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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180화 (180/250)

[180화] 10장-꿈

"...하."

아직 어둑어둑한 창밖의 모습과 새벽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간지럽히는 시각.

나는 몸에서 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망할."

또 그 꿈이었다.

내가 내 딸한테 강간 당한다는 말도 안되는 내용의 꿈.

섬서로 돌아온지 벌써 5일째 인데도 매번 같은 내용의 꿈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용은 조금씩 달랐다.

결국 내가 강간 당한다는 건 똑같았지만 체위라거나 플레이라거나 그런 게 조금씩 달랐..

'생각하지 마 미친놈아..'

-지끈지끈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쌓인 피로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매일같이 꾸는 꿈이 이러니 잠도 제대로 못 잔다.

불면증에 걸리는 사람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잠에 드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잠을 자도 피로가 풀리긴 커녕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니 자연스럽게 잠을 자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고 억지로 자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는 악순환.

그렇다고 사람이 잠을 아예 안 잘 수도 없으니 여러모로 미칠 노릇이다.

원래 잠은 피로를 회복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있는 것일텐데 왜 오히려 두려워진단 말인가.

'...성녀님 잠깐 나와봐요.'

[어.. 효과가 없었나요?]

'어제보단 조금 나은 것 같긴 한데 여전해요.'

[...그래요? 축복이 부족했나..]

혈교와 전면전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

어차피 내가 할 건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컨디션을 깎아먹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해 정신도 말끔히 해야 하고 여소천이나 검후님이 힘들어하면 위로도 해줘야 하니까.

그래서 성녀님한테 도움을 요청했었는데도 별 효과가 없었다.

왜 의원한테 안 갔냐고 해도 이 시대에 정신적인 문제에 까지 조예가 있는 의원이 많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만약 있다고 해도 이유를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가 읽은 천기에서 천마한테 강간당했는데 그 이후로 그 천마의 딸이 저를 강간하는 꿈을 매일 꿔서 잠을 못 자겠어요.'

이런 이유를 말할 수 있을 리가.

실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은데 사유를 제대로 말할 수도 없는 의원을 찾을 바에 마법을 찾는 게 훨씬 낫다.

그래서 성녀님이랑 상담도 해보고 축복도 받고 포인트를 조금 써서 좋은 꿈을 꾸게 만들어준다는 마도구까지 받아와 봤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

'더 효과 좋은 마도구는 없어요?'

[꿈과 관련된 건 저희도 전쟁 도중에 많이 소모해서 재고가 거의 없어요. 밴시 계열 몬스터들은 악몽을 통해서 정신을 침식 시키니까 거의 모든 병사들한테 필수로 배분했거든요. 저도 지금 창고를 뒤져보고 있는데 용사님한테 도움이 될만한 건 잘 안보이네요..]

'성녀님이 쓰던 건 없어요?'

[저는 제가 직접 신성력으로 극복했거든요. 벤시의 공격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꿨던 악몽은 그땐 용사님이 있었으니까 이겨낼 수 있었.. 아 이건 어떠세요?]

'뭔데요.'

[서큐버스 퀸의 드림 익스프레ㅅ..]

'내려놔요.'

[힝.]

아무리 서큐버스가 몽마라곤 하지만 딱 봐도 내가 원하는 효능의 물건은 아닐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설명 정도는 들어 보..

[서큐버스 퀸의 영혼 조각이 담겨있어서 사용하는 사람에게 살면서 한번도 겪어본적 없을 황홀한 꿈을 100% 보장한다는데요?]

응. 필요없겠네.

사태를 악화시키면 악화시켰지 도움이 될 확률은 0%다.

적어도 꿈에서 만은 좀 쉬게 해줬으면 싶은 바램이다.

[그러면 일단 다른 것 좀 뒤져보고 있을 테니까 좀만 기다려주세요. 잠에 들기 싫으시면 잠깐 새벽 공기 좀 쐬는 것도 좋고요.]

'...그럴까요.'

당아영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얼굴을 감싸던 포근한 감각이 사라진 건 좀 아쉬웠지만 이건 뭐 어쩔 수 없으니까.

평상시엔 붕대로 감싸고 다니는 탓에 평상시에 보이는 크기보다 더욱 커 보이는 가슴에서 눈을 돌리고 조심스럽게 뒤뜰로 나갔다.

슬슬 겨울인지 잠옷으로는 살짝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피부를 휩쓸어 손으로 팔을 문지르고 있자 뒤뜰에 있던 선객이 눈에 들어왔다.

-사락

검이 하늘을 수놓는다.

무공에 대해선 완전한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휘두름 한번 한번에 많은 깨달음이 담겨져 있다는 게 느껴지는 검무의 향연.

무인이라면 보는 것 만으로도 평생 한번 얻기도 어려운 소중한 기연이라고 해도 좋을 장면이었지만 나에겐 눈을 떼기 예쁜 장면 정도였다.

그 뒤로도 몇 분 정도 화려한 검무가 이어졌고

-촤악!

은은하게 느껴지는 매화향을 마지막으로 검무의 주인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짝짝짝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자 검후님이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인사하지 못해서 미안하군. 도중에 대화를 하면 흐름이 끊겨서 말이야."

"아뇨 괜찮아요. 멋졌어요."

"보기 좋았다면 다행이네."

내게 다가오는 검후님에게 주변 탁자에 올려져 있던 수건을 건네자 웃으며 손을 저으셨다.

"간단하게 몸만 풀던 참이라서 말이야. 땀이 나진 않았네."

"어느 정도 되셨는데요?"

"이제 반 시진 정도 된 것 같군. 별로 오래되지도 않았지."

'그러면 1시간인데.'

아무래도 무인의 시간 감각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아무튼.

"잠은 안 주무세요? 곧 싸우러 나가시잖아요."

달의 위치를 보면 이제 한 새벽 3~4시 쯤 된 것 같아 의문이 들었다.

"잠이야 운기조식으로 대체할 수 있네. 아무리 평화로운 세월이었다고 해도 검에 녹이 슬게 두진 않았다고 믿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나. 감각을 세워둘 필요는 있겠지."

"여소천은 명상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던데."

"나는 직접 몸을 움직이는 쪽을 선호해서 말일세."

아 그렇구나.

본인이 그렇다는데 내가 뭐 더 궁금해 할 건 없었다.

솔직히 내가 무인들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는 그대는 오늘도 잠이 잘 안 왔나? 요즘 잠을 잘 못 잔다고 들은 것 같은데."

"...뭐. 그렇게 됐네요."

"우리라면 모를까 그대는 일반인이지 않나. 힘들더라도 억지로 잠을 청해야 기가 상하지 않네. 잠이라는 건 생각보다 몸과 정신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지구에서 잠의 중요성에 대해선 질리도록 들은지 오래다.

불면증은 그 자체보다 그 때문에 발병할 각종 정신적 문제들이 더 무섭다는 것도.

아마 검후님 기준에선 그게 기가 상한다고 표현한 거겠지.

이 섹스밖에 모르는 몸뚱이를 생각하면 다른 건 다 걸려도 발기부전만큼은 안 걸릴 것 같지만 어찌 됐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마 이쯤에서 성녀님이 한가했으면 [저희 세계로 와주시면 영원히 재워드릴 수도 있어요! 불면증 걱정 제로!] 라고 말했을 것 같은데 다행히 지금은 바쁘신 모양이었다.

[대체 용사님은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저렇게 안 할 거에요?'

[차라리 부작용을 감수하고 마법으로 용사님 정신을 직접 주물러서 치료를 했으면 했지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으로 만들 생각은 없어요!]

뭐야 저게 더 무서워.

뭘 주무른다는 건데.

그런 걸 마음대로 주무르지 말라고.

그리고 부작용을 왜 성녀님이 감수해요 제 몸인데.

[언제부터 용사님에게 선택권이 있었죠?]

'적어도 지금은 저한테 있네요.'

[아 뿔 싸 !]

넘어간 뒤라면 모를까 넘어가기 전이라면 주도권은 나한테 있다.

그리고 저 글러먹은 성격을 생각하면 주도권을 넘겨주는 순간 내 인생은 끝났다고 보면 되고.

'찾던 거나 마저 찾으러 가요!'

[힝.]

말로 성녀님을 걷어차 다시 창고로 보낸 뒤 이쪽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검후님을 향해 멋쩍게 웃었다.

지금은 상태가 영 안 좋아서 멀티태스킹이 딸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못 들었다.

"죄송해요 잠깐 딴생각 하느라.. 혹시 뭐라고 말씀하셨었어요?"

"아니 그.. 혹시 꾼다는 악몽의 내용이 화산.."

"네?"

"...아닐세. 괜한 말이었으니 잊어주게."

"...?"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던 건진 모르겠지만 별일 아니라면 된 것 같다.

"...아."

그러다가 검후님이 무언가 깨달은듯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악몽이 문제라면 스승님 생각이라도 해보는 건 어떤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말을 하셨다.

"...네?"

"예전에 제자를 키울 당시 제자가 악몽을 꿔 달래주었던 기억이 있었네. 그대도 어릴 적부터 스승과 지냈다고 하던데 아마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 같아서 해본 말이네."

"스승님.."

이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방법이다.

뭔가 다 크고 나서 부모님을 찾는 느낌이라 부끄럽기도 하지만 사실 이럴 때 의지할 사람이 부모님 말고 더 있을까.

미우나 고우나 사실상 부모님 같은 분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고.

"사실 제일 좋은 건 직접 찾아뵙는 거지만 스승님이 폐관수련 중이라고 하셨으니 그런 이유로 찾아뵙긴 어렵겠지.."

"아하하.. 어쩔 수 없죠."

참고로 검후님한테는 당아영과 달리 내가 멋대로 뛰쳐나온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뭐..

'엄청 혼날 것 같아서..'

고지식한 성격이신데 직접 제자까지 키우셨던 분이니 당아영과 사정이 달랐다.

아무튼 덕분에 도움이 됐다.

"한번 말씀하신대로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래. 어릴 때는 푹 자둬야 제대로 크는 법이네."

"...성장기는 끝난지 오랜데요?"

"...이런. 나도 모르게."

나는 뚱한 표정으로 검후님을 쳐다보다가 당아영의 방이 아니라 내 방으로 향했다.

기왕 옛날 생각을 할 거라면 혼자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괜히 침대에 파고들었다가 당아영이 깨면 미안하기도 하고.

-풀썩

접혀있던 이불을 피고 잠들 수 있도록 침대에서 자세를 잡았다.

'스승님..'

지금쯤이면 산에서 나오셨을려나.

말하신 기간을 생각하면 나오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아마 지금쯤 눈에 불을 켜고 중원을 돌아다니면서 나를 찾고 있지 않을까.

'...현실에선 조금 있다가 찾아뵐게요.'

불초 제자가 밖에 나와서 벌려 놓은 일이 좀 많아서요.

하필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 시간을 내기가 힘드네요.

근데 제가 산에서 안 나왔어도 일어났을 일이니까 그건 좀 정상참작 해주세요.

-스륵

스승님이 아끼시던 구슬을 꺼내 눈앞에 가져다 대고 바라보며 한참 스승님 생각을 했다.

항상 성격이 괴팍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참 고마운 사람이다.

허구한날 부려먹던 것도 반쯤 장난기 섞인 부림이었던 데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노동을 시켰던 적은 없다.

정작 정말 위험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그냥 본인이 직접 하기도 했고 내가 예상치 못하게 병에 들어 쓰러지면 죽도 끓여주고 산을 쥐 잡듯이 뒤져서 약초를 찾아오던 사람이었으니

-피식

이러니까 옛날에 반했었지.

정작 그쪽에서 이쪽을 전혀 남자로 볼 것 같지가 않아서 고이 접어뒀지만.

그래도 요리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솔직히 아프기도 했고 정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었지만 죽도 진짜 못 끓..

...Zzz...

.

.

.

다행히 잠에 무사히 들었고 정말 스승님 생각을 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며칠 동안 나를 괴롭히던 그 꿈과는 완전히 다른 꿈을 꾸었다.

그게 일어나지도 않은 한참 먼 미래의 꿈이었다면 이번 건 과거에 있었던 추억의 꿈.

자기 전 스승님 생각을 해서 그런지 스승님과 지내던 시절에 대한 꿈이었다.

근데 그거까진 알겠는데..

-찰박

-쪼르르륵

그.. 왜..

"물 온도는 버틸만 하느냐. 미지근한 것 같아 좀 올릴 생각이거늘."

"예..에.."

왜 꿈을 꿔도 하필..

...같이 목욕할 때의 꿈인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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