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10장-생명의 의미4
"유성아..!"
화산을 공격 중이던 뱀파이어들이 빛의 기둥을 보고 의아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사이 검화는 이상하게 그쪽 방향에 강한 이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잠깐 플로라! 어딜 가려는 거냐! 네 임무 방향은 그쪽이 아니다!"
"유성이의 냄새가 났어..! 저쪽에 유성이가..!"
-텁!
"지금 주어진 임무를 거부하겠다는 거냐?"
리그레타는 당장이라도 기둥이 있던 방향으로 향하려는 검화를 붙잡으며 일부러 살벌한 목소리를 냈다.
분위기를 잡고 그녀를 위협해보려던 시도였지만 그녀는 들은 채도 안하고 바로 팔을 뿌리쳤다.
-빠직
"잡종년이 로드의 관심을 받는다고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당장 주변에 적도 없겠다 이참에 버릇을 단단히 고쳐.."
그녀가 팔을 뿌리치자 화가 단단히 난 리그레타는 당장 회로를 달궈 오른손에 마력을 집중했지만 그녀가 그곳에 담긴 마력을 사용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귀찮게 하지마!!"
-서걱
'어?'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거꾸로 뒤집히며 그대로 바닥까지 추락했다.
"유성아.. 거기 있는 거 맞지? 누나가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테니까 도망가면 안돼.. 응?"
-타다닷!
리그레타는 서서히 감겨가는 의식 사이에서 생각했다.
'왜 나한테 이딴 임무를..'
저런 위험한 인물이었으면 감시하라고 하기 전에 미리 애기해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가장 중요한 설명을 누락한 담당자를 향해 억울함을 느끼며 그녀의 의식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 * *
-꿀꺽
"당신..?"
당아영은 쓰러진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하고 떨리는 눈으로 평상시와 다른 분위기의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하늘에서 하얀색 기둥이 내려 꽂히더니 방금 전까지 꼼짝 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라도 도망가라고 발버둥 치고 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손쉽게 흡혈귀들을 처치했다.
순간 저것도 그가 가지고 있는 이상한 물건의 일종인가 싶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거 같았는데
방금 그의 모습을 보면 평상시의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 군데군데 흰머리가 보이고 눈동자가 회색으로 바뀌어있고 중원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술법을 사용한 것도 그렇고..
'대체 방금 무슨 일이..'
당아영이 혼란을 수습하기도 전에 그녀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광경이 펼쳐졌다.
"하아.. 하아.. 이게 용사님의 몸.. 드디어.."
갑자기 자기 몸을 끌어안더니 몸을 비비적 거리다가 이내 상의를 코로 끌어올려 자신의 체취를 맡는 장면.
방금 전까지 살벌한 분위기로 흡혈귀들을 소멸시키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후아아.. 다른 분들이 그렇게 미치는 이유가 있었네요. 맨날 화면 너머로만 보다가 이렇게 직접 느끼니까 여기가 바로 천국.."
"저, 저기?"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잠시만요. 제가 환자를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네요."
확실히 어딘가 이상했다.
갑자기 자기애성 성격장애라도 생긴 것처럼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냄새를 맡지를 않나 이해 못할 소리를 하질 않나
말투도 어딘가 여성스럽게 바뀐 것 같고..
"당신.. 누구에요?"
순간 책에서나 나올법한 다른 사람의 몸을 강제로 빼앗는 사악한 술법이 생각났다.
그렇게 생각하면 상황이 이해가 됐다.
지금 눈앞에 있는 그는 겉모습만 비슷하지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고.
"으음..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직접 들으세요. 강림 시간에 한계가 있어서.."
"그이는 어떻게 된 거에요?! 살아는 있는 거죠?!"
"지금은 주무시고 계세요. 제가 돌아가고 나면 평상시처럼 돌아오실 테니 걱정 마시길."
"그, 그러면 다행이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당아영에게 다가와 상처 부위에 손을 가져다 댔고 당아영은 따스한 기운과 함께 상처가 감쪽같이 나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 우선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아까부터 기존의 상식이 붕괴되는 일들만 일어나 머리가 혼란스러웠지만 우선 그? 그녀 덕분에 살아남은 것 같으니 당아영은 순수하게 당황을 표했다.
"에이 고맙긴요. 대가는 충분히 받았는걸요.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건 알겠지만 조금 기다려주시겠어요? 슬금슬금 냄새를 맡고 오는 벌레들이 많은 것 같아서."
그는 치료를 마친 뒤 당아영에게서 등을 돌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비가 오긴 했었지만 겨우 소나기정도였기에 마을 전체에 붙은 불을 끄는 건 무리였고 비가 그친 지금은 다시 슬금슬금 불길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불길 사이로 조심스럽게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어머. 익숙한 얼굴들이 많네요. 겨우 저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들 몰려오셨나요?"
"...정체를 밝혀라. 네 녀석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그 힘을 쓰고 있.."
-투콰아앙!!
뱀파이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주먹으로 가격하는 것 만으로 뱀파이어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신체 능력.
평상시의 단유성의 몸이었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뭘 한가하게 말이나 걸고 있어요? 친근하게 대화를 섞을 사이도 아닌 주제에."
"...쳐라!!"
이세계에서 느껴지는 신성력을 조사하기 위해 근처에 있던 모든 뱀파이어들이 그들의 권속을 이끌고 온 상황이었지만 그들이 전부 소멸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데드를 상대하는 거라면 이미 도가 튼 그녀였고 차라리 엄청난 물량이면 모를까 어중간한 물량이라면 오히려 그녀가 손을 휘두르는 족족 소멸시킬 수 있었으니 상성도 그녀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비록 마지막 발버둥을 막지 못해 세상이 멸망해버렸지만 일단 용사와 함께 초월자까지 잡아내는데 성공했던 그녀인데 겨우 이런 잔챙이들한테 당할 리가 없었다.
그를 확실히 지키기 위해 가져올 수 있는 신성력을 최대한 끌어온 상황이었으니까.
"으음.. 신체 강화가 너무 강했으려나요. 용사님 몸이 워낙 허약해서.. 제가 돌아가고 나면 며칠 동안 근육통에 시달리실지도.."
간만에 원수들을 만나 조금 날뛰어버리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정도가 좀 심했나 싶었다.
하지만 마법을 시전해서 뱀파이어들을 소멸 시키는 것보단 신체를 강화하고 패버리는 쪽이 간섭력의 소모가 적고 차원방벽이 눈치챌 확률도 적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법으로 잡으려고 했다간 차원방벽이 뒤틀림을 인지하고 뱀파이어들을 다 소멸 시키기도 전에 자신을 쫓아낼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름 아끼고 아껴서 쓰긴 했는데.. 이 정도면 곧 쫓겨나겠네요."
그러나 이런 형태로 강림한 이상 오랫동안 버티고 있는 건 불가능했다.
기껏 힘들게 모은 간섭력이 이미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고 이 정도면 아마 앞으로 3분 정도가 한계일 것 같았다.
"저, 저기요. 이제 다 끝난거죠?"
"네.. 아마도요?"
그래도 이걸로 주변에 있는 뱀파이어들은 다 처리한 거 같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
-꿀꺽
아직 기껏 용사님의 몸에 들어와서 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조심스럽게 옷을 움직여 바지에 손을 올리고 살짝만 보이는 각도로 들어 올리면..
"자, 잠깐. 지금 뭐 하는.."
그 순간이었다.
-흠칫!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뱀파이어 개체가 하나.
빠르게 마력을 퍼뜨려 살기가 향하는 방향을 탐색했고 그게 옆에 있는 여자라는 걸 파악한 순간 행동은 빨랐다.
"위험해요!"
아직 남아있는 신체 강화 마법의 힘을 실어 그녀를 공격 범위에서 떨어트리고 다가오는 뱀파이어 개체를 마주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면 진혈에 가까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 뱀파이어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년이었어?!'
기분 나쁘게 용사님을 스토킹하는 여자.
용사님이 이 세계에서 만든 인연 중 두번째로 위험한 인연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래 노리던 여자를 공격 범위에서 떨어트리자 당황했는지 검을 거두려고 했지만 자신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지금 남아있는 기운으로는 한번.'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자신이 돌아간 뒤에도 용사님의 첩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고 그러면 계약에 문제가 생긴다.
적어도 강림해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위험요소를 배제해야 하는 상황.
오히려 검을 거두려고 하고 있는 그녀의 품속에 파고들며 한쪽 손에 지금 남아있는 신성력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원래 노리던 여자를 빼낸 것도 모자라 자신이 오히려 품속으로 파고들자 더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당황하는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찢어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살기가 담겨있는 붉은 눈동자.
'..눈치챘나?'
이 짧은 시간 만에 자신이 용사님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다니.
저 인간을 벗어난 짐승 수준의 본능 만큼은 인정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머릿속 상황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것보단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게 우선.
'이거나 쳐먹어..!'
-파앙!
마지막 남은 한 톨의 신성력까지 끌어모은 일격이 그녀의 단전 부위에 적중했다.
용사님의 복수의 의미도 있지만 인체의 급소 중 하나이니 지금 남은 신성력으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쾅!
-우르르
자신의 공격을 얻어맞고 반대쪽 벽까지 날아가 쓰러져있는 그녀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 당분간 일어나지 못할..'
-부들부들
"너.. 유성이를 어떻게 한 거야.."
"?!"
수백 년 동안 전장에서 살면서 온갖 믿지 못할 일을 경험한 자신이었지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분명 제대로 적중했다.
그녀가 지금 뱀파이어가 된 이상 신성력을 얻어맞고 저렇게 멀쩡할 수가 없었다.
소멸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몇 분 동안은 몸도 못 가누어야 정상인데..
'대체 저 여자 정체가 뭐..'
그러나 자신이 이 몸에서 할 수 있던 건 방금 그 상념까지가 마지막이었다.
간섭력의 한계로 순식간에 의식이 빠져나가 본래 있던 세계로 돌아갔고
결국 성녀의 의식이 빠져나간 뒤 남은 건
"...뭐야. 뭔 상황이야 이거."
제대로 상황이 마무리 되기 전 몸을 돌려 받아버린 단유성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