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11장-선물
"..."
-짹짹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들 지저귀는 소리.
나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감고 그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으며 생각했다.
'..망했다.'
어제 스승님이랑 섹스를 했을 때는 이상하게 정사가 끝난 뒤엔 정액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어 어떻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어떻게 없어질 수가 없는 자세였다.
침대에서 옆으로 누워있는 상태로 착취 당했으니 이불, 침대, 잘하면 바닥까지 아주 난장판이 되어있을 거다.
스승님은 물론이요 당아영한테까지 숨길 수 없을 정도.
'...인생 망했네 진짜.'
이 세계에서 스승이랑 잠자리를 가진다는 건 부모와 잠자리를 가졌다고 해석해도 될 정도인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졌다.
사실 나야 스승님에게 강간 좀 당해도 별로 상관 없지만 스승님이나 주변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자기가 자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자식같이 키운 제자한테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하면..
'...'
펴본 적은 없지만 왠지 담배가 땡기는 하루였다.
아무튼 일단 일이 벌어진 이상 이대로 눈감고 있는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정액이 이불에 완전히 스며들기 전에 빨리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했으니까.
너무 늦으면 아예 버리고 새로 사는 게 더 빨랐다.
"으그윽.."
나는 너무 많이 쥐어 짜여서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 하반신을 억지로 움직이며 눈을 떴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다시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깨끗했다.
침대나 이불이나. 심지어 옷에도 정액이 묻어있는 흔적조차 하나 없이 완전히 깨끗했다.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내가 겪은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건지 헷갈릴 정도로 밤새 그런 일이 있었다는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 당아영이 치워줬나 싶다가도 침대나 이불이 원래 쓰던 그대로였고 스승님이 치워줬다고 하기엔..
"...으응.."
-꼬옥
'아직도 자고 있네.'
아침잠에 약한 덕분에 아직까지 자던 자세 그대로 주무시고 계셨다.
...스승님이 내가 쓰러진 사이에 깨서 치운 건가?
그러기엔 자세가 완전히 그대로 인데?
진짜 내가 그냥 꿈이라도 꾼 건가?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정액을 그 정도로 싸질렀는데 어떻게 이렇게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게..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현실의 모습에 정말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헷갈렸지만 그러면 또 이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허전함이 설명되지 않았다.
분명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끝까지 착정당했을 때나 느껴지는 공복감이었다.
차라리 그냥 조금 허전한 정도로 그쳤으면 내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 정도는 절대 컨디션 문제가 아니었다.
몸의 다른 곳이 아프면 아팠지 정액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몸살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러면 또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게 마음에 걸리고..
'진짜 뭐지???'
이래도 이상하고 저래도 이상하고 완전히 혼란스러웠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상황.
차라리 어제는 그새 스승님의 질 안에서 흡수됐다고 할 수라도 있지 오늘은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내 하루는 그렇게 찝찝한 상태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고
"...소저. 혹시 오늘 제 방에 들어오셨었어요?"
"네? 그냥 두분 편하게 주무시라고 그쪽으로 아예 안 갔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니요.. 꿈이었나봐요."
스승님이 한눈파는 사이에 당아영에게 슬쩍 물어봤을 때도 대답은 부정이었다.
일단 당아영이 치운 건 아니라는 소리.
'그러면 치울 사람이 스승님밖에 없는데..?'
처음부터 정액이 침대에 묻지 않았을 리는 없다.
이 망할 몸뚱아리가 쓸데없이 정력이 얼마나 좋은지 내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데.
아무리 스승님에의해 눈이 가려진 상태였다고 해도 그 자세에서 착정된 이상 정액이 향할 곳은 이불과 침대밖에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 가정은 무의미했다.
...아니면 진짜로 지금 이게 그냥 컨디션 날조일 뿐이고 어제나 오늘이나 스승님이랑 있던 불미스러운 일은 전부 내 꿈일 수도 있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차라리 진짜 이게 꿈이면 좋겠다.
비록 스승님으로 그런 상상을 해버렸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긴 하겠지만 진짜로 스승님한테 강간 당한 것보단 낫지 않은가.
괜히 스승님이랑 어색해질 일도 없고.
'하아.'
아침부터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 머릿속 혼란 때문에 정말 담배라도 시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 시대 담배면 현대보단 독성이 덜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요즘 고민이 많아서 복잡한 머리에 스승님 문제까지 끼어드니 이러다 간신히 치료한 불면증이 재발이라도 할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술이라도 마실까.'
그러고 보니 술을 안마신지 좀 된 것 같았다.
한참 점집 운영하면서 잠도 객잔에서 자고 하루살이처럼 살 때는 매일 간을 혹사 시켰는데 생각해보니 요즘 혈중에 알코올 농도가 부족한 것 같다고 느끼긴 했다.
천마랑 필름 끊기기 직전까지 마셔본 뒤로 댄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술 받아왔었지.'
삶이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천마가 준 보수 중에 엄청 귀한 것처럼 보이는 술이 있었다.
오늘처럼 머리가 복잡할 때는 그냥 술이나 때리고 좀 쉬는 것도 괜찮을 거다.
어떻게든 그 여자를 떨어트릴 생각을 하고 있는 주제에 그녀가 준 술은 마시겠다는 건 좀 이상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강간 당한 값이라고 생각하지 뭐.'
그녀도 나한테 잘한 건 없으니까 쌤쌤이라 치기로 했다.
현재의 그녀가 아니라 미래의 그녀가 한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당한 건 맞고 그거 때문에 당분간 악몽까지 시달렸었는데 나도 챙길 건 챙겨야지.
...근데 이렇게 생각하면 이건 이것대로 이상한데.
강간 합의금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술 한 병으로 땡 쳐지는 남자라니.
'창녀도 돈은 따로 받는데.'
어째 의식을 이어나가면 나갈수록 말려드는 느낌이었으니 조용히 생각을 덮고 그때 받았던 보따리를 풀어 술이 들어있는 나무함을 꺼냈다.
들고 올 땐 별생각 없었는데 이제 보니까 제법 무거운 게 양이 꽤 있어 보였다.
마침 스승님과 당아영은 당아영이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집을 비운 상태였고 나는 이참에 점수 좀 따보려는 당아영의 의도를 눈치채고 조용히 둘만 보내줬다.
즉. 지금 집에는 나 혼자라는 소리.
정확히는 저기 한 명 있긴 하지만..
-얌전
"...왜, 왜 그렇게 보세요? 혹시 제가 어디 불편하게.."
"...아니에요."
따로 말을 걸지 않으면 웬만해선 얌전하게 명상하거나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없는 거라고 봐도 좋았다.
"흥~ 흥~"
나는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콧노래를 부르며 천마가 준 술병의 마개를 열었고 열자마자 주변으로 퍼지는 향긋한 냄새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냄새만 맡아도 확실히 고급이었다.
이런 술은 마시기로 했으면 한번에 마셔줘야 예의인 법.
괜히 아깝다고 찔끔찔끔 마시는 건 뭘 모르는 사람들만 하는 짓이다.
-쪼르륵
오랜만에 술잔을 꺼내 잔에 붓자 벌써부터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잔에 술이 차오를수록 내 입꼬리도 저절로 올라가는 게 느껴졌고 잔에 술이 가득 차자마자 나는 바로 잔을 들어 내용물을 입에 부어버렸다.
"햐아아.."
예상했지만 확실히 좋은 술이었다.
천마와의 술자리에서 마신 술들에 전혀 뒤쳐지지 않았다.
거기서 받은 술 중 제일 싼 것도 웬만한 1인가구 몇은 먹여 살릴 정도로 비싼 술이란 걸 생각하면 나는 지금 같은 크기의 황금보다 비싼 술을 마시고 있는 셈이었다.
안 그래도 심각할 수준의 술 중독이었던 내가 오랜만에 문이 트이자 누가 보면 뺏어 먹기라도 하는 줄 알 것처럼 빠르게 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했다.
"저, 저기.. 그거 쓴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마셔도 괜찮아요?"
"술보다 인생이 더 쓰단다 꼬마야. 너가 이 나이 먹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 외모로 그렇게 말하셔도."
"응? 뭐라고?"
"아, 아니에요!"
뭔가 기분 나쁜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술 맛이 좋으니까 봐주기로 했다.
딱히 술이 몸에 좋은 음식은 아니라지만 이 몸의 알코올 해독 능력은 정력 만큼이나 비정상적이었으니까.
'이런 술을 매일 마실 수 있으면 천마라도 괜찮..'
-화들짝!
이런 미친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아무리 술 맛이 좋아도 이건 아니었다.
지하실에 감금 당한 다음 애 얼굴도 못 보고 수십 년 동안 강간 당하는 삶이 되고 싶다고?
최소한 그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성격부터 고치지 않는 이상 그 여자는 무리였다.
어떻게 말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인가.
난 그 인생을 건 지뢰 찾기를 다시 통과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그땐 아직 첫 만남이라 간신히 빠져나온 거지 다음에 또 만나면..
'상상만 해도 무섭네.'
-부르르
아무리 술 맛이 좋아도 천마에 대한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멀어져야 한다.
그것도 최선의 방법은 그녀가 나를 싫어하게 만들거나 비슷하게 나에게 관심을 끄게 만드는 것.
그녀가 내게 관심을 계속 두고 있는 이상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술에 유혹 당하는 것도 좀 고쳐야지.'
간만에 좋은 술을 마셔서 기분이 좋긴 했지만 이것 때문에 인생을 망칠 순 없었다.
마침 병에 남아있는 것도 이번 잔이 마지막인 것 같겠다 이거까지만 마시고 천마가 어떻게 나를 싫어하게 만들지 고민이나 한번 해보자.
-탁!
"크읏!"
마지막 잔을 해치우고 혹시 더 안 남았나 병을 잡고 빙글빙글 돌려봤고
그러자 병 안에서 뭔가 굴러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맛을 위해 넣어둔 과일 뭐 그런 건가?
과일보단 좀 더 딱딱하고 동그란 느낌이긴 했는데 일단 병도 씻어야 하니 꺼내보기로 하고 접시에 대고 병을 기울였다.
-피식
'아니 뭐 그 여자가 아무리 성격이 이상해도 설마 이런데 반지라도 넣어 놨겠'
-툭
-핑그르르..
-틱
"............."
이 미친 여자가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