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10장-평화
소문이 퍼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과거 중원을 위협하던 혈교와 함께 맞서 싸운 영웅 중 한명이긴 했지만 그 이전에도 신투의 악명은 유명했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혼란스러운 틈을 타 온갖 문파와 세력의 보물들을 훔쳐 달아난 그였으니
그 당시 이름 좀 날렸다 하는 이들 중 그에게 빼앗긴 물건이 없는 이를 찾는 게 더 빠를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신투의 비고가 발견되었다는것은 그 물건 또한 그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중원의 내로라하는 모든 세력들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물건을 빼앗긴 당사자나 그 관계자. 빼앗기진 않았지만 그곳에 잠들어있을 수많은 비급, 영약 등의 보물을 탐내는 수많은 이들이 순식간에 그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 소식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들에게도 금방 전해졌다.
* * *
"...그러니까 전설적인 대도의 던전 비슷한 게 발견되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로드."
"하. 아무리 다른 세계라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그런 놈들은 어느 세계에나 있는 모양이야."
바르슈타인은 부하의 보고를 듣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왕좌에 등을 기댔다.
"어차피 보물이라고 해봤자 고작해야 이 세계 기준의 보물 아니냐. 영약 정도는 에너지 보충용이나 연구용으로 쓸만하겠지만 그 외의 물건은 우리한텐 하등 쓸모없는 것들 뿐이겠지. 인력을 보내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로드."
"기껏 지금까지 잘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겨우 그딴 약재들 구하자고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악수겠지. 물론.. 일반적인 경.. 에이잇!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라! 아직 말하고 있지 않느냐!"
한참 여유로운 표정을 짓던 바르슈타인은 갑자기 짜증을 내며 손을 머리에 대고 무언갈 쫓아내듯이 휘둘렀다.
"후.. 제길.. 이 바르슈타인님이 이딴 저급한 계약 때문에 움직이게 될 줄이야."
그가 차원을 넘어 이 세계로 소환되는데 간섭했던 혈교의 염원.
빼앗긴 신물을 되찾고 다시 혈겁을 일으켜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것.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것은 원래 그도 그럴 생각이었기에 별 생각 없었고 신물을 되찾는 것도 세상을 뒤엎다 보면 언젠가 얻을 거라 생각해 별 생각 없었지만..
-지끈지끈
그 행방을 직접 알게 된 이상 아예 눈을 돌리고 있으면 곤란했다.
그것이 지금 이 세계에서 그의 존재를 묶어두고 있는 계약의 조건이었으니까.
-까득
남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 계약을 거스를 순 없었다.
결국 이번에는 한발 물러설 수밖에.
"...아무래도 이쪽도 무시할 수는 없겠구나."
"그러면 섬서로 출전하려던 병력을 무를까요?"
"아니, 그 계획은 그대로 진행해라. 오히려 이 정도로 일이 터졌으면 마스터급 이상의 강자들은 그쪽으로 향할 테니 너희들 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그 말씀은?"
왕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그가 바르슈타인을 올려봤을 때 그는 한층 편한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비록 이전 세계에서와 모습은 달라졌지만 그 특유의 미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단 제 3 군단장. 뱀파이어 로드 바르슈타인.
지성이 높을 수 없는 언데드들의 군단의 거의 유일한 지략가이자 그의 지시 아래에 쓰러진 적들의 지휘관 만으로도 묘지를 채울 수 있는 지휘관들의 악몽이었다.
어중간한 책략으로 그에게 덤볐다가 언데드 군단의 일원으로 변모한 인간들만 몇 명이던가.
"신투의 비고라는 곳에는 나 혼자 가도록 하지."
그리고 그는 이번 일이 결코 우연히. 자연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고로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모든 가능성과 변수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법.
20년 동안 발견 된 적 없다는 그 보물 창고가 슬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자신들을 견제해야 할 시기에 우연히 등장했다고?
우연 치고는 참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아마 이 세계의 성녀와 연관이 있겠지.'
그 계집이라면 신물을 지나칠 수 없는 자신의 사정도 충분히 유추 가능할 터.
뻔하지만 지나칠 수 없는 미끼를 사용한 건 충분히 칭찬해줄 만 하다.
아마 그 계집은 자신이 부하들을 이끌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전쟁이래봤자 치고박고 싸우는 게 전부였을 계집이 진짜 전쟁이 뭔지 알겠느냐."
전장에서 전쟁을 위해 태어나 수백 년 동안 살아있는 인간들로 체스를 두며 살아온 게 이 몸이다.
이전 세계의 성녀라면 모를까 겨우 이 미개한 세계의 성녀 따위가 자신에게 승부를 걸어올 줄이야.
아무리 약화됐다고 한들 차원방벽 근처에서 자신이 불러오던 1군단과 2군단을 홀로 막아선 그 무력은 인정하겠지만
전쟁은 힘 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언데드의 무서움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마 애송아.'
언제 어디로 튈 줄 몰라 기껏 짜놓은 전략을 다 무용지물로 만들었던 아직도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는 그 미친년이라면 모를까
아직 한참 애송이인 성녀 따위는 손 안에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 플로라는 어떻게 할까요?"
"나 혼자 간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녀는 원래 작전대로 화산으로 보내라. 전에 말했던 대로 혼자 행동하게 두지 말고."
"그렇다면 분부대로 한 명을 붙여 놓겠습니다."
"원래 직접 옆에서 잠재력을 지켜볼 생각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흥미가 가서 당분간 곁에 두고 지켜보려고 했지만 기대에 못 미친다면 그걸로 끝이다.
장난감은 여유 있을 때나 곁에 두는 거지
진지해야 할 땐 멀리 치워둬야 하는 법이니.
"아 참. 깜빡할뻔 했군. 여성으로 붙여놔라. 남성이면 또 난리를 칠 테니."
마치 다루기 귀찮은 고양이를 기르는 느낌이었다.
* * *
-으스스
"왜 그래요?"
"...갑자기 몸에 오한이 돋아서요."
"요즘 감기가 유행이라곤 하더라고요. 당신도 조심하세요. 가뜩이나 몸도 안 좋으니."
-핥짝
나는 당아영과 함께 시장을 걸으면서 탕후루를 핥짝이고 있었다.
신투의 비고 때문에 중원이 발칵 뒤집히긴 했지만 그건 무림인이나 그쪽 업계에 발 좀 걸치고 있는 상인들 정도나 포함되는 얘기지 일반인들한테는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당장 하루 농사지어서 먹고살기 바쁜 농부들은 그냥 농사나 짓고 있고
많이 먹는 무림인들이 다 바쁘게 짐을 싸서 떠나고 있으니 식당이나 객잔이 조금 아쉬워하고 있다 정도?
"상인들이 다들 그쪽으로 향하면 물가가 오를지도 모르겠는데요."
"뭐 가격이 오르면 그냥 비싸게 사면 되죠."
-핥짝
"...이런 삶 꽤 괜찮을지도."
부잣집 데릴사위는 이런 기분이구나.
중원에 나와서 만난 사람이 당아영이라 정말 다행이라고 또 생각했다.
진짜 당아영을 안 만났으면 지금쯤 뭘 하고 있었을까.
덕분에 점집도 차려서 돈도 벌고 그걸로 여행도 다녔었고 애인이 된 이후엔 숙식에 용돈까지 다 빌붙고 있었으니 당아영이 없었다면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몸이라도 팔고 있었을지도.'
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은 가능성이지만 어쩌면 제일 유력한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어디서 잘못해서 얼굴이 드러나기라도 했으면 상대에 따라서 나를 창관에 팔아넘길지도 몰랐으니까.
천기로 미래를 대비하려고 해도 내 천기는 스스로 읽지 못하니 대비하는 것도 힘들 거다.
-핥짝
'잘생겨진 건 좋긴 한데..'
잘생겼다기보단 귀엽다에 가깝긴 하지만 여자들이 그렇게 환장을 하니까 그냥 잘생겼다고 치고
아무리 좋은 게 좋은거라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한 거 아닌가 싶다.
어떤 방식으로든 맨 얼굴을 보여준 여자랑은 100%로 잠자리를 가졌..
'아 스승님은 빼고.'
큰일 날뻔 했네.
스승님을 빼면 내 맨 얼굴을 본 여자들은 다 나한테 반했고 또 그중 절반이 덮친 전적을 자랑하는데 이 정도면 거의 매혹이다.
그것도 내가 조절이 불가능한.
이러니까 스승님이 얼굴 때문에 화를 불러올 운명이니까 철저히 가리고 다니라고 한 거겠지.
'...그 예언이 천마를 의미하는 거였나.'
다음에 마교에 갔을 때는 또 어떻게 둘러대야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괜히 갔다가 간신히 극복한 ptsd가 다시 재발하는 건 아닐련지.
"..."
"왜 그렇게 보세요?"
"아뇨. 그냥 예쁘다고요."
"당신이 웬일로 칭찬이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취소할게요."
또 나를 놀리려는 당아영한테 고개를 돌리고 어느덧 다 먹어가는 과일을 입에 넣고 씹었다.
"갑자기 그렇게 흥분하게 만들면 확 덮쳐버리는 수가 있어요."
"언제는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당분간 하지 말자고 하더니."
"그건 당분간 자제해야 하니까 당신이 저를 흥분시키지 말라는 의미였는걸요."
"그냥 본인이 좀 참아요?!"
아무리 한창 건강할 때라곤 하지만 무슨 여자가 성욕이 이렇게 많은 건지.
며칠 전에 쌓인 걸 한번 풀어 줬는데도 벌써 이런다.
본인이 최상의 상태로 있어야 하니 당분간 자제하자고 해 놓고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이러는지 원.
"그러면 무리 안 하게 적당히 딱 3번만 어때요."
"3번이 뉘집 개이름인가."
내가 정력이 이상해서 그렇지 보통 남자한테 3번이면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건데.
"그야 당신이 너무 빠르.."
"제가 잘못했으니까 말하지 마요!"
"그러니까 3번만 할까요?"
"..."
뭔가 당아영에게 말려드는 느낌을 받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근데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
"3번만 하고 멈출 수 있으면 하죠."
"..."
"그때 가서 딴말 안 할 자신 있는 거죠?"
"...알았어요. 그냥 참을게요."
내가 당아영에게 하루 이틀 당해보나.
딱 몇 번만 하자고 해서 순순히 몸을 내주면 절대 거기서 끝나는 법이 없었다.
"힝."
어딘가 침울해진 모습으로 걸어가는 당아영을 보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진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이런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