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10장-생명의 의미5
바르슈타인이 공격적으로 태도를 바뀐 뒤, 여소천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채앵!
-챙!
"아하하! 왜 그러지! 내가 제대로 맞서 싸워주길 바라던 것 아니었나? 어디 아까처럼 자신감 넘치게 도발해 보는 게 어떤가!"
-카가가각!!
"크읏!"
가까스로 그의 검을 쳐내며 여소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력 파악이 잘못되어있었다.
아무리 흡혈귀들의 제왕이라고 해도 제대로 싸우면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만했나?'
그동안 차원방벽을 넘어오려는 언데드들을 처리하며 은연중에 자신감이 쌓였던 것 같다.
세계의 운명을 건 싸움이니 전력 파악에 신중했어야 했는데..
-까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흡혈귀를 혼자서 해치우는 건 무리가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동귀어진 정도는 노려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상대가 가진 재생력이 거슬렸다.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동시에 타격을 입혀 재생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저자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빙글
-투콰앙!
'손이 모자라..!'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을 돌아서 피한 뒤 그 반동을 실어 이어진 검격도 간신히 쳐냈다.
번개를 꽂아 넣어서 태워버린다고 해도 상처를 금방 재생해버리니 기대할 수 있는 건 전력을 실어 재생할 틈도 없이 육체를 한번에 갈아버리는 것 정도일텐데 저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만한 공격을 쉽게 맞아줄 리가 없었다.
결국 재생하지 못할 정도의 일격을 꽂아 넣든 재생을 방해하든 최소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무인 한 명 정도는 더 필요했다.
그래서 혹시 전력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 검후까지 데리고 온 거였는데..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녹림이 혈교에 장악당했다는 예상치도 못한 돌발 상황 때문에 검후의 참전이 쉽지 않았다.
물론 검후가 녹림의 총채주 따위에게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화경급 무인에 흡혈귀의 특성까지 더해진 까다로운 적이라곤 하나 고작 그 정도로 꺾을 수 있을 정도로 검후의 연륜은 낮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더라도 이기는 건 분명히 검후일터.
가까이 있었다면 언제쯤 끝날지 보기라도 했겠지만 그와 싸우며 다른 이들이 싸우는 곳과 상당히 멀리 떨어진 탓에 살펴보는 것도 힘들었다.
저 멀리 있는 상대에게 한눈팔 수 있을 정도로 싸움의 수준이 낮지 않았으니까.
-사락
"큿!"
"아까는 나보고 한눈팔 여유가 있냐고 하더니 이제 본인이 한눈파는 건가?"
그러는 사이에도 자신의 몸엔 잔상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이 싸움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은 눈 먼 칼에 긁히기만 해도 상처가 조금씩 누적되는데 반해 상대는 몸이 검에 꿰뚫려도 순식간에 복구된다.
무인으로서의 실력만 본다면 자신보단 낮다고 단언할 수 있는 저자가 싸움의 우위를 가져가고 있는 건 바로 그 이유였다.
공격적인 태도로 내게 상처를 늘리고 그동안 당할 수밖에 없는 반격은 대부분 재생력으로 무력화 시키는데다 정말 위험한 일격은 피한다.
비겁하다면 비겁하지만 자신의 강점과 상대의 약점을 효과적으로 파고든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대로면 진다.'
자신에겐 상처가 늘어가고 상대에겐 별다른 상처가 생기지 않는 상황.
싸움이 이 상태로 계속되면 자신이 패배할 것은 자명했다.
이대로 몸을 뺀다면 살아남을 순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뱀파이어 로드가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전장으로 돌아가 전장을 초토화 시켜버릴 거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어떤 수가 없...나?'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만한 변수가 필요한 상황.
빠르게 지금 자신에게 있는 모든 수를 종합해 괜찮을만한 계획들을 조립하다가 반쯤 잊고 있었던 한 가지 물건의 존재가 떠올랐다.
'...아!'
지금 허리춤의 배낭에 담겨있는 이상한 물약.
출처가 그 하얀 마녀인 만큼 미심쩍긴 했지만 물약 자체는 굉장히 성능이 우수한 회복약이라는 걸 확인했다.
외상도 순식간에 치료할 정도로.
그걸 지금 마시면 상처가 전부 나을테니 다시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나?'
지금 잔상처가 많긴 하지만 상처가 없을 때도 딱히 자신이 유리하진 않았다.
초반에 자신이 그를 몰아붙였던 건 그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기 위해 적당히 받아쳐줬던 거지 그가 공격적인 태도로 변한 이후는 바로 지금 상황까지 몰렸다.
이제 와서 상처가 없어진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질 건 없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머릿속에 다른 작전이 떠올랐다.
확실하진 않지만 통한다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작전.
'..해볼만 해.'
실행해볼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뒤 실행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허리춤의 배낭에서 담겨있는 병 자체도 상당한 수준의 유리공예품인 물약을 꺼내 들자 바르슈타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와 같은 세계에 있던 물건인 만큼 이 물약의 효용성을 아는 모양.
"...그렇게 둘 것 같으냐!"
그는 자신이 그 물약을 마시게 두지 않으려는 듯 날개를 펼쳐 돌진하며 붉은 빛의 마검을 휘둘렀다.
확실히 마실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한 수준의 일격이었고
자신도 이 물약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사악!
"뭣?!"
그가 검을 휘두르러 돌진할 때 그의 검을 옆으로 흘려보내며 다른 한 손에 든 병에 힘을 주며 그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고
-쨍강!
병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안에 있던 내용물이 그의 머리를 적셨다.
여기까지가 자신이 생각한 도박.
그리고 도박의 결과는..
-치이이이이익!!!!!
"끄으으으윽!!!!!!!!!!"
'먹혔어..!'
피부를 불로 지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검을 휘둘렀으나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정신은 있는 것인지 뒤로 도약해 빠져나갔다.
-슈우우우..
"크윽.. 에르델..! 에르데에엘!!!! 네년!!!!!! 그 년과 무슨 관계냐!! 에르델 브라이트 그 망할 년과 무슨 관계냔 말이다!!!!!"
그는 자신과 대치하는 동안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수준의 분노를 쏟아냈다.
그만큼 에르델 브라이트라는자를 향한 감정이 안 좋은 걸까.
"크윽..!"
그의 얼굴 피부가 흉하게 일그러지며 항상 쓰고 있던 태연함과 교만함의 가면이 벗겨졌다.
그가 아까와 달리 여유가 없어졌음을 증명하는 상황.
-파지직
"궁금하시면 직접 물어보시죠. 저를 이기고 말이에요."
"젠장.. 도발에 소질도 없는 년 같으니라고.. 도발은 그따위로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뭐. 그렇다면 모르는 채로 살면 되는 거죠. 괜찮겠어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신 것 같은데."
"큿..!"
도발에 소질이 없다는 말과 달리 정작 그는 자신의 저급한 도발에 제법 훌륭하게 걸려주고 있었다.
그만큼 여유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한다는 거고
-파바바박!
"제길 이건 또 뭐냐!"
-챙!
그의 사각에서 날아온 십수개의 이기어검들이 그가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검격에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중원에 한번에 저 정도 숫자의 이기어검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검후?!"
[미안하군. 생각보다 반항이 거세서 말이야. 일단 적이 방심 중인 것 같아서 공격했는데 혹시 대화중이었나?]
[아뇨! 잘했어요!]
순식간에 전황이 이쪽으로 기울어지며 승기가 다가왔다.
적은 여유가 없어졌고 우리 쪽은 검후가 합세한 상황.
"...하. 이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그대가 소연이를 이상하게 만들었다는 자인가?"
"이쪽 세계의 이름따윈 기억하지 않는다 멍청한 년."
바르슈타인은 묘하게 자신이 요즘 아끼는 장난감과 비슷하게 생긴 그녀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 * *
"...뭔 상황이지 이건?"
성녀님에게 몸을 넘겨주고 난 뒤의 의식은 없었고 내 기준에선 갑자기 장면이 이렇게 바뀐 상황이었다.
주변에 뱀파이어들의 시체가 즐비하고 당아영도 무사히 있는 걸 보면 일단 계약은 제대로 지킨 것 같은데..
"...유성아?"
'저년은 또 뭐야 미친.'
-부들부들
반대편 벽 쪽에서 검으로 몸을 지탱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자.
외모를 보니 딱 봐도 흡혈귀였다.
상태가 안 좋은 걸 보면 성녀님이랑 한참 싸우던 도중이었던 거 같은데
'미친 마무리는 해주고 가야 할 거 아니에요.'
한참 싸우다 말고 돌아가버린 성녀님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빠르게 머리를 회전 시키기 시작했다.
"유성아.. 유성이 맞지? 아까 그 이상한 여자 아니지? 응? 응?"
보아하니 저 흡혈귀도 상처를 꽤 입은 거 같은데 허세 좀 부리면 싸우지 않고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성녀님을 강림시켰을 때만 그렇게 강해진다는 걸 저 여자가 알리는 없었으니까.
'...근데 저 여자 나를 아나?'
뭔가 얼굴이 익숙한 느낌이 들긴 하는데 기억 속을 뒤져봐도 딱히 아는 사람 같진 않았다.
아는 사이인지는 둘째 치고 우선 대화를 시도해보기 위해 살며시 발을 내딛으며 입을 열었다.
"자. 우리 여기까지만 할까요? 보니까 동료들도 많이 죽은 모양인데 괜히 더 피를 흘릴 필ㅇ.."
그때였다.
-풀썩
"어?"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한발 내딛은 순간 그게 마지막 체력이었는지 다리에 그대로 힘이 풀리면서 바닥에 풀썩 쓰러졌고 다시 몸에 힘을 넣으려고 해도 배터리가 방전된 기계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런 부작용이 있다곤 말 안 했잖아!'
그리고 그와 함께 어마어마한 근육통이 몰려와 도저히 바닥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까지 됐다.
바닥에 철푸덕 엎어져 주변의 타오르는 열기까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상황.
"다, 당신 괜찮아요? 돌아온 거죠? 혹시 그 상태의 부작용이라도.."
"으그으극.."
"유성이한테 손대지마!!!!!!!"
-화들짝!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오던 당아영은 흡혈귀 여자의 외침에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저, 저사람 누군데 저래요? 아는 사람이에요? 혹시 전여친?"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요."
왠지 어디서 본 것처럼 인상이 익숙하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전여친은 무슨 내가 산에서 나온지 이제 3년인데 그사이에 애인이 있었을 리가.
-쿵!
"유성..아?"
그렇게 생각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상대는 크게 상처 입은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전여친 아니에요? 표정이 무슨 배신 당한 사람 같은데."
"아니 진짜 모르는 사람이라니까요?!"
그녀가 충격 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당아영이 나를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저, 저기.. 누군진 모르겠지만 혹시 절 아시는 거면 일단 싸움은 멈추고 나중에 따로 대화..
"하..하... 그랬었지.. 기억을 잃었다고 했었지.."
'...뭐?'
기억을 잃어? 내가? 갑자기?
"괜찮아.. 어차피 그렇게 좋은 기억도 아니었고.. 새로 출발해도 돼. 과거는 지우고 새로 시작하면 되는 거야."
"저기 아까부터 무슨 말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 일단 진정 좀 하시고 저희 그이를 아시는 분이면 이따가 따로 대화.."
-푸욱!
"어?"
"그러니까 우선 방해물부터 치울게."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어느새 지근 거리까지 다가와 당아영의 배에 칼을 찔러 넣고 있었다.
-철푸덕!
-꿀럭..꿀럭..
"커.. 흐.."
"너가 스승님 다음이야? 아니면 스승님의 하인? 아니다. 무공을 보니까 당가인 거 같으니까 하인은 아닐 거고.. 뭐 됐어."
"지금은 과거 청소 중이니까."
순식간에 차가워진 목소리.
심연의 밑바닥과도 같은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억지로 움직여 당아영과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목을 돌리자 기껏 나은 상처가 다시 악화된 당아영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안돼.."
"...그 더러운 몸으로 유성이한테 손댔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와. 아무래도 안되겠어."
-철푸덕!
-화르륵!
"윽.."
"직접 숨통을 끊기도 싫으니까 그 안에서 지켜보고 있도록 해. 그래도 그동안 유성이를 돌봐준 대가로 눈을 뽑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당아영을 주변에 타오르는 건물 사이로 집어던졌다.
당장이라도 불에 타 무너질 것 같은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던져진 당아영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한 상황.
"안돼.. 안돼.."
"누나도 우리 순수하고 여린 유성이한테 저런 걸 보여주고 싶지는 않지만.. 이 정도는 봐둬야 유성이가 다른 생각을 안 하겠지? 미안해. 이따가 무릎베개 해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제발.. 살려.."
계약했잖아.
기껏 미래까지 팔아서 살리려고 한 건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라고?
이러면 계약에 무슨 의미가 있던 건데?
내 미래는 무슨 의미로 저당잡힌건데?
고작 20~30분 더 살아있으려고?
"누가 좀 도와.."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 당아..!"
[비록 이렇게 헤어지겠지만 그동안 당신 덕분에 행복했으니까 너무 죄책감 가지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싱긋
왜 웃는 거야.
너 이제 죽는다고.
죽기 전인데 왜 웃고 있는 건데
[저 여자가 조금 걱정이긴 한데 검후님이나 청뢰검님이 있으니까요. 납치 당했을 때의 요령 아시죠?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서 구출되길 기다리세요. 그분들은 저랑 달리 확실히 지켜주실 테니까.]
"아.. 아.."
[오늘은 화장이 잘못됐는데 조금 아쉽네요. 마지막 모습은 최대한 예쁘게 남기는 게 좋을텐데.]
제발.
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뭘 바쳐도 좋으니까.
미래고 영혼이고 몸이고 뭐고 다 줄 테니까.
"누가.. 좀 도와주.."
-와르르!
기적은 두번이나 일어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건물은 이내 화염에 집어 삼켜지며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고 그 안에 있는 당아영 또한 불타오르는 건물의 잔해에 깔리는 모습이 내게 주마등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사랑했어요.]
"....! .....!!!"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뻗어 당아영 쪽으로 뻗었다.
물리적으로 절대 닿지 않는 거리지만 마음 만이라도.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리고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 쯤이었다.
"쯧. 집 나간 제자를 찾아서 왔더니 그사이 사고를 대판 친 모양이구나."
....어?
"그러게 술법 몇 개는 익히라고 하지 않았더냐. 특히 소방용 부적은 내 분명히 알려준 적 있는 것이거늘."
[이미지: http://image.novelpia.com/imagebox/52/52a2436caee94bf1db9733f449a06cca_5986489_1683405121_ori.file]
"스승..님?"
"착각하지 말거라. 이 녀석이 예뻐서 살려주는 게 아니라 그동안 있던 일에 대해서 설명해줄 녀석이 필요해서 살려주는 거니."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린 직후
마을 전체에 퍼져있던 불길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조종 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