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10장-녹림
죽지 않은 자들과의 전쟁이 끝난 뒤, 마탑의 마법사들을 비롯한 분석가들은 승리라고 부를 수 없는 처참한 결과에 쓴물을 들이키며 그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지목한 원인은 초기의 미숙한 대처였다.
오래전.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이 탄생하고 그가 망자들의 군대와 함께 산 자들의 세계를 침공했을 때 산 자들은 쉽게 연합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삼키려고 다가오는 형상화된 죽음의 물결 앞에서도 서로 원수지간이었던 국가들은 화해를 하지 못했고
엘프들은 그들의 숲을 포기하지 못했으며
고블린과 오크들은 한 마리의 멧돼지를 사냥하는데 더 집중했고
드래곤들은 적들이 그들의 레어 앞까지 오기 전까지 침묵했다.
특히 죽지 않은 자들의 군대와 마족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들을 한패로 규정한 뒤 마족을 배척했던 당대 교황의 판단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였다.
결국 마족이 앞뒤로 포위 당해 죽음의 물결에 삼켜진 뒤에야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흑마법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마족을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을 먹어 치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 마족들은 결국 이번 사건에 있어서 만큼은 억울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었다.
정작 그것을 대륙에 존재하는 흑마법사들의 95% 이상을 참수한 뒤에야 깨달아버려서 잘 사용했다면 든든한 전략적 요인이 될 수 있는 수를 그들의 손으로 박살내버렸다는게 문제였지만.
결국 생명의 여신을 모시는 주제에 마족 배척건을 더불어 온갖 이종족 차별 발언을 일삼던 당대 교황을 성녀 에르델 브라이트가 직접 공개처형한 뒤에야 비로소 연합군이 결성될 수 있었다.
이미 전 대륙의 살아있는 생명이 70% 이상 감소한 뒤에야 일어난 일이었다.
* * *
"이 씨발새끼들이 진짜.."
-지끈지끈
신투의 비고 앞에서 혈교를 기다리기를 2주째.
여소천은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싸우는 무림인들을 보며 미간을 꾹꾹 눌렀다.
싸우지 좀 말라고 일부러 입구를 감춰 놨더니 아직 입구가 드러나지도 않았는데도 안에 있는 보물을 가지고 싸우고 앉아있다.
굳이 정파와 사파간의 싸움이 아니라 정파간에도 서로 사이가 나쁜 문파끼리 으르렁거리다가 싸우질 않나 그냥 개인끼리 싸우다가 그게 문파간의 싸움으로 번지질 않나
'내가 이딴 새끼들 지키려고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나?'
잠깐 저런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가 아픈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자신이 정파 최고의 고수 중 하나라고 해도 그게 모든 정파 무인들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곤륜의 무인이라면 통제권이 있겠지만 다른 문파 소속이라면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들을 의무까지는 없기 때문에 그들이 예의상 자신을 따라주길 바라거나 아니면 권력으로 압박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것 만큼은 자신의 오판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후배들을 너무 믿었다.
이 정도로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놈들일 줄이야.
'차라리 대놓고 혈교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면..'
일단은 사파나 아직 나타나진 않은 마교와 단체로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니 쓸데없이 힘을 빼지 말고 대기하라는 식으로 명령해 놨지만 혈교라면 아무리 혈기가 넘치는 후배들이라도 상황 파악이 가능할 거다.
정말 어린 후기지수라면 모를까 이 자리에 있을 정도면 웬만해선 그 두려움을 알 테니까.
나이가 좀 있는 이들은 어쩌면 직접 겪었을 수도 있고.
'근데 그러면 오히려 숨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이 또 누군가 다급히 천막을 두드렸다.
"처, 청뢰검님 큰일 났습니다!!"
"아 또 뭔데!!!"
"노, 녹림의 총채주가!!"
"...응?"
.
.
.
"이야! 그동안 말로는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인사하는 건 처음이네요! 반갑습니다 선배님들!"
구릿빛 피부에 건강해 보이는 몸을 자랑하는 미인이 검후와 여소천을 향해 호탕하게 인사했다.
녹림.
흔히 알다시피 중원 곳곳에서 활동하는 산적 무리들을 일컫는 말로 원래 각각 별개였을 산적 무리 수십개가 뭉쳐 지금 시대에 이르러선 녹림이라는 단체까지 거듭난 거라고 볼 수 있었다.
결국 도적 무리에 불과하지만 사파를 대표하는 세력 중 하나로서 그런 녹림의 제일 윗대가리라면 중원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순 없다.
아무리 사파가 힘의 크기 자체는 정파에 훨씬 밀린다고 해도 산을 집으로 삼으며 수련해온 그들의 본거지에 직접 쳐들어가서 싸우는 건 제법 위험한 일이었고
결국 아무리 녹림을 토벌해봤자 결국 산적들은 다시 생기고 그들이 다시 녹림이라는 이름 아래에 뭉치게 될 거라는 건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된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산적이라고 하지만 녹림정도 되는 세력의 우두머리는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화경 정도 되려나.'
추정되는 나이는 아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
무인이라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그것보다 젊었지만 그걸 감안하고 측정한 거다.
곤륜에 틀어박혀 있느라 외부의 소식을 잘 못 듣긴 했지만 언젠가 한번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녹림의 총채주의 무력이 범상치 않다고.
확실히 저 정도 나이로 저 경지라면 죽기 전에 그 다음 경지까지 충분히 노려볼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었다.
아마 재능으로 보면 검후나 자신과 동급.
반로환동도 가능할 테니 어쩌면 다음 세대를 이끌 인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녹림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무인으로서 저 정도 경지에 오른 노력과 재능은 인정해줄 수 있었다.
경지를 올린다는 건 단순히 가진 재능만 뛰어나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저도 들어본 것 같네요. 녹림의 총채주가 천하십대고수에 올랐다고 들었는데."
"어휴 아닙니다. 뭣도 모르는 세간 사람들이 멋대로 올린 거지 제가 그 정돈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선배님들이랑 같은 위치에 서있겠습니까."
...겸손하다고 볼 수 있지만 저건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당장 경지 자체가 다른 것도 맞지만 천하십대고수라는게 정말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객관적으로 측정한 뒤 이름 붙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줄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멋대로 올리는 거라
당장 천마도 천하십대고수중에 그 이름이 있다.
그러니 20년 전 전장에서 그 모습을 봤던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믿을게 못 되는 지표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도 별로 신경 안 쓴다.
거기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건 알지만 딱히 나머지 사람들을 신경 써서 외우진 않아서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힐끔
살짝 눈을 돌려 검후를 바라보자 그녀는 녹림 총채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미약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긴,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총채주가 총채주가 아니던 시절의 이야기겠지만 검후도 젊은 시절 녹림 산채는 숱하게 무너트렸었으니 감정이 좋진 않겠지.
"괜히 긴 말 하지 않고 본론부터 말하죠. 당신도 신투의 비고 때문에 온 거죠?"
"크흠.. 뭐 여기 온 사람 중에 아닌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당장 선배님들도.."
"당신도 적당히 분위기를 읽었으면 알겠지만 당장은 입구가 안 드러나서 뭘 못하고 있어요. 전문가들이 파헤치고는 있는데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고 앞으로도 몇 주는 더 있어야 소식이 들릴 거 같고요."
"아 그렇습니까?"
괜히 검후와 대화하게 해서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게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서로 싸워봐야 별로 의미도 없고 괜히 싸워봤자 피만 흘릴 거 평화롭게 합의해서 가져가자는 의견으로 지금까지 이야기 중이었고요."
"오! 평화 좋죠. 괜히 서로 싸워봤자 애먼 피만 더 흘립니까?
"...근데 녹림도 혹시 신투한테 털린 물건이 있나요?"
"아 옛날 총채주가 아끼던 도끼가 털리긴 했다는데 딱히 상관 없습니다. 어차피 그 양반도 뒈진지 오래고."
"그러면 특별히 원하는 물건은 있고요?"
"...금은보화?"
"좋아요. 일단 그렇게 적어둘게요."
의외로 순순히 말을 잘 듣는 모습에 두루마리를 꺼내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그래도 원만하게 이야기가 잘 돼서 다행이네요. 괜히 난리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하하. 제가 아무리 못 배워 먹은 산적년이라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일찍 죽고 싶진 않거든요."
"부디 앞으로도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네요. 부하 관리도 좀 잘 해주시고요."
솔직히 산적들이 정말 얌전히 있어줄 거라곤 기대도 안 하지만.
다 쓴 종이를 돌돌 말아 줄로 묶은 뒤 그녀에게 건네자 그녀가 손을 뻗어 종이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종이에 닿는 순간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두근두근
"...총채주."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서로 종이를 잡고 있는 채로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여소천이 느꼈던 위화감이란..
-스릉..
"당신.. 왜 심장이 뛰지 않죠?"
인간이라면. 아니,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면 반드시 뛰어야 할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원에 지금 그게 가능한 종류의 생명체. 아니 종족은 하나밖에 없었다.
"...하. 그러니까 근접하면 걸린다니까.."
평범한 중원 사람과 같이 검은색의 눈이었던 것이 원래 가려져 있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고
'그것'은 총재주가 움직이는 것보다 빠르게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천막 밖에서부터 일어나 순식간에 천막을 넘어 그녀들을 압박해오는 폭발.
상당한 위력의 폭발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괴물들이었다.
-카아아아앙!!
[검후?!]
[그대는 나가서 상황을 파악하게!!]
[...그건 맡길게요!]
-파지직!
검후의 검과 총채주의 도끼가 부딪히고 한줄기의 번개가 천막 밖으로 나갔을 때.
그제서야 폭발이 천막 안에 남아있던 둘에게 맞닿으며 그녀들의 호신강기를 두드렸다.
"크하하핫!! 어디 한번 놀아봅시다 선배님!"
"난 그대 같은 후배는 둔 적 없네."
"옛날부터 매화쟁이들 피에서도 매화향이 나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궁금증을 풀어보겠습니다!"
본색을 드러냄과 동시에 가식을 벗어던진 그녀의 웃음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비명소리와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진정한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