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10장-각자의 사정
"그러면 저희는 다녀올 테니까 안전하게 집 잘 지키고 계세요. 아셨죠?"
여소천과 검후님이 혈교를 상대하기 위해 떠나기 전 당아영과 나는 집 앞에서 그녀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혈교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악화 시키고 된다면 완전히 토벌하는 것까지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다들 진지해질 필요가 있었다.
여소천과 검후님이 각자의 인맥을 이용해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인원들과 작전을 짜놨고 거기서 당아영과 내가 할 일은 없었다.
거기서 경지가 제일 낮은 사람도 초절정 정도는 될텐데 당아영이나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냥 가만히 집에서 지내는 게 도와주는 거다.
괜히 나섰다가 다치거나 인질이라도 잡히면 방해나 될 테니까.
"섬서는 치안도 좋은 편이고 독봉의 집은 무림맹과 꽤 가까이 있으니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도 충분히 대처가 되겠죠. 거기에 독봉 본인의 실력도 만만치 않으니까."
"맡겨주세요! 목숨 걸고 지킬 테니까."
"음음."
여소천이나 검후님같은 규격 외의 강자들 기준에서나 당아영이 할 게 없어지는 거지 객관적으로 보면 당아영도 일반인은 까마득히 초월한 무인이었다.
신투의 비고로 온갖 세력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 한탕 해보려는 송사리들의 위협 정도는 충분히 대처 가능할 정도로.
보통은 남자가 여자를 지켜주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없어진 지 오래였다.
내가 약한 것도 맞긴 하지만 어떻게 내 주변에 이렇게 강한 여자들밖에 없는지 원.
'나도 상점창이 있긴 하지만..'
지금 있는 것들도 기습적으로 사용했을 때 효과를 볼 수 있는 물건이지 내 전투력 자체를 올려줄 만한 물건은 없다.
상점창 목록에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 비싸야지.
몸 자체가 골격이 좋은 것도 아닌데 단전도 망가졌으니 이 몸으로 전투를 기대하는 건 쥐가 고양이와 싸워서 이기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냥 특별히 병 안 걸리고 오래오래 사는 것 정도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 정도.
"아. 맞다. 이거 가져가세요."
속으로 상점창 생각을 하며 내게 있는 물건들을 생각해보다가 건네줘야 할 물건이 생각났다.
-찰랑
"...뭐죠 이건?"
"어디서 구했는지는 말 못하지만 상처가 심할 때 마시면 도움이 될 거에요."
예전에 성녀님한테 받았던 포션이었다.
사실 성녀님은 정력제 목적으로 보낸 거였지만 체력 회복 효과도 거의 엘릭서에 준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성녀님도 지금 마실 생각 없으면 위급할 때 쓰라고 아껴 놓으라고 했으니 여소천에게 건네줘도 별 문제 없으리라.
나나 당아영보단 검후님이나 여소천이 더 위험할 일이 많을 테니까.
[저, 저기 근데 나름 제 정성이 담긴 선물인데 그렇게 다른 여자한테 넘겨버리시면 저도 좀 상처 받는 달까..]
'손에 들고 있는 화보집부터 내려놓고 말해요.'
[크읏!]
여소천이 포션을 유심히 살피더니 미묘한 표정으로 받아들며 말했다.
"뭐, 보나마나 그 하얀 마녀한테서 받은 물건이겠죠. 주기적으로 그 여자랑 통신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효과는 좋을 거에요."
"네. 원리는 이해 못하겠지만 그 세계엔 신비한 물건들이 많다고 들었으니까요. 딱히 마다하진 않을게요. 당장 상대하는 것도 그 세계 출신인 마귀들이니.. 이독제독이라는 말이 있듯이 뭐라도 도움이 되겠죠."
"하하.."
아무래도 여소천은 성녀님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다.
하긴 굳이 따지자면 원래 판타지 세계에 있던 뱀파이어들이 어떻게 이 세계로 넘어와서 깽판을 치고 있는 상황이니 여소천의 성녀님을 향한 감정이 좋긴 힘드리라.
심지어 그걸 못 막으면 이쪽 세상도 멸망한다고 하니까 더 그럴 거고.
"물론 그 여자가 당신한테 해를 끼칠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그 여자를 너무 믿지도 마시고요."
"에이 제가 애도 아니고."
"...그 여자가 당신한테 어떤 식으로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방심하지 마세요. 자고로 잃을 게 없는 인간의 무서움은.."
여소천은 한참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다가 갑자기 무언가에 제지 당하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물더니
"...칫."
그대로 혀를 차면서 등을 돌리고 앞쪽으로 걸어갔다.
뭔진 모르겠지만 괜히 여자들 사이에 끼어서 고생하고 싶진 않았기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검후님쪽을 바라봤다.
"검후님은 뭐 하고 싶으신 말 같은 거 없으세요?"
"나, 나 말인가?"
"위험한데 가는 건데 가기 전에 뭐라도 말하고 가야죠."
"으음..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고민에 잠긴 검후님의 모습을 보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하다가
"...그렇다면 내가 무사히 돌아온 후에.."
"어 잠깐만 스탑."
사망 플래그를 내뱉으려는 검후님을 다급하게 제지한 뒤에야 무사히 배웅을 마칠 수 있었다.
* * *
검후님과 여소천이 떠나고 집안의 분위기가 한층 조용해졌다.
그 둘이 막 그렇게 시끄럽게 지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4명이 살다가 2명이 사니 조용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당아영과 각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뒹굴 거리고 있자 당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집에 둘만 있으니까 옛날 생각 나네요."
"그렇게 옛날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 사이에 일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전 당신이 멀리 갔다 온 사이에 그분들이랑 같이 지냈고요."
하긴 뭐.
나랑 당아영 둘만 지낼 때는 하루를 그냥 밥.잠.섹스 3개로 요약이 가능했었으니 하루하루가 짧게 느껴지긴 했었다.
내가 마교까지 갔다 오는데 걸린 시간이 한달에서 두달 사이쯤 되니까 그동안 여자 3명이 알아서 잘 지냈던 모양이었다.
"아. 그동안 당신 사용 시간도 협의했어요."
"..저는 물건이 아닌데요."
"검후님은 그래도 아직 부끄러우신지 대놓고 주장은 안하셨는데 그래도 싫진 않으셨는지 일주일 중 하루를 받아가셨고 나머지는 저랑 청뢰검님 반반으로."
"그러니까 제 의사는요?!"
"어차피 당신은 상대가 누구든 사실상 침대에 누워있는 거 말곤 하는 거 없잖아요. 당장 지난 일주일은 당신 상태가 안 좋아서 뭘 못했고."
"쿨럭!"
입으로 가상의 피를 토해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말에도 공격판정이 있었다면 치명타가 떴을 게 분명한 일격이었다.
내가 잠자리에서 어떻게 한번이라도 이겨 봐야 이런 취급에서 벗어날 수 있을텐데 꿈에서도 불가능한 내용이니 뭐..
"...햇빛은 보게 해주세요."
"햇빛을 왜 못 봐요. 누가 가둬 놓는 대요?"
"그렇죠..?"
"아무리 못 미덥다고 해도 서방님을 가둬 놓는 부인이 어딨어요. 무서운 소리를 하시네요."
"..."
나도 그런 부인이 세상에 없기를 빌고 싶다.
간신히 좀 괜찮아지려던 천마 ptsd가 다시 올라올 것 같은 이 느낌.
[저희는 그래도 1년에 30분은 햇빛..]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진짜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 아니죠?'
[...당연히 농담이죠! 용사님도 참!]
...생각해보니까 궁금한 게 생겼다.
지금 저쪽 세계에서 남자가 멸종해서 나를 소환해서 종마로 써먹으려는 상황이었는데..
'제가 그쪽 세계 여자를 임신시켜서 낳은 애들 중엔 아들이 나올 수 있어요?'
나름 중요한 문제였다.
어찌 됐든 2분의 1 확률로 남자가 태어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든 복구 자체는 가능할 터.
유전병 같은 게 걱정되긴 하지만 인구의 유지 자체는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하긴 할 거다.
근데 만약 아니라면..
[그, 그게 말이죠.. 아하하..]
'...아닌 모양인가봐요?'
[가, 가능성이에요! 저주를 분석한 결과 그럴 확률이 높다고 판단만 했을 뿐이지.. 어쩌면 기적적으로 태어날 수도 있어요!]
'...'
대충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다.
이제 저 정도면 아포칼립스라는 말도 부족해진다.
전에 반쯤 농담 삼아서 억지로 수명을 늘려서 계속 종마로 써먹는 거 아니냐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 농담처럼 안 느껴진다.
과연 저 상황에서 간신히 수중에 들어온 남자를 쉽게 죽게 내버려둘까.
'...어째 알아가면 갈수록 더 가기 싫어지네요.'
[아으으..]
나였다면 저 정도로 상태가 안 좋으면 감추려고 거짓말이라도 할텐데 저걸 전부 솔직하게 말해주는 걸 보면 사람이 참 순진하긴 하다.
사람이 슬슬 좀 망가져 가서 그렇지.
어차피 말 안 해주면 내가 저쪽의 진짜 사정에 대해선 알 방법이 전혀 없는데도 다 솔직하게 말해준다.
여소천이 믿지 말라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도.
[아. 마, 맞아요! 용사님 간만에 상점창좀 둘러보지 않으실래요? 그동안 포인트가 제법 쌓였는데.]
'뭘 했다고 또 쌓였대요?'
[그쪽 세계의 성녀랑 몇 번 뒹굴었잖아요! 소환까지는 멀었지만 포인트가 꽤 짭짤하게 벌렸다구요!]
성녀님의 말을 듣고 상점창을 열어보자 포인트가 2000포인트 정도 쌓여있었다.
내가 6년 동안 아껴서 겨우 이 망토를 샀던 2000포인트라는 거금이 언제 이렇게 빨리 모였을까.
이 정도 효율이면 정말 마음먹고 여소천이랑만 뒹굴면 금방 포인트를 버는 거 아닐까 싶다.
오랜만에 포인트가 풍족해진 상태로 상점창을 둘러봤지만 특별히 끌리는 물건도 없었고 혹시 모를 돌발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포인트는 아껴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20년 전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신투의 비고가 발견됐다는 소문이 중원에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