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11장-지구
내 인생이 언제 이렇게 됐을까.
이쯤 되니까 그냥 다 때려 치고 시골에 가서 농사라도 짓고 살고 싶은 심정이다.
이 몸으론 농사도 그렇게 오래 못 짓겠지만.
'아니 도망쳐도 계약은 남아있잖아.'
생각해보면 천마를 어떻게 해결하든 못하든 최후의 결말은 이미 정해진 인생이었다.
진짜 이거 계약 어떻게 파기 못하나?
1만 포인트 모으기 전에 죽으면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거 아닌가?
[제가 용사님을 죽게 둘 리가 없잖아요. 엣햄.]
...다른 상황이었으면 꽤 로맨틱하게 들릴 말이었는데 상황이 이러니 정말 대단한 집착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저 능력을 좀 다른데 써줬으면 좋겠는데 그걸로 하는 게 다른 세계에서 납치해올 종마를 감시하는 일이라니.
[납치라뇨. 정당한 징수라고 해주세요.]
'지구에서 했다는 구두계약 말하는 거면 이제 와서 신뢰도가 그렇게 높지도 않네요.'
지금 계약이 채결될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구에서도 마냥 평화로운 방법으로 계약이 체결됐을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난 지구에서의 기억하나 제대로 없는 상태고.
[너무하시네요! 이번에야 저도 워낙 급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이랬던 거지 매번 계약을 이런 식으로 체결하진 않아요!]
'그러면 지구에서는 어떻게 체결했었는데요.'
[네?]
'구두라도 계약은 했었고 소환도 진행 했었다매요. 그러다가 제가 여기에 떨어진 거니까. 그러면 그때 제가 소환에 응하게 된 이유도 있을 거고 간섭력? 그것도 필요했을텐데 그건 또 어떻게 충당했는지 궁금한데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다.
나를 수십 년 동안 24시간 감시해온 성녀님쪽과 달리 나는 성녀님쪽에 대해 단서를 얻는 방법이 그녀가 흘리는 정보에만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정보의 불균형이 상당히 심하고
1만 포인트. 약 27년이 걸리는 이 막대한 양의 포인트를 지구에서는 어떻게 구했는지도 의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도 안 쓰고 모았다면 모를까 내가 지구에서 나이를 많이 먹었던 것도 아닌 걸로 기억하니까.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20대 초반을 넘기진 않았을 것 같은데..
[지,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거에요?]
'그거 바람피운 사람들이 의심하는 사람한테 하는 대사잖아요.'
[안폈거든요! 필 사람도 없는 처지긴 하지만 전 용사님 일편단심이에요! 오히려 바람은 용사님이 폈으면 폈죠! 대체 주변에 여자가 몇명이에요!]
'애초에 전 성녀님이랑 사귄 적이 없.. 아니 아무튼 설명이나 해봐요.'
괜히 드립쳤다가 또 화재가 돌아가기 전에 설명을 재촉했다.
[무, 물론 용사님 입장에서 저를 의심하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나오시면 저는 꽤 상처에요! 저는 오히려 용사님을 구해준 입장이라고요!]
...구해줘?
그건 또 뭔 소리래.
내가 말없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성녀님을 바라보고 있자 성녀님이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 용사님의 상황 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구에서도 용사님의 여자 관계는 복잡했어요! 여신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데. 거기서 제가 용사님을 소환하는데 며칠만 더 걸렸어도 용사님 배에는 이미 구멍이 나있었을걸요!]
...이 사람 성녀라는 것 치고 본인 여신을 너무 자주 팔아먹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정도로 결백하다는 뜻이겠지만..
그리고 배때지에 구멍이 뚫릴 정도면 지금보다 심각한 거잖아.
'..그렇게 복잡했어요?'
[용사님이 제대로 된 의사 표현을 못했던 게 컸죠. 다들 그냥 미쳐서 용사님을 납치할까 말까 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것도 모르고 태연하게 집에서 감자칩이나 먹고 있었으니..]
'...'
아무래도 지구에서도 내 삶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면 소환하는데 드는 포인트는요.'
지구에도 여소천같은 포인트 대량 수급 수단(?)이 있다면 모를까 하루에 1포인트씩 생기는 걸로 언제 1만 포인트를 모은단 말인가.
그러나 이 의문도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간섭력이라는건 다른 세계의 인물인 제가 그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해요. 상점창을 만들면서 '이 세계 기준 하루에 얻게 되는 간섭력의 양'을 기준으로 1포인트를 잡은 거고요. 지구의 신은 이 세계의 신보다 힘이 많이 약한 편이라 제가 지구에 간섭할때 소모되는 포인트의 양이 현저히 적은 거고요.]
'얼마나요?'
[상점창 기준으로 1000포인트 정도면 충분히 소환할걸요?]
와 지구의 신은 개호구였구나.
아무리 힘이 약하다지만 어떻게 10분의1토막을..
[뭐, 비교적 탄생한 지 얼마 안된 신이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발전 속도는 보통 세계들보다 상당히 빠른 편이라 1만년 정도 뒤에는 근처 차원에선 꽤 이름을 날릴지도요? 그전에 인류가 멸망하지만 않는다면 이지만.]
'1만년이 무슨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어차피 이제 돌아가지도 못하고 갈 생각도 없는 세상.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그나저나 상황이 저러면 지구로 돌아가도 좋은 건 없던 거 아닌가?
이 몸으로 돌아가는 거면 아예 다른 신분이 될 테니까 상관 없으려나?
한때 당연히 지구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으니 어쩌면 큰일 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구에선 배에 바람구멍이 나고. 무림에선 여자들한테 깔려 살고. 판타지에선 종마로 산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어차피 셋 다 비슷하다면 좋은 일 한다고 치고 저희 세계로 와 달라고!]
'...'
진짜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지어서 이런 삶을 사는 걸까.
전생에 인큐버스로 큰 죄라도 지었던 걸까.
하나도 아니고 세계 3개가 통째로 이 모양이니 이제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싶다.
다가오는 여자는 다 꺼지라는 식으로 대했으면 이런 꼴은 안 나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그래야 하나?'
지금 제일 무서운 점은 여기서 상황이 더 악화될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거다.
천마가 어떻게든 내게 관심을 끄게 만드는데 성공해서 한 명이 줄어든다고 해도 내가 또 어디서 잘못해서 여자가 꼬일 수도 있다는 게 제일 무섭다.
진짜 여자는 다 짐승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다가오는 여자는 다 쳐내야..
"저, 저기.."
"?"
"아, 아까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하시는 것 같아서..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하신 거 아닌가 해서요."
...그러고 보니 마침 여기 여자가 있었다.
-말뚱말뚱
'...으음.'
뭐 14살짜리 애한테까지 모질게 굴 필욘 없겠지.
기억이 멀쩡할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몸만 성인이지 정신은 완전 어린애인데다 내가 검후님의 남편인 상태니 이쪽은 그쪽으로 엮일 걱정이 없다고 봐도 좋았다.
"아뇨 딱히 당신 때문은 아니고.. 일에 조금 문제가 생겨서요."
"아..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점쟁이요."
"네?"
"사람 점 읽고 돈 받는 그 점쟁이 맞아요."
사실 점쟁이라는 게 직업이라고 대놓고 말하긴 뭔가 좀 그런 직업이다.
말이 좋아 점쟁이지 절반 이상이 사기꾼인 직업이니 뭐..
나도 실력으로 증명해서 유명해지기 전까진 그런 취급 자주 당해봤다.
"왜요. 사기꾼 같아요?"
"아,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니까요!"
"...자주 만날 일 없는 직업이긴 하죠."
화산에서 수련중인 제자라면 더더욱 그렇고.
감히 천기를 읽는 재주로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먹으며 천기를 일그러트리는 어쩌구 뭐 이런 느낌으로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별로 신경 쓰진 않는다.
꼬우면 지도 하라지.
내가 내 능력으로 돈 벌겠다는데 왜 지가 난리야.
"저, 저기.. 그러면 혹시 제 점도 읽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이 있던 만큼 그녀의 말은 내게 꽤 의외로 다가왔다.
"네?"
"아, 그, 그러고 보니 제가 돈이 없네요.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어.. 뭐 안될 건 없긴 해요."
"진짜요?!"
"어차피 지금 돈이 부족한 건 아니기도 하고.."
얘한테 돈을 받아서 뭐하겠나.
검후님의 제자면 사실상 내..
'어..'
이 세계에서 스승이 부모와도 같다는 걸 생각하면 그러면 나는 새아빤가?
'...'
이 나이에 14살짜리 딸이 생길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아니 잠깐만 그러면 기억을 잃기 전엔 그러면 새아빠의 부인(?)을 죽이려고 한..
'...뭔가 많이 잘못된 거 같아.'
이런 이상한 정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뭐가 궁금한데요? 재물운? 연애운? 건강운도 볼 수 있고요."
"그런 건 별로 안 궁금하.. 어 연애운도 볼 수 있어요?"
"당연히 볼 수 있.."
-멈칫
습관적으로 말하다가 마교에서 있던 일이 생각나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아니 물론 천마가 이상한 케이스긴 했는데..
"아뇨. 생각해보니까 못 봐요."
"...방금은 볼 수 있다고 하셨.."
"폐업한 걸 깜빡했네요. 자. 다른 걸로."
앞으로 연애운은 폐업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까지 천마같은 일이 발생하진 않겠지만 단 0.01% 가능성이라도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건강운으로 봐주세요."
"네 그러면 건강운으로.."
아무튼 건강운으로 잡고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가 천기를 운용하려는 순간
"재밌는 일을 하고 있구나 제자야."
-깜짝!
"으꺅!"
갑자기 등 뒤에서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내뱉었다.
"애가 재주도 없으면서 밖에 나가서 뭘 하면서 먹고 살았을까 했더니 이런 걸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냐. 이러니 기운을 30년치나 뽑아 먹었지."
"스, 스승님?"
"왜 전에 이상한 악몽 때문에 괴로워하나 했더니.. 천기를 이런 식으로 악용하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 멍청한 놈 같으니."
"그, 그러면 안되는 거였습니까?"
"왜 그럴듯한 수행자들이 죄다 속세와 거리를 두고 산 속에서만 사는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유가 나올텐데. 지금까지 안 미치고 멀쩡히 있는 게 용할 지경이다."
"...?"
...아무래도 난 그동안 꽤 위험한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