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10장-폭풍이 지나간 뒤
"젠장! 이걸로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다음에 만날 땐 반드시 네년들의 목덜미에 이빨을 꽂아 넣어줄 테니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거다!"
바르슈타인은 저런 말을 남긴채 이상한 술수를 부려 순식간에 이곳을 벗어났다.
겉으로 보기엔 그가 도주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 것처럼 보이는 전투.
"후우..."
"후아아아아..."
-털썩
-풀썩
검후와 나는 그가 사라지자마자 격식은 어디 갔냐는 듯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도망가서 아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러모로 위태로운 전투였다.
2대1로 싸운 덕분에 우리가 훨씬 유리한 채로 그를 압박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도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숨겨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만일 그걸 썼다면 어쩌면 당하는 것은 자신들이었을지도 몰랐다.
쓸 수 없던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쓰긴 아까운 건지 그가 후퇴를 선택했기에 다행히 별 피해 없이 전투를 끝낼 수 있었다.
"저대로 보내줘도 괜찮은 건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곳에서 마무리해둬야 했던 것 아닌가?"
"기록에 따르면 분명 죽였는데도 다른 곳에서 부활한 상태로 나타났다는 말이 있어요. 저나 당신 목숨으로 저자를 완전히 이 세상에서 지울 수 있다면 시도해볼만 했겠지만 아니라면 손해가 너무 커요."
"그 정도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죽어도 부활한다는 말인가.."
"뭐. 완전한 무적은 아닐 거에요.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해도 완전히 죽일 방법은 찾을 수 있겠죠. 영 미심쩍긴 하지만.. 그 하얀 마녀에게 손을 벌려볼 수도 있고요."
-탁탁
힘이 살짝 풀린 다리를 주무르다가 다시 일어난 뒤 치마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자. 가죠. 고생한 건 알겠지만 계속 쉴 시간이 없어요. 가서 잔당들 처리하는 걸 도와야죠."
"...20년 전이 생각나는군. 그땐 어떻게 매일 이런 전투를 치뤘는지 원.."
"지금보단 젊어서 그랬을지도요."
결국 서로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싸움이 끝나가는 전장으로 향했다.
바르슈타인이 사파를 흡혈귀로 만들어 데리고 오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파는 수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은 세력들.
싸움은 정파의 승리로 끝나가고 있었다.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교에서 오셨다고요?"
"그렇다."
싸움이 끝난 뒤 여소천은 사파와 싸우는 무리 중 절대 정파의 무인이 쓸법한 무공이 아닌 무공을 쓰는 이들을 발견했고 싸움이 끝나고 나서야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때마침 신투의 비고 때문에 찾아온 마교의 세력들이 정파와 사파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고 정파쪽으로 합류했던 것.
자신을 마교의 장로 중 한명이라고 소개한 무인이 일단 현재 이곳의 대표인 것 같았다.
"...그런데 마교가 왜 정파를 도와줬죠?"
"교주님의 명령이다."
"...네?"
"가급적 정파와 충돌하지 말고 평화로운 수단으로 원하는 걸 얻어오라고 하시더군."
...마교의 교주면 당연히 천마 그녀일터.
그녀가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왜요?"
"하늘 같은 교주님의 의사를 일개 교인인 내가 어떻게 알겠나. 무언가 뜻이 있으시겠지."
그렇게 말하는 마교의 무사도 솔직히 불만이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늘 같은 교주님이라면서 정작 자기도 불만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야 당연한 말이었다.
아무리 교주님의 명령이라지만 정파와 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평화롭게 원하는 걸 받아오라고?
마교에 속한 이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마교에 속해있을 지를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말이었다.
'그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건지..'
물론 싫은 건 아니다.
그 괴물 같은 여자가 알아서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자신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는데 이쪽에서 감사하면 감사했지 아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여자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는 것.
옛날에 마교와의 전면전을 주장하던 노인네들처럼 방심을 유도하려는 계략일 수도 있지만..
'하.'
개소리 좀 작작 하라지.
하려고 한다면 구파일방정도 되는 문파라도 혼자서 정리할 수 있는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할까.
우리가 방심을 하던 만반의 준비를 하던 발길질 한방에 모든 방비가 무너질텐데 방심을 유도한다니.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있는 가장 유력한 이유가 '귀찮아서'라니.
물론 그녀가 움직여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귀찮아서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옆에 호랑이를 두고 평점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제안을 받아들이죠. 우선 뭘 원하는지 말해주시면 기록해뒀다가 나중에 분배할 때 참고할게요."
"아. 그리고 혹시 여기 무면금귀라는 자가 있나?"
"...그 사람은 왜요?"
"교주님꼐서 그자의 행방을 물으셔서 그렇네. 듣기로는 어디 소속되진 않았더라도 정파와 꽤 연이 많이 닿아있는 듯 하던데 혹시 알고 있나?"
"...전 몰라요."
...아무래도 방금 전 비유를 취소해야겠다.
'대체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이 사람!!!!!'
호랑이는 이미 이쪽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 * *
"으음.."
피곤하다.
얼마나 잔 건진 모르겠는데 너무 피곤하다.
'더 자고 싶어..'
"일어나거라. 아무리 졸려도 밥은 먹으면서 자야하지 않겠느냐."
"밥 먹으면 잠이 깨잖아요.."
"아무튼 일어나거라. 몸의 회복엔 잠도 중요하지만 영양섭취도 게을리하면 안된다."
"5분만.."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얼굴에 물을 끼얹어주겠노라."
"...힝."
스승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언제나와 같이 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골짜기가 바로 눈앞에..
"?"
잠깐만. 스승님?
"????????????"
"뭘 그렇게 당황한 표정이냐. 잠이 덜 깨기라도 했느냐?"
"아, 아니.. 스승님이 왜.."
잠에 취해 비몽사몽한 머리가 간신히 다시 일하기 시작하며 잠들기 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
당아영이 정말 죽기 일보 적진인 극적인 순간에 스승님이 등장해서 당아영을 구해주고 그 흡혈귀를 제압해줬었다.
그리고 나는 피로 때문에 그대로 기절하다시피 잠들었었고.
"스, 스승님.."
위험이 다 지나가고 안정된 상태가 되자 당시엔 급박한 상황 때문에 억눌렸던 감정들이 밀려 올라왔다.
그리고 그중 가장 강렬하게 폭발한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흑.. 흐아앙..! 스승님..!"
"그래 그래. 여기 있다 여기 있어."
"흑.. 보고.. 흑.. 싶었어요.."
나는 평상시 산속에서 잘 때처럼 나를 끌어안고 있던 스승님에게 안기며 눈물을 쏟아냈다.
"흑.. 흐윽.. 흑.."
"이렇게 울음이 많은 놈이 밖에선 어떻게 버틴게냐."
"밖에선.. 흑.. 거의 안 울었거든요."
"잠자는 사이에 물이라도 마시러 잠시 둔 것 만으로도 울던 녀석이 잘도 그랬겠구나."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스승님에게 처음 거두어졌을 때는 바깥 세상에서 당한 트라우마가 꽤 짙게 남아있던 시기라 스승님에게 많이 의존했었고 심했을 땐 스승님이 자는 사이 잠시 나갔던 것 만으로도 반쯤 패닉이 오곤 했었다.
그땐 나도 어리기도 했었고.
내가 스승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자는 잠버릇도 그때 쯤 만들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스승님과 같이 자는 사이 내가 트라우마로 악몽을 꾸면서 괴로워하자 스승님이 아기를 다루는 것처럼 나를 끌어안고 심장 박동을 들려주는 게 아마 시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언제 이렇게 됐지.'
가슴이 워낙 큰 탓에 심장 박동을 들으려면 안쪽까지 파고 들어가야 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닐까 생각했다.
나중에 내가 좀 큰 뒤엔 아무리 사제관계라지만 남자랑 여자인데 이렇게 자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했다가 씨알도 안 먹혔고 결국 성인이 된 산을 나서기 직전에도 그렇게 자고 있었다.
아무튼 그 정도로 스승님에겐 이미 내 나약한 모습까지 다 보여준 지 오래라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는 소리였다.
"흑.. 흑.."
"그만 좀 울거라. 옷이 다 젖게 생겼으니."
"흑.. 어차피 빠는 것도 저잖아요.."
"...음. 그러고 보니 여분 옷을 안 챙겨왔군."
"새로 사드릴게요. 저 밖에 나와서 돈 많이 벌었어요."
"그래 그래. 그건 알겠지만 슬슬 일어나는 게 어떻겠느냐. 어리광은 보는 눈이 없는 데서 부려야 하지 않겠느냐."
"...네?"
나는 그 말에 당황하며 스승님을 안고 있던 팔을 푼 뒤 뒤를 돌아봤고
"...에이 뭘 요. 부모님처럼 길러주신 스승님이라는데 어리광 좀 부릴 수도 있죠."
"..."
어색하게 웃는 당아영과 묶인 상태로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흡혈귀 여자가 보였다.
"...당아영은 그렇다 쳐도 저 여자는 왜 여깄어요?"
"눈에 잘 띄는 곳에 놔야 허튼 수작을 부리는지 안 부리는지 알 것 아니냐."
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그러면 반대로 저 여자가 우리가 뭘 하는지 다 보잖아요!"
"그게 문제라면 안대라도 채워두면 되겠구나."
"...그건 너무 불쌍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뭘 원하는 것이냐. 일단 일어나서 밥이나 먹거라. 네 동료의 솜씨가 꽤 괜찮더구나."
"당아영이라고 불러주세요 장ㅁ..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어차피 곧 헤어질 사이인데 호칭이 필요하겠느냐."
"에이 너무 까칠하게 그러지 마시고. 좋아하는 음식이나 과일 같은 거 있으시면 제가 최대한 준비해볼게요!"
"포도가 먹고 싶구나."
"...그건 지금 나오는 계절이 아닌데요?!"
"그래서 말한 거다."
당아영에게 까칠하게 대하는 스승님과 그런 스승님을 공략하려는 당아영.
나와 관련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여자들의 대화에 끼는 건 무섭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가 이미 밥상이 차려져 있는 식탁에 앉았고
-빤히
"...뭐 할 말 있어요?"
"..."
내가 침대에 있을 때도 식탁에 앉았을 때도 말없이 쳐다보고 있는 흡혈귀 여자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뭐 먹었으려나.'
흡혈귀라서 식사가 필요한지 안 한지도 물어봐야 하고.
혹시 필요한데 모르고 아무것도 안줬다가 죽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에휴."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위협하고 당아영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걱정하는 꼴이라니.
참 꼴사납다고 생각하며 젓가락을 움직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이틀 정도 지났는데 간신히 평화로운 일상을 돌려받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