온 셈이었으니까.
그래도 기적 같은 사제상봉이니까 약간 훈훈한 분위기를 기대해볼 수 있..
"스, 스승님! 보고 싶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에게 접근한 것이냐!"
"...네?"
...어.
뭔가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 너 때문에 평생 고치지 못할 상처를 입은 이에게 얼마나 더 민폐를 끼쳐야 만족할 셈이냐! 네년 때문에 꿈마저 잃고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야 하게 된 아이한테 얼마나 더 멋대로 행동해야 직성이 풀릴거냔 말이다!"
"스승..님?"
"내 너를 어떻게든 죄를 뉘우치게 만들려고 했었지만 아직도 이러는 모습을 보니 이 이상 기회를 줘도 의미가 없을 것 같구나. 차라리 다시 한 번 내 손으로 지옥으로 묻어줄 테니 그곳에서라도 잘못을 뉘우치길 빌.."
당장 검이라도 뽑을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
-스릉
같은 게 아니라 진짜 검후님이 검을 뽑았다.
아니 잠깐만 이게 무슨 일이야.
"자, 잠깐만요 검후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비키게. 저 아이에게 무슨 말을 들었을지 몰라도 전부 새빨간 거짓말일 테니 믿을 가치는 새의 모이 만큼도 없네. 이 녀석만 처리한 다음 진실을 알려줄 테니 잠시 물러서서 눈을 감고 있.."
"거, 검후님 제자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서요!"
"...뭐라?"
검후님이 당황해서 멈칫한 사이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혈교가 섬서를 습격했었고 검후님의 제자도 흡혈귀일때 우리를 죽이려고 했었는데 어떻게든 제압에 성공한 뒤 무림맹에 넘기려고 기다리던 사이에 인간으로 돌아오면서 기억을 잃었다고.
그리고 그것도 14살 이후의 기억을 잃어버려서 지금 정신연령이 그때인 상태라고.
"...그게 무슨."
"무, 물론 진짜 거짓말일수도 있긴 한데.. 일단 저희가 보기엔 진짜인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우선 검후님이 판단해보신 다음에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을 내려보시는 게.."
"아, 아니에요.."
내가 검후님을 말리고 있던 사이 등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스, 스승님이 저러실 정도면 전 분명 좋은 제자가 아니었던 거겠죠. 믿고 있던 제자가 그 증오스러운 혈교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해치고 다녔으니.. 스승님이 저렇게 반응하셔도 할 말이 없어요. 파문은 당연한 일이겠죠."
"..."
"이, 이미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던 몸. 죽어도 괜찮아요. 유일한 미련이었던 스승님도 만났고 제가 그렇게 좋은 제자가 아니라는 것까지 확인했으니까.. 죄를 부정하면서 까지 살아있을 이유는 없네요. 그, 그리고 제가 한 짓은 정말 죄송했어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슬쩍 뒤를 돌아보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이게 연기면 얘는 정말 무인을 할게 아니라 배우를 했어야 했다.
그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14살이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 본인은 묶여있고 기억을 잃은 사이에 엄청난 죄들을 저질렀었는데 스승님마저도 본인을 죽이려고 드는 상황이었으니 충분히 멘탈이 나갈만한 상황이었다.
'...분명 나쁜 여자인 건 맞는데..'
왜 이렇게 공감이 잘되나 했더니 스승님이 말했던 그녀와 내 상태가 비슷하다고 했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던 것 같았다.
기억상실이랑 빙의는 다르긴 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완전히 다른 세상에 던져진 기분이라는 건 똑같았으니까.
스승님을 만나기 전 다 죽어가는 몸 상태로 뒷골목에서 썩어가던 시절은 아직도 내 기억 속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남겨두고 있었으니 그때의 기억 때문에 동질감이 느껴지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검후님은 내 설명과 제자의 말을 듣더니 아직도 인상을 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나도 옛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군."
"...네?"
"지금은 소연이가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밝히지 않고 있는. 그대와 소연이. 그리고 나의 진실일세."
말하기 전 심호흡을 몇 번 씩이나 하시는 게 정말 말하기 힘든 걸 말하시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검후님의 입이 열린 순간.
"그대의 단전을 부순 범인이.. 소연이라네."
나는 10년 전부터 궁금해 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
.
.
검후님의 설명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나는 여러가지 일로 인해 옛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나는 예전에 화산의 속가제자 소속이었고 그때는 검화라고 불리던 검후님의 제자를 만나 어울려 지내다가 어느 날 검화가 나를 겁탈하려 시도했고..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이들에게 제지 당한 탓에 겁탈엔 실패했지만 마지막 발악으로 끌려가는 와중에 내 단전을 부숴버렸다고.
그때 검후님은 잠시 폐관수련 중이었고 밖에 나왔을 땐 이미 내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내게 혐오감을 느껴도 상관없네. 감히 이런 사실을 감추고 그대와 정을 통한 건 사실이니까. 그대가 내가 찾던 그 아이라는 걸 깨달은 이후엔 이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뒤라서.."
-덜덜덜
검후님은 본인이 말하면서도 떨렸는지 손으로 본인의 얼굴을 감쌌다.
정말 일생 일대의 고백이었는지 말하는 동안에도 말이 떨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평소에 당당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검후님이라기엔 굉장히 나약해 보이는 모습.
그 정도로 나에 대한 죄책감이 심했던 것 같았다.
당장 내가 검후님을 향해 윽박 지르고 욕을 내뱉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것 같은 태도.
근데 사실 내가 검후님의 말을 듣고 느낀 감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거 진짜야?'
솔직히 뭔가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일단 제일 걸리는 부분은 겁탈을 시도했다는 것.
단전이 부서졌을 때랑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그때 내.. 아니 이 몸의 나이가..
'...'
-힐끔
잠시 검후님의 제자가 있는 쪽을 바라보자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식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얘가?'
이런 애가 나중에 자라서 지금의 자신보다 어린애를 눈 돌아가서 겁탈하려고 했었다고?
뭔가 상상이 잘 되지 않는 이미지였다.
물론 사람이 크다 보면 여러가지 일도 겪을 거고 성격도 변하기 마련이겠지만 이런 순진하고 좀 과할 정도로 올곧은 애가 그렇게 타락한다는 게.
...근데 성지식은 없으면서 겁탈은 뭔지 알고 있나?
자세한 과정까진 몰라도 대충 나쁜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려나?
'...참 세상 일 어떻게 될지 몰라.'
뭐 검후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맞긴 맞을 거다.
사실 검후님이 걱정하는 것처럼 막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혐오감을 느낀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진짜 다른 사람이 겪은 일인데.
하필 단전이 부서진 몸에 빙의해버린 탓에 고생한 게 없진 않지만 내가 이 몸에 빙의했을 때 단전이 멀쩡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애초에 몸 자체가 단전의 상태를 떠나서 근육이랑 살 자체가 안 붙는 체질이고
스승님이 날 거두었던 이유가 단전이 망가진 몸과 그곳에 빙의한 낯선 영혼이라는 세 가지의 환장의 콜라보 덕분에 관심이 생겨서 거두었던 거니 그냥 영혼만 달랐으면 스승님에게 거두어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랬으면 그 뒷골목에 계속 있었을 거고..
'아닌가 화산에 있었으려나.'
운동은 싫은데.
어느 쪽이든 딱히 지금의 삶보다 만족스러울 것 같진 않았다.
여자 문제만 뺀다면 난 내 인생에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내 인생의 위기의 99%가 여자 문제라서 문제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단전도 여자 때문에 부서진 거네?
이 정도면 그냥 내가 잘못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당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 정도로 여자 때문에 계속 문제가 생기는 걸 보면 그냥 내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얼굴 제대로 가리고 다니는데도 왜 자꾸 문제가 터ㅈ..'
...생각해보니까 빙의 전의 이 몸의 주인에겐 당연히 상점창이 없었을 테니 망토도 없었을 거고 속가제자라고 했으면 더더욱 그런 걸 쓰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러면 맨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녔으려나?
'어휴 왜 그랬대.'
얼굴을 제대로 가리고 다니는 지금도 계속 문제가 터지는데 맨 얼굴로 다니면서 아무 일도 안 생기길 바라면 안되지.
반쯤 농담이었지만 지금 내 현실 상황과 겹쳐져서 마냥 웃을수만은 없는 농담이었다.
빙의하고 얼마 안됐을 땐 귀엽게 잘 생긴 몸이라고 좋아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외모도 적당히 좋아야지 지킬 힘도 없으면서 어디 가져다 버릴 수도 없는 보물을 들고 있는 것 만큼 위험한 일도 없었다.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니 배신감이 큰가 보군. 내가 저지른 역겨운 행위에 대해선 변명하지 않겠네. 나는 괜찮으니 그대가 원한다면 혼약도 없던 걸로 해도 겸허히 받아들이겠.."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사실 저도 말할게 있는데요."
아무래도 검후님의 상태도 좋지 않아 보이고 이대로 뒀다간 계속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이참에서 밝혀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전 이 몸.."
"잠까아아안!!!"
"읍읍!"
"저, 저는 이 사람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여소천이 갑자기 내 입을 틀어 막으며 그대로 나를 끌고 한쪽 방 안으로 들어 와버린 탓에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