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11장-자신
"여기에요! 다행히 무사히 있었네요..!"
피해가 심한 지역에 있어서 싸그리 다 무너지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겉이 조금 타긴 했지만 멀쩡히 있었다.
어차피 간단한 목재와 천막으로 지어진 점집이라 무너졌더라도 이틀 정도면 복구가 됐겠지만 그래도 그와의 추억이 있는 장소인 만큼 상실감이 컸을텐데.
"수수하게 지었구나. 주변에 다른 가게들은 꽤나 화려한 편이거늘."
"그이가 이런 건 오히려 수수하게 짓는 편이 손님들이 더 몰릴 거라고 했거든요. 결과적으로 장사는 잘 됐지만."
"흠.."
"아. 안까지 한번 보고 가실래요? 별거는 없지만요."
"기왕 왔으니 보고 가는 게 낫겠지."
당아영은 수락의 말이 떨어지자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문의 잠금장치를 열고 문을 열었다.
"자, 들어 오세.."
"...열쇠를 왜 네가 가지고 있지?"
"네?"
"내 제자가 운영하는 가게 아니었나?"
"아. 땅이랑 건물이 제 소유라서요. 운영하는 건 그였지만 소유주는 저에요."
"..."
...그러고 보니 이건 말 안 해드렸었나?
그가 속세에 나오고 얼마 안됐을 때 정착하는 걸 도와줬다고 말하긴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구체적으로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점수 좀 땄을지도..!'
생색내는 것 같아서 말 안했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자신은 그의 은인 아닌가.
저 순진한 성격으로 자신이 아니라 어디 이상한 여자한테 걸렸으면 지금쯤 완전 험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그가 제대로 정착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고 돌봐준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은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그한테 받은 게 더 많은 상황이었지만.
"...흐음."
그의 스승님은 먼지가 가득한 가게 안을 한참 동안 말없이 둘러봤다.
"운영하는 동안 위험하진 않았나?"
"가끔 난동 부리는 손님도 있긴 했는데 제가 옆에서 지켜드렸죠."
"..."
"벼, 별거 아니에요. 어차피 저도 여가 시간이 많은 시기였고.. 저도 그한테 도움을 제법 받았으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스승으로서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동안 내 제자를 돌봐줘서 고맙네. 저 철없는 녀석이 속세에서 지금까지 저렇게 무사히 있는 걸 보면 아마 그대의 역할이 컸다고 밖에 볼 수 없겠지."
여전히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 말에 담긴 감정 만큼은 진짜라는 게 느껴졌다.
"아, 아니에요! 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생각하시는 것처럼 제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런 관계였다고 해도 이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 사람을 잘못 만났다면 지금까지 무사히 있을 수도 없었겠지. 최소한 저 머릿속이 꽃밭인 성격 정도는 바뀌어 있었을 거고."
"그, 그건.."
"사실 내 제자를 찾고 나서도 좀 놀랐었네. 최악의 경우엔 이미 죽었거나 어디 갇혀서 몹쓸 짓이라도 당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만 조금 긴박할 뿐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조, 조금 순진한 성격이긴 하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좀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나 막 따라다니고 믿는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좋은 편인 데다가 한번 제대로 마음을 연 사람한테는 거의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편이라..
뭐든지 받아줄 것 같은 포용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성격 때문에 오히려 밤에 불타오르게 만들긴 하지만 그에게 더 깊게 빠져들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번 맛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늪 같은 남자라고나 할까.
이미 그 없는 삶은 상상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스승님께 허락을 받지 못하게 되면..
-꾸욱
...인생에 낙이 없어지지 않을까.
이미 무인으로서의 꿈도 버리고 현모양처로 살기로 한 상황이라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물론 다른 남자를 만날 생각은 추호에도 없고.
세상 전체를 뒤져봐도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남자 같은 건 없을 테니까.
비록 아직 그와 연인관계라는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내 제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나?"
"네, 네?"
"내 제자라면 모를까 내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다. 다 큰 남녀가 3년 동안 붙어 다녔는데 한쪽이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런 일이 없었을 리가 없겠지. 내 제자에게 문제가 없다는 건 내가 알고 있고."
"...그으..렇긴 한데요."
"내가 갑자기 찾아온 탓에 각방을 쓰는 거지 그 전엔 합방까지 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니 괜한 변명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거다."
"..."
이게 어머니와도 같은 스승님으로서의 감이라는 걸까.
따로 말 안 해도 이미 다 알고 계셨다.
-꿀꺽
대답을 잘 해야 했다.
그와의 교제를 정식으로 허가 받느냐 못받느냐가 달린 첫 번째 문제였으니까.
생각해보자. 내가 어떻게 그에게 반했었는지.
우선 점집을 열어주고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옆에서 붙어있다가..
처음엔 하루에 버는 돈을 대부분 술 먹는 데 날리는 놈팽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름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였고..
...결정적으로 몸에서 야한 냄새가 나서..
'...빨리 지어내야겠는데.'
아드님 몸에서 야한 냄새가 나서 벗겨보니까 경국지색 그 자체길래 결국 그 자리에서 덮쳐버렸습니다 라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바로 뺨이라도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내공까지 사용해 최대한 머리를 맑게 하며 생각을 정리했고 만족스러운 답변이 나온 뒤에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옆에서 그를 도와주다 보니 점점 마음도 가까워졌고 알아가면 알수록 좋은 남자라는 걸 알게 되어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몸에서 너무 좋은 냄새가 나서 결국 맨얼굴을 보자마자 덮쳐버렸어요."
어.
-쩌적
말과 생각을 반대로 해버렸다는 걸 깨달은 뒤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망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란 말인가.
어떻게 그의 부모님과도 같은 분한테 하필 해도 이런 말을..
"...그렇구나."
'...어?'
...왜 화를 안내시지?
당연히 화 내야 하는 거 아닌가?
"...화 안내세요?"
"내 제자가 싫어했었느냐?"
"아, 아뇨.."
"그렇다면 뭐 그럴 수도 있지. 좋았으니 덮쳤고 내 제자도 받아들였으니 지금까지 잘 지내는 걸 거고. 강간이었다면 모를까 젊은 놈들이 연애를 어떻게 하던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뜨끔
조금 찔리긴 했지만 혀를 깨물며 최대한 반응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그러면 허락해주시는 건가요?"
"글쎄. 그건 그 아이에게 맡겨야지."
"...네?"
"뭐. 어차피 앞으로도 당분간은 속세에 머무를 생각이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때가 되면 그 아이에게 선택하게 할 테니."
"저, 저기.. 선택이라니 무슨.."
"미리 말해두겠지만 나는 자신 있노라."
-흠칫!
귓가로 파고드는 고혹적인 목소리.
자신을 지나쳐가며 귓가에 속삭인 그녀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느새 문 밖에서 들어오고 있는 노을을 배경을 등지고 화사하게 빛나고 있는 금빛의 머리카락은 정말 비현실적인 미를 자랑했다.
"뭐하느냐. 돌아가는 길 안내를 하지 않고."
"네, 넵!"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신호는 아닌 것 같았기에 앞으로 차근차근 점수를 따 허락을 받아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옆으로 다가갔다.
"...아. 근데 그놈이 혹시 다른 여인들이랑도 사귀었었느냐?"
-뜨끔!
"그, 그건 왜 물으세요?"
"몸에서 냄새가 난단 말이지. 한 두 명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하나, 둘, 셋, 넷.. 다섯 명이나 나니 대체 얼마나 문란하게 연애를 한 건지 궁금하구나."
"하하.. 뭐 남자가 그럴 수도 있.."
잠깐만.
다섯 명?
'...나랑 청뢰검님, 검후님까지 해도 셋인데?'
......그러면 두 명은 누구지?
.
.
.
-벌컥!
"저희 돌아왔어요~"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하루였지만 그래도 집에 심심하게 남아있었을 그를 의식해 웃는 표정으로 문을 열었지만 그와 함께 느껴진 것은 집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술 냄새였다.
"아! 와써요!"
"...또 술 마셨어요?!"
"쫌 마실 수도 있쬬! 뭐요!"
술이 어마어마하게 강한 그가 혀가 풀려있을 정도로 취한 상태.
이건 정말 엄청나게 마셨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생각을 증명하듯 이미 마루 곳곳에 술병이 널부러져 있는 상황.
"아휴 스승님도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이에요.. 빨리 일어나요."
"왜요! 더 마실 거야! 놔!"
"이미 더 마실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자자. 그냥 바로 침대로 데려다 줄 테니까 얌전히 자고 일어나요. 읏챠."
"시러어!"
더 마시겠다고 이미 빈 술병을 들고 반항하는 그를 들어 올리고 방으로 데려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그의 스승님과 눈을 마주쳤다.
"이리 주거라. 내가 데리고 갈 테니."
"어.. 네.."
직접 데리고 가시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혹시라도 떨어지지 않게 그를 조심스럽게 받치며 스승님에게 넘겼고 그분은 익숙하다는 듯이 그를 받아 들었다.
분명 다 큰 남성을 이렇게 넘긴다는 게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의 몸집이 워낙 작은 편이니까..
"그, 그러면 저는 치우고 들어가보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꾸나."
* * *
"으에에엥.."
...잠에 취한 모습은 여러 번 봤어도 술에 취한 모습은 처음 보는데 이건 이것대로의 맛이 있구나.
당가의 계집에게 받은 철없는 녀석을 조심스럽게 안고 어제 잤던 녀석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내려놓은 뒤 자연스럽게 옆에 누우려고 하자..
"아, 안대.."
"?"
녀석이 낑낑대면서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 어제나 그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오늘은 안대요!"
"왜 안되느냐?"
"아, 아무튼 안대! 말 못해!"
-피식
볼을 한입 콱 깨물어주고 싶은 모습이었다.
왜 이런 반응인지는 알고 있지만 내가 정말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래. 오늘은 봐주마."
어제는 조금 과한 감이 있었으니 하루 정도는 봐주기로 했다.
지금 상태는 여러모로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면 내일 아침 보자꾸.."
이불을 덮어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가, 가지 마요."
"...응?"
녀석이 팔을 뻗어 내 소매를 붙잡았다.
"...방금은 같이 자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가, 같이 자는 건 안대지만 가는 것도 안대요!"
"그러면 밤새 옆에 있어 달라는 이야기냐?"
-끄덕
어이가 없어 묻자 녀석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이기적인 요구인지.."
"혼자 안 두기로 약속했었으면서..!"
"...그래. 알았다 알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냥 폐관수련 같은 건 안 하는 게 나을뻔했다.
이렇게 혼자 있는 걸 싫어하니 원.
"히히."
얌전히 옆에 앉고 손을 잡아주자 녀석은 자각도 못하고 해맑게 웃기 시작했다.
"..."
-쪽
잠들기 전 조심스럽게 다가가 입술을 맞추자 혀를 내미는 녀석의 혀를 다시 입안에 밀어 넣고 입을 뗐다.
오늘은 아니다 멍청한 놈.
그렇게 칠칠맞은 제자 때문에 누워서 자지도 못하고 옆에 앉아있어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그날은 날이 밝을 때까지 전혀 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