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200화 (200/250)

[200화] 11장-변화

"...제길."

-지끈지끈

상황이 좋지 않아 우선 후퇴한 뒤 그들의 은거지로 돌아온 바르슈타인은 옥좌에 앉아 아픈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원래 계획 대로라면 성공할 수밖에 없던 계획이었다.

신투의 비고라는 먹잇감에 눈이 먼 인간들을 급하게 양산한 시귀들과 싸움 붙여 결과적으론 인간들끼리 죽고 죽이게 만들고 자신은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변수를 맡아서 묶어 놓는다.

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신이 유리하게 되는 것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해도 너무 많이 발생했다.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라면 그런 변수까지 고려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 법이라지만 체스 경기 중에 경기장에 벼락이 떨어져서 판이고 말이고 선수고 다 박살나는 변수를 어떻게 고려한단 말인가.

-욱씬

'...에르델.'

그 망할년과의 악연은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종이에 쓰려고 해도 여백이 부족해 적을 수 없었다.

애초에 다른 언데드들에게는 가만히 있다가 뱀파이어들에게만 햇빛을 보지 못한다는 저주를 내린 생명의 여신의 성녀니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좋을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년 만 없었어도 남은 인류가 뭉쳐서 연합군을 결성할 일도 없었고 수백 년 동안 그 질긴 전쟁을 이어갈 필요도 없었으며

자신의 영혼이 찢겨지며 소멸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용사도 만만치 않게 까다로웠지만 결국 본체는 그녀였다.

그 정신적으로 나약했던 용사가 아무리 무너져도 계속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녀였으니까.

그런 주제에 신의 화신체 역할을 위해 존재하는 성녀라 신성력도 넘쳐흐르고 내구도도 단단했으니 그년 하나 잡아보겠다고 세웠다가 실패하거나 폐기된 작전만 해도 책장 하나는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흘린 피도 수없이 많았고.

어떻게든 죽지않고 살아남아 그분의 뜻으로 세상을 물들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영혼까지 여러 조각으로 쪼개놨더니 그걸 기어코 마지막 한 조각 까지 찾아내어 소멸 시켜버린 망할년.

자신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그렇게 소멸해버렸으니 결국 누구의 승리로 끝났는지 알 수 없었다.

죽은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 법이니 자신이 소멸한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고.

'..신기한 일이지.'

분명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소멸했을 터인 자신이 어떻게 이렇게 다른 세계에서 다시 육신을 가지고 눈을 떠 활동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은 지금 존재하고.

그 전에 못 다한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

그것이 지금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도 이번에 느껴진 에르델의 파장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녀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거라면 승산이 매우 떨어진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현재 상태의 자신과 뱀파이어들로 그녀를 잡는 것은 무리였다.

전장에서도 그녀를 붙들고 있는 건 1군단의 압도적인 물량공세였지 자신들의 역할은 그녀와의 정면 승부가 아니라 다른 인류 수뇌부들의 암살, 정보 조작, 기습 작전이었으니 상성 자체가 안 맞는다.

'왠지 그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펄럭

눈살을 찌푸리며 보고서를 다시 읽어봤다.

화산 근처에 있던 마을에 에르델의 신성력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나타났고 그쪽으로 향한 일족 중 살아 돌아온 이가 없다... 라..

-툭 툭..

손가락으로 의자를 건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르델이 그쪽에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는 반쯤 기정사실로 가정해야 한다.

돌아온 이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 신성력은 높은 확률로 에르델의 것이었고 자신 또한 그 먼 곳에서도 그걸 느낄 정도였으니 세상에 똑같은 신성력을 다루는 사람이 또 있는 게 아닌 이상 그건 에르델이 맞을 거다.

그러면 이제 또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에르델이 그곳에 나타났느냐.

'...전쟁은 아무래도 우리쪽이 진 게 맞는 것 같군.'

죽지 않은 자들 쪽이 이겼다면 그녀가 살아있을 리가 없으니 인류측이 승리하고 살아남는데 성공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자세한 사정은 다를 수 있다고 쳐도 현재로서 그 이후까지 추측할 방법은 없으니 대충 그 정도로 넘어간다고 하면..

'..내가 넘어온 걸 알고 있나?'

일반적으로 한 차원의 존재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굉장히 큰 위험을 동반한다.

전설 속에나 등장할법한 대마법사들도 정복하지 못한 게 바로 차원장벽이다.

다른 차원의 존재의 침입을 막고 차원 내부의 존재의 이탈을 막는 일종의 법칙에 가까운 무언가.

한 차원의 존재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그런 장벽을 2개나 뚫어야 한다.

갈 때. 그리고 들어올 때.

자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과정이 끝나있어서 상관 없었지만 에르델이 아직 본래 세계에 있다면 아무리 그녀라도 본체가 직접 이 세계에 들어오는 방법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서 추측해볼 때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강림?'

누군가의 몸에 일시적으로 들어오는 형태였다.

그것도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소모해서.

차원장벽의 구속력은 중력처럼 대상이 가진 힘이 클수록 훨씬 더 강해지는 형태이기 때문에 그녀의 본체가 장벽을 뚫고 나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녀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그 세계를 버리고 처음 보는 세계로 올 리도 없으니 결국 결론은 하나로 좁혀졌다.

'그러면 중간에 매개체나 연락 수단 같은 게 있다는 건데..'

누굴까 이 세계에서 에르델의 눈이 되고 있는 자는.

그자만 잡으면 에르델의 존재를 배제하는 게 가능했다.

'그자의 몸에 강림했었을 테니 그 주변에 흔적이 남아있겠지.'

비록 첫 기습의 결과가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에르델이라는 변수를 이 시점에서 확인한 건 상당한 수확이었다.

괜히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왔다면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튀어나와 봤자 잃는 것은 고작해야 병력들 정도가 전부였고 본격적인 의식 준비엔 전혀 차질이 없었다.

'그래도 병력은 제법 많이 줄었군.'

이번 일로 복귀하지 못한 뱀파이어들이 약 20명 정도.

뱀파이어 한 명이 권속을 적게는 2~3명. 많으면 5~6명 정도 거느리고 있으니 실제 숫자는 거기서 곱해야 했다.

일반적인 언데드들과 달리 소수정예를 지향하는 뱀파이어들에게 꽤 뼈아픈 수치.

그래도 갑작스러운 변수가 있었음에도 정말 필요한 건 다 구해왔다는 게 위안이었다.

구파일방 중 하나인 화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사파와 정파 사이의 불신을 새김과 동시에 양측에 상당한 수준의 병력 손실을 입혔다.

그리고 그곳에 간 본연의 이유였던 옛날 혈교의 신물도 후퇴하는 동안 챙기는데 성공했다.

필요할 땐 후퇴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내야 하는 법.

이 정도면 최상의 결과까진 아니어도 간신히 중상 정도의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

'그래도 에르델의 손에 당했으면 다들 소멸했으니 포로로 잡히진 않았겠.. 음?'

명단과 대조하며 피에 이어진 권속의 숫자를 체크해보다가 한 가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아직 소멸하지 않은 이가 한 명 있었다.

'..플로라?'

얼마 전 흥미가 가서 거뒀었던 장난감.

집념과 광기가 마음에 드는 게 한번 키워보면 재밌게 크겠다 싶어 가지고 놀았었더니 이번에 돌아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화산으로 보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 돌아오지 못한 인원의 대부분은 화산이 아니라 근처의 마을에서 민간인을 습격하다가 에르델에게 휘말린 이들이지 화산에 갔던 이들은 대부분 무사히 돌아왔다.

그곳의 무인에게 제압 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미개한 세계라고 하지만 어떤 것이든 극에 이른 자들의 한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근데 제압 당했다고 해도 뭔가 이상했다.

자신 휘하의 모든 뱀파이어들과 그 권속들에겐 만일 포로로 잡히게 되면 정보 발설 방지를 위해 육신이 바로 먼지로 흩어져 사라지는 술식이 내장..

'...까먹고 있었군.'

생각해보니 누가 되살렸는지도 모를 그녀를 자신이 권속으로 들여온 것이었으니 그런 술식을 새겨야 한다면 다름 아닌 자신이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경우는 자신도 처음이라 깜빡 잊고 있었다.

'...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도 힘을 거두어들이면 그만이다.

다른 뱀파이어들이라면 모를까 자신은 로드였다.

모든 뱀파이어들의 왕. 모든 흡혈귀들의 시조.

그들이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 것은 곧 자신의 능력이고 자신의 은혜다.

그 말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권속들을 그 순간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아직 까진 제법 쓸모 있는 부하들이니 그럴 마음은 없지만 쓸모없다고 판단되면 그것도 고려해 봐야겠지.

-툭.

아무튼 방금 플로라와의 연결을 끊었다.

이틀 정도 되는 동안 그녀가 포로로 어떤 정보를 발설했는지가 관건이지만 그다지 걱정되진 않았다.

어차피 장난감에게 알려준 정보는 그다지 쓸모없는 것들 뿐이었으니까.

사실 그녀가 포로로 잡혀있지 않고 어디서 지금 살아서 귀환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중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장난감은 안전하게 가지고 놀아야지 위험한 장난감은 바로 버려야 하는 법이니까.

'그러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가장 중요한 건 가지고 돌아온 혈청으로 그분을 위한 의식을 준비하는 것.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건 에르델이 이 세계에 두고 있는 '눈'의 존재를 찾는 것.

'기대되는군.'

아직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에르델과 그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면 조금의 단서만 찾아도 정체의 특정은 금방 할 수 있었다.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를 확보하고 에르델이 보는 눈앞에서 어떻게 망가트릴지 고민하는 것 만으로도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즐겁게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꺄, 꺄아아악!!"

아침부터 들려온 당아영의 비명 소리.

"ㅁ,ㅁ,뭐 뭐에요..?"

"..무슨 일이냐."

나와 스승님은 한참 자고 있다가 급하게 방에서 나와 당아영의 비명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고

"포, 포로로 잡아뒀던 사람이..!"

"...어우."

전에 잡아뒀던 흡혈귀 여자가 마루 바닥에 어마어마한 피를 흘리면서 머리를 박고 쓰러져있었다.

무슨 추리 만화 같은 데서나 볼법한 광경.

"이, 일단 피를 닦아야겠죠..? 수, 수건이.."

당아영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가 쓰러진 쪽으로 다가갔다.

독이라도 숨겨두고 있던 걸까?

'뭐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딱히 안 들어도 그렇게 아쉬운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죽은 모습을 보니 그것도 시간을 끌기 위한 말이었나 싶다.

자결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독이었을 수도.

"저기요. 죽었어요?"

-툭툭

그녀 주위로 어마어마하게 흩어져 있는 피를 보면 당연히 죽었을 테니 그냥 괜히 해본 말이었..

"...으..."

"?!"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신음 소리를 내더니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깜짝 놀라 그대로 기겁하며 그녀에게서 멀어졌고 잠시 뒤 그녀가 머리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눈을 보자마자 무언가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혹시 누구..세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붉은색이었던 눈동자가 익숙한 푸른색으로 변해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