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11장-자각
"자. 다 빨았어요. 확인해보세요."
나는 세탁이 끝난 스승님의 옷을 자신만만하게 건넸다.
워낙 오랜만에 세탁하는 옷이라 조금 걱정되긴 했는데 다행히 실력은 녹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잘 된 것 같구나. 수고했다."
"에이 항상 제가 하던 일인데요 뭐."
그리고 스승님한테 맡기면 옷이 완전 걸레짝이 되어버린다.
옷을 만들 줄은 알면서 왜 빠는 건 못하는지 원.
이상한 부분에서 지식이나 능력은 많은데 정작 정말 필요한 걸 못한다.
"...그런데 그러면 수련하실 때는 옷 어떻게 하셨어요?"
"...?"
"...설마 3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같은 옷만 입고 있던 건.. 아닌데.. 그 정도로 더럽진 않았는데.."
사실 오래 입었을 테니까 빨래해야겠다 하고 하긴 했지만 별로 더럽진 않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거의 새 옷인 수준.
근데 그러면 뭔가 이상한데?
스승님이 혼자서 세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
"안 입고 했으니 안 더러워진 것 아니겠느냐."
"아하."
답은 간단했다.
수련 하는 동안 옷을 안 입고 했..
"...네?"
"어차피 밖에서 누가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 혼자 있는 곳인데 불편하게 가릴 필요가 없지 않느냐."
"어...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해서 순간 그런가? 할뻔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죠! 아무리 혼자 있다고 해도 옷은 입고 계셔야죠!"
"내가 안 입은 게 더 편한데도?"
"그래도 안돼요! 피부에 괜히 이상한 거 묻고 여기저기 스쳐서 상할 수도 있다구요!"
"내 피부가 고작 그런 걸로 상할 리가 없지 않느냐."
스승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팔을 내밀었다.
...확실히 엄청 좋았다.
하긴 뭐 스승님의 피부가 시대적 배경에 안 어울릴 정도로 좋은 편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
'근데 그러면 수련을 알몸으로..'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쓸데없이 이럴 때만 빠르게 돌아가는 뇌가 순식간에 머릿속에 어두운 방에 알몸으로 있는 스승님의 모습을 그려버렸다.
-화끈
"..."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구나. 스승이 혼자 있을 때 옷 좀 안 입었다는 게 그렇게 화날 일이더냐."
"아..닙니다."
평상시여도 자극적인 상상이었을텐데 하필 밤중에 그런 일이 있던 탓에 상상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상상은 순식간에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뻗어나가 형태를 바꿔나갔고 이윽고 밤에 있던 일처럼 스승님이 자고 있는 내 옷을 벗기고 허리를 들어올려서..
-절레절레
'내, 내가 무슨 생각을.'
스승님을 앞에 두고 못하는 생각이 없다.
아, 아무리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스승님 아닌가.
그냥 스승님이 오랜만에 만난 제자가 반가워서 그동안 외로웠던 마음에 실수를 조금..
'조금이 아닌데!'
'언제 탈출했어! 이새끼 집어넣어!'
'야 이 미친놈들아! 대체 세상에 어떤 실수를 해야 자는 사이에 덮쳐서 질내사정을 10번을 넘게.. 읍읍!'
잠시 머릿속에 소란이 있었지만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생각을 흩어낸 다음 마음을 진정 시켰다.
그래도 스승님이 중간에 안깬게 어딘가.
그랬으면 지금보다 상황이 10배는 더 어색했을텐데 그냥 내가 눈 딱 감고 강간 한번 당했다고 생각하면 뭐 더 할 것도 없다.
...스승님이면 괜찮기도 하고.
"아, 아무튼! 이제 속세로 나왔으니 그러지 마세요! 그땐 산속이라 괜찮았지만 여기는 발에 사람이 채이는 속세니까요!"
"스승이 그 정도 분별도 없는 것 같으냐. 나 원 참."
"농담 아니에요!"
나중에 혼자 있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다음에야 간신히 외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분명 사람이 능력은 있는데 이상한 부분에서 상식이 부족해서 같이 살 때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 * *
스승님의 옷을 구하기 위해 당아영과 함께 셋이서 밖에 나갔다 왔다.
절로 눈이 휘둥그래질 미인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있으니 걸을 때 여러모로 부담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시선은 별로 모이지 않았다.
신비한 현상이었지만 나한텐 한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예전에 스승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예쁜 여자가 대놓고 다니는데 아무도 쳐다보질 않아서 신기해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아마 인식 저해 술법? 그런 비슷한 게 있는 거 아닐까 싶다.
아무튼 스승님의 새 옷은 결과적으로 주문 제작을 맡기는데 성공했다.
스승님의 체형상 일반적으로 만들어두고 파는 옷이 맞을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아영도 스승님만큼은 아니어도 비슷한 처지이기에 그녀가 추천하는 가게를 갔던 거였는데..
'...대단했지.'
아직도 줄자 비슷한 걸로 스승님의 몸 둘레를 재보고 당황하던 여성 재단사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본인이 재고도 진짜 이게 맞나 싶지 않았을까.
참고로 돈은 내가 냈다.
당아영에게 용돈 받아 쓰는 처지긴 하지만 내가 벌어서 저축해둔 돈 정도는 있다.
당장 저번에 마교에 갔다와서 받은 돈도 어마어마하고.
'...마교.'
-으스스
살짝 스쳐 생각한 것 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속세에 나온 뒤 중원에서도 별에 별 고생을 다 해봤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TOP 1을 뽑으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마교였다.
진짜 지금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 빠져나왔나 의..문....
[그러면 반년 안에 다시 보는 걸로 하지.]
-오싹
아 맞다.
나.. 다시 돌아가야 하지..
'내가 미쳤지 왜 그런 약속을 해서..!'
순간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워졌지만 생각해보니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천마의 운명의 상대라는 것도 놀라 죽겠는데 천기 안에서 강간까지 당한 상황이었으니 미래고 뭐고 당장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뭐 내가 다시 안 오겠다고 하면 순순히 돌려보내줬을까.
그땐 모르긴 했지만 나중에 여소천에게 들은 사실에 따르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던데.
내가 겪었던 천기가 그녀의 상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그 잠깐 사이에 자식까지 낳는 생각까지 했다는 거 아닌가.
아직 그녀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애인이 있다고도 했는데 그렇게 유혹했던 모습을 보면 내가 다시 안 오겠다고 했으면 순순히 보내줄 여자가 아니었다.
미래를 저당잡아서 그때 살아 나온 거라고 생각하자.
그때 솔직하게 말했으면 지금쯤 내 집은 마교 지하실이었을 가능성이 99%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거다.
'시,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한 달 정도 지났나..?
최근에 일이 워낙 뭐가 많이 일어나서 시간 감각이 애매해지긴 했지만 아마 그 정도 될 것 같다.
그러면 앞으로 나한테 남은 수명이 5개월..
'아니 불안한 상상하지 말고.'
최악이어봤자 평생 빛도 못 보고 지하실에 감금돼서 사는 거지 죽는 건 아니다.
그랬으면 내가 읽었던 천기가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라 내 무덤이 나왔겠지.
간신히 여유가 생긴 상태로 그때를 되돌아보자 내가 정말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공수표를 남발하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운명의 상대인 걸 감추려고 나랑 전혀 다른 사람 외모를 대기도 했고 반년 안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땐 지킬 생각도 없던 약속을 잡기도 했고..
'아니 잠깐만 이제 보니까 나 성녀님한테 영혼도 저당잡혀있잖아.'
이런 미친 이게 사람 인생인가?
반년 안에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미지수인 곳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하고 포인트가 다 모이면 다른 세계로 끌려가서 죽지도 못하고 종마로 살아야 하는데 지금도 떨어져 있을 뿐이지 부인이 3명에 이제 스승님도 모시고 살아야 하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닌데...?'
언제 이렇게 됐지..?
분명 그래도 부인이 3명인 것만 빼면 나름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생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마교에 갔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미 포화상태지만 견딜 수는 있을 것 같은 수준이었는데 이제 100% 못 견딘다.
그냥 꽉 찬 수준이 아니라 억지로 억지로 쑤셔 넣고 뚜껑만 눌러 담은 수준 아닌가.
그렇다고 이제 주워 담을 수도 없다.
반년 안에 온다고 해 놓고 안 갔다가 그 위험한 여자가 중원 밖으로 나오는 순간 다 끝나는 거다.
내가 그 여자가 밖으로 못나오게 하려고 처음에도 감금 당할 위기를 무릅쓰고 마교에 갔다 왔던 건데 이제 와서 무섭다고 안 가면..
'그래도 싫어..!'
내가 거기 고작 한번 갔다 왔다고 딸한테 강간 당하는 꿈까지 꿀 정도로 트라우마가 생겼는데 거길 내 발로 또 들어가라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당장 그나마 어떻게든 손을 써볼 가능성이 있는 상대가 천마밖에 없었다.
성녀님이랑은 이미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린 상태고 부인 3명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승님도 당연히 모시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천마는 아직 가능성이 있었다.
'차, 차라리 나를 싫어하게 만들면..!'
나한테 첫눈에 반한 게 문제의 원인이라면 이제라도 나를 싫어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평생 다른 사람이랑 거의 교류를 안하고 지내다가 모처럼 만난 사람이 취미도 맞고 얼굴도 꽤 괜찮게 생겼으니까 반한 것 같은데 이제라도 환상을 꺠주면 그만이다.
그 여자가 나한테 대체 무슨 환상을 가진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일깨워주면 나를 향한 관심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럴 거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내 인생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려면 그 수단밖에 없었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