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190화 (190/250)

[190화] 10장-생명의 의미3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등골에 서리라도 내려앉은 듯 싸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이 상황에서 나온 '계약서'의 작성 요구.

그 계약서가 뭔지 모를 정도로 나는 세상 물정을 모르지 않았다.

성녀님이 귀가 닳도록 내게 요구하던 계약서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제가.. 생각하는 그 계약서에요?'

[물론이죠. 설마 '강림한 상태에서 싸움에 의해 원래 주인의 몸이 다치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같은 시시한 내용의 계약서라도 생각하셨나요?]

'...'

성녀님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평소에도 틈만 나면 계약서를 써 달라고 이상한 수작을 부려오긴 했지만 그건 농담이나 장난이 대부분이었지 이런 진지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굉장히 진지한 상황이었다.

당장 그녀가 도와주느냐 마느냐에 따라 당아영과 내 생사가 결정되는 상황.

'자, 장난이죠? 성녀님 원래 그런 성격 아니었잖아요. 성녀님이 안 도와주면 당아영이 죽..'

[네. 그녀는 죽을지도 모르죠. 그치만 용사님은 무사하시잖아요?]

-오싹

안 그래도 싸늘했던 몸에 한층 더 오싹한 기운이 퍼져나간다.

나는 그동안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성녀님의 성격이 좋다고 생각했던 건 나와 내 안전을 향한 맹목적인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녀에게 나 이외의 사람의 안전은 인식 대상조차 아니었다.

그게 설령 내 애인일지라도.

[저도 가능하면 이렇게 강경책까지 쓰고 싶진 않았어요. 비록 용사님의 육체적인 안전이 최우선 사항이지만 2순위는 용사님의 정신건강이거든요. 정신도 육체만큼이나 중요하니까요.]

'근데 왜..'

[용사님이 이 정도 상황이 아니면 계약서에 싸인해주실 마음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

[자,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내용은 정보의 형태로 머릿속에 보내드릴 테니까 '수락한다'고만 하면 돼요. 영혼을 거는 계약서니까 손을 못쓰는 상황이라도 의지만으로도 계약이 가능해요.]

...성녀님은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릿속으로 계약서의 내용을 보내왔다.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계약서의 내용은 짧고 간결했다.

나는 1만포인트가 모이는 대로 성녀님이 있는 세계로의 '소환'을 구매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은 상대방.. 즉 성녀님에게 귀속된다는 것.

대신 성녀 '에르델 세인트리스'는 당장 내게 강림해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나와 당아영의 안전을 최대한 보호한다는 내용이었다.

'...영혼이 귀속된다는 건 어떤 거에요?'

[문자 그대로의 말인데.. 궁금하신가요?]

'...아뇨.'

정확히 어떤 의미인진 알 수 없었지만 충분히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굳이 듣지 않기로 했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인 법이니까.

'...이게 성녀님의 본색이었나요?'

[본색이라뇨. 매번 말했잖아요. 전 항상 용사님만을 생각한다고.]

-까득

지구에서부터 날 지켜봤고 내 생각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인 만큼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거다.

내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성녀님이 나를 죽게 내버려둘 리가 없는데 내 목숨을 판돈으로 올릴 수 있을 리가 없고

그러면 내게 다음으로 중요한 건 가장 가까운 사람의 목숨이었으니까.

-툭..

어느새 그친 소나기의 빗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래.

어차피 원래 저쪽 세계로 갔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영문도 모르게 중간에 납치당한 탓에 잠깐 이 세계에서 휴식을 취한 것 뿐이지.

'...저기로 넘어가면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야 하지?'

순순히 인간의 수명인 100년 정도로 끝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법이든 뭐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수명을 연장 시키고 또 연장 시키겠지.

수백년..? 천년..? 만년..?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다른 차원에서 사람을 데려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자주 언급했었으니까.

그러니까..

'...수락한다.'

애초에 당아영을 버린다는 선택지는 나한테 없었다.

만약 여기서 당아영을 희생 시킨다고 한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을까?

검후님은? 여소천은? 스승님은?

아무리 그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일이 쉽게 없을 것 같다고 해도 그게 무적이라는 건 아니다.

언젠 간 똑같은 제안을 비슷한 상황에서 듣게 될 날이 올 거다.

그런 생각도 물론 있었지만..

-힐끔

"컥.. 커흑.."

저 상황에서도 내 쪽을 보면서 저렇게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주는 여자를 어떻게 배신할 수가 있을까.

'여자 복 하나는 과할 정도로 좋다니까.'

[네~ 계약 체결 됐습니다~]

한 명 빼고.

-철컥

계약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하자 정말 영혼에 자물쇠가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장 내 영혼이 귀속되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지만 어길 경우엔 정말 그렇게 될 거라는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

[그러면 용사님은 잠시만 주무시고 계세요?]

-쿵!

성녀님을 재촉하려는 순간 머리가 거대한 무언가에 강타당하는 느낌이 들며 의식이 내려앉았고

"응? 얘. 왜 갑자기 쓰러ㅈ.."

-콰아아아아아앙!!!!

불타올라 연기가 자욱해진 마을 사이에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새하얀 기둥이 하늘로부터 내려 꽂혔다.

-치이이익!!!!

"꺄아아아아악!!!!!!"

뱀파이어 여성은 신성력에 의해 불타오르는 손을 감싸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성력은 뱀파이어를 포함한 모든 언데드의 천적이었고 이 세계에 온 뒤로 신성력은 한번도 느껴본 적 없었으니 오랜만에 느끼는 작열통이 더 강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고통에서 정신 차리기도 전에 추가적인 자극이 이어졌다.

-텁

"어머~ 오랜만이네요. 저 기억 하세요?"

방금 전까지 귀엽게 가지고 놀던 꼬맹이의 몸에 갑자기 신성력의 기둥이 내려 꽂히더니 지금은 보는 것 만으로도 온몸이 떨릴 정도로 강렬한 신성력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그러나 약간 바뀐 그의 외형적 특징에서 그녀는 오랜 세월 전에 사라졌던 악몽이 눈앞에 겹쳐 보였다.

원래 흑요석같이 빛나던 눈동자가 모든 게 불타 사라진 뒤 남은 잿더미와 같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아..아..."

-덜덜덜덜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무한에 가까운 신성력으로 암살자든 군단이든 모든 언데들을 문자 그대로 갈아버렸던

생명 연합군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빛나고 독보적으로 미쳐있던 언데드 학살자를.

"어떻게.. 저번에 뽑아드렸던 눈깔은 다시 잘 갖다 붙이셨어요? 그때 창 길이가 부족해서 뇌까지 못 뚫어드렸었는데.."

"히, 히익!"

"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갑긴 하지만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건 간섭력 소모가 크니까요. 차원장벽이 우회를 눈치채기 전에 빨리 처리하고 가는 게 좋겠죠."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순식간에 뱀파이어와 그 권속 옆에 하얀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창이 튀어나와 그들을 꿰뚫었다.

-부들부들

-치이이이이익

"커..억..."

겉으로 보기엔 간단해 보이지만 그녀는 이게 얼마나 흉악한 마법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범위 내에 있는 대상들 각각의 사각지대를 분석해서 피할 수 없는 각도에 신성력의 창을 소환하는 학살용 마법.

지금은 두 명이라 두개만 나왔지만 예전에 전장에서 성녀가 이 마법으로 순식간에 가시나무 숲을 하나 만들어버렸던 건 유명한 일화였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어요? 기껏 다른 세계까지 와서 추하게 발버둥치고 있잖아요."

"사, 살려.."

"그건 안되겠네요."

-싱긋

그가 마저 손을 휘두르자 뱀파이어와 그 권속은 순식간에 신성력에 감싸여 비명을 지르다 사라졌다.

-꿀꺽

그리고 당아영은 쓰러진 상태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그를 떨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 * *

-흠칫!

한참 흡혈귀들과 인간들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던 신투의 비고 앞.

여소천과 제대로 싸워줄 생각이 없는 듯 계속 공격을 받아치며 도망만 다니던 바르슈타인은 갑자기 몸에 돋아나는 소름에 자신도 모르게 잠깐 멈춰섰다.

"...에르델?"

그는 자신이 싸움 중이라는 것도 잊은 모양인지 잠시 한눈을 팔며 먼 곳을 바라봤고 여소천은 그 기회를 놓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콰직!

"큿!"

이번에도 목을 노렸지만 아쉽게도 그전에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비틀어 어깨에 검이 박힌 모습.

여소천은 그대로 팔 하나를 받아가고자 검에 내공을 집중했지만 그보다 바르슈타인이 안개로 변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더 빨랐다.

"여유가 넘치나 보죠? 꽁무니빠지게 도망가기만 하더니 그 와중에 한눈도 팔고."

"...지금 네년의 도발에 걸려줄 여유 따위 없다. 지금 이몸이 기분 나빠하는 게 느껴지지 않나?"

"심기가 불편해 보이긴 하지만 그게 뭐 때문인진 모르죠? 방금 어깨가 베여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

"하아. 하여간 성녀라는 년들은.."

바르슈타인은 방금 느껴진 익숙한 느낌을 생각하며 고민에 잠겼다.

원래 최대한 시간을 끌며 병사들이 최대한 죽어나가는 걸 방치하고 이 성녀도 야금야금 갉아먹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확인해봐야겠어.'

차라리 잘못 느꼈기를 빌겠지만 자신이 아무리 무뎌졌다고 해도 그런 걸 잘못 느끼진 않으리라.

그러기 위해선..

"그래. 계속 도망만 다니는 게 불만이라면 소원대로 해주마. 어린 성녀여."

보다 진지하게 임하기 위해 부채 모양으로 바꿔두었던 마검을 원래 형태로 되돌리고 날개까지 펼친 뒤 전신에 얕게 마력을 퍼뜨렸다.

"죽지 않은 자들의 군단 제 3군단장이라는 자리를 지휘와 전략으로만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라는 걸 일깨워주마."

여소천은 기세가 달라진 상대방의 모습에 경계하며 검을 수비적으로 들어올렸고

이번엔 바르슈타인이 그녀에게 달려들며 다시 싸움이 시작됐다.

그리고 같은 시각

마을과 가까이 있는 화산에서도 하얀 기둥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저만한 신성력이 어째서 이 세계에.."

뱀파이어들은 모두 이 세계에선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신성력이 갑자기 저런 형태로 나타난 것에 의문을 표하며 몸을 떨었고

"...유성아?"

그중 한명은 전혀 다른 눈빛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