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11장-큰 고비
마을 전체가 불타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이제야 하루.
다행히 중간부터 이상하게 변한 그이에게 흡혈귀들의 관심이 몰린 덕분에 민간인들의 피해가 조금 덜어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마을의 분위기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정확한 피해는 관에서 집계를 해봐야 알겠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리란 것은 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분위기 만으로도 읽을 수 있었고 그런 길을 걷는 것은 여러모로 마음이 불편한 일이었다.
불타버린 집 앞에서 허망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자신이 부유한 편이라곤 하지만 그들 전부를 도와줄 순 없었다.
그 정도면 아예 가문 차원에서 움직여야 하는 일이고..
이 정도 피해면 아마 무림맹이나 황실도 민초들을 마냥 지켜만 보고 있진 않을 테니 저 사람들도 어떻게든 도움은 받을 거다.
아무튼 지금 자신은 집을 고칠 인부들을 찾아 온 상태.
그리고 그 계획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없다고요?"
"ㅇ, 예 아가씨.. 아시다시피 지금 마을 전체가 상황이 이래서.. 건축 자재는 무림맹이나 상회가 다 쓸어가서 남은 게 없습니다.. 급하게 나무꾼들이 산으로 향하긴 했는데 가공하는데 시간도 필요하고 상황도 이러니 가격도 평상시의 수십 배는 될 겁니다."
"으음.."
생각해보면 당연한 변수였다.
마을 전체가 화마에 휩싸였었으니 건물을 복구하는데 필요한 목재의 수요가 폭등할 것은 물 보듯 뻔한 일.
특히 무림맹이나 상회같은 조직은 건물의 규모가 커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많이 필요할 테니 그들이 건축 자재를 싹쓸이 해갈 거라는 것은 미리 예상을 했어야 했었다.
그렇다고 새로 들어올 목재를 예약하자니 아무리 자신이 부유한 편이라지만 가격이 수십 배로 불어난 것들을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미 예약이 꽉 차있을지도 모르고.
'이건 가문에 도와 달라고 해야겠는데.'
가문 사람한테 연락하면 아마 멀지 않은 곳에서 재료를 구해다 줄거다.
자신이 지금보다 경지가 낮고 그이와 같이 살지 않을 때는 항상 근처에서 대기 중인 호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불편해서 돌려보냈으니 연락할 수단을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아까 집을 나올 때부터 가슴속에 남아있는 이상한 감정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이와 스승님의 관계였다.
스승님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중년이나 노인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 외모가 상상 이상으로 화끈하신 분이었다.
단순히 젊은 게 아니라 그..
'...안 불편하나..?'
같은 여성으로서 왠지 모를 패배감이 느껴질 정도.
물론 스승님이 젊고 아름다우신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를 일찍 거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청뢰검님이나 검후님처럼 반로환동을 한 엄청난 고수일 수도 있으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 몸매가 어떻게 나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것도 문제라고 할 것까진 없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스승님.. 맞나?'
사이가 좀 많이 친밀해 보였다는 것.
물론 스승과 제자가 불순한 관계를 가진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경하고 더러운 짓이긴 하지만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사이가 좋아 보였다.
10살도 안되는 아이라면 모를까 다 큰 성인끼리 잘 때 그렇게 딱 붙어서 자는 건 스승과 제자라기보단 마치..
...애인..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으니까.
'아니 물론 그럴 리가 없긴 한데..'
물론 스승과 제자 사이에 그런 관계가 있을 리가 없지만 그러기엔 여자의 감이라는 게 자꾸 의심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사제관계 이상으로 친밀해 보이는 모습 하며 자신을 까칠하게 대하는 모습도 부모가 자식의 애인을 경계하는 것보다 묘하게 질투심이 섞여있는 것 같기도 했고..
-지끈지끈
'아으..'
그럴 리가 없다는 상식적인 인식과 여자의 감이 충돌하며 혼란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스승님이랑 그런 관계냐니.
정말 맞는다면 모를까 단순한 자신의 오해라면 관계가 파토나는 걸로 끝나진 않는다.
믿고 있던 애인이 부모님과도 같은 분이랑 불순한 관계를 맺었냐고 의심하는 거니까 그가 받을 상처는 어마어마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까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냥 스승과 제자치고 사이가 긴밀한 거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불순한 관계는 아닐 거다.
어렸을 때부터 길러준 대상을 그런 눈으로 볼 리도 없는데다 생각해보면 그도 자신...이 아니라 검후님이 첫 경험 상대라고 하지 않았던가.
-짝 짝
'정신차리자 당아영. 괜한 오해하지 말고.'
뺨을 두드리며 괜히 과열된 머리를 식혀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죽을 위기를 겪었더니 좀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그랑 같이 지내며 목표가 현모양처로 바뀐 탓에 소홀해진 수련을 다시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며 가문 사람에게 연락해 집 수리를 도와 달라고 전달한 다음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어제 그런 재난이 일어나긴 했다지만 결국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적응의 동물이라는 걸까.
밖에서 파는 다과를 몇 개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고
-벌컥!
"저 돌아왔어요!"
"음?"
현관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찰랑거리는 금빛의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가 수증기를 머금고 더욱 빛나고 있었고 흉기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두 살덩이는 여지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자신 없는 곳은 없다는 듯 어느 한 군데도 가리지 않고 그나마 있는 수건도 어깨에 걸친 채로 이쪽을 멀뚱히 보고 있는 모습은..
"아. 왔어요? 스승님이 지금 씻고 계셔서 잠깐ㅁ.. 우왁?!"
"..."
-꿀꺽
어디 가서 외모로 꿇려본 적이 없는데 이번 만큼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도 몸도 밀렸다.
그야말로 경국지색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외모.
"스승님 미치셨어요?! 왜 사람을 앞에 두고 알몸으로 그렇게 멀뚱멀뚱 서있어요! 빨리 옷이라도 입으시지!"
"뭘 굳이 가릴 필요가 있겠느냐. 남자라면 모를까 같은 여자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어제 막 만났는데 그러는 건 실례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거든요!"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익숙하지 않느냐. 몸 어디에 점이 있는지도 다 알 거라 생각하는데."
"어허!"
자신이 굳어있는 사이 그는 눈을 가리고 그의 스승님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몸과 함께 머리도 같이 굳어버린 탓에 무슨 말인지 잘 듣지 못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
"아. 소저. 소저 옷 좀 빌려도 될까요? 씻는 김에 전에 입던 옷을 세탁 하려는데 스승님이 당장 다른 옷이 없어서. 마침 지금 돌아왔으니까.."
"아, 네? 네. 그렇게 하세요."
"고마워요!"
"..."
그가 자신의 방으로 옷을 가지러 간 사이에도 그의 스승님은 딱히 화장실 안으로 돌아가거나 자신의 몸을 가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느냐?"
-푸릉
오히려 가슴 밑으로 팔짱을 끼며 자신에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는 상황.
"..."
그리고 그제서야 그가 가슴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남성이 여성의 가슴에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좀 많이 좋아하는 것 같길래 원래 남자들은 다 이런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이런 걸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으니..'
안 좋아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웬만한 여자들의 크기로는 아무런 감정도 안 느껴지지 않을까.
잠시 이렇게 낳아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하며 조심스럽게 눈을 돌렸다.
"...혹시 어렸을 때 특별히 즐겨 드시는 음식이 있었는지.."
"타고나거라."
"...네."
어차피 이 나이엔 늦었지만 괜히 물어봤다가 마음만 아파졌다.
한때 친구들한테 부러운 년이라는 소리를 밥먹듯이 들었던 자신이 정작 이런 입장이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여, 여기 가져왔어요! 혹시 입는 법 모르면.."
"아, 제가 알려드릴게요. 당신은 잠깐 저쪽에 있으세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알았어요!"
-휙!
그는 옷을 던지듯이 건네준 뒤 이쪽을 최대한 보지 않으며 달아났고 자신은 그의 스승님이 옷 입는 걸 도와드렸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앞섬을 모을 때였다.
-꽈아아악
"이..이익.."
"...평소에 옷을 작게 입느냐?"
"붕대로 압박하고 입는 편이라.. 아무래도.."
매듭이나 단추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줄로 묶는 형식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옷이 찢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옷 입히기를 마칠 수 있었고
-불편
"...불편하세요?"
"세탁하는 옷이 빨리 마르길 빌어야겠구나."
얼굴에 불편 이라는 단어를 써 놓은 것 같은 표정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큰 옷을 준비..
'아니 저걸 어떻게 준비해!'
저걸 소화할 수 있는 옷은 가게를 가도 팔지도 않는다.
자신의 옷도 그래서 대부분 주문제작한 건데 그거보다 윗 단계의 옷을 어떻게 구해야 한단 말인가.
주문 제작하면 어떻게든 되기야 하겠지만 재단사들도 이 정도 조건의 손님을 만나는 건 처음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당분간은 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속세에 머물러야 할 것 같으니 새로운 옷을 구할 필요가 있겠구나."
아. 당분간은 여기 머무르..
"...네?"
"네가 나가있는 동안 제자에게 지금 중원의 사정은 들었다. 꽤 혼란스러운 것 같으니 해결될 때까지는 속세에 머무르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 뿐이다."
"그, 그러면 그도.."
"...같이 머무르겠지."
-화악
표정이 절로 밝아지며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어제 그가 쓰러지고 집으로 오는 동안 그의 스승님이 자신은 원래 속세와 떨어져 사는 사람이고 속세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다. 그리고 당연히 돌아갈 때 제자도 데리고 갈 거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마음을 돌려보려고 그렇게 아양을 떨고 있었던 건데
"저, 정말이죠?!"
"...평생 머무른다는 건 아니다. 일단 그 일이 해결될 때 까지만이니 그렇게 좋아하지 말거라."
"네, 네! 제가 앞으로 더 열심히 모시겠습니다! 속세의 좋은 먹거리나 볼거리도 알려드릴게요..! 옷도 일단 원래 입던 옷이 마른 다음 편하게 입으면 재단가게로 모셔서 새 옷도 맞춰드릴 테니까요..!"
"...알아서 하거라."
가장 큰 고비를 넘기고 기분이 한참 올라간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스승님을 마저 안내했고 어느새 그와 그의 스승님의 관계를 의심하던 것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