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10장-각인
[나, 난 네 아빠야..!]
[아빠면 자식한테 사랑을 나눠주는 건 당연한 거잖아. 밀린 거 몰아서 준다고 쳐.]
[ㄴ, 놔! 이거 놔! 놓으라고!!]
[아빠 그러다 팔 빠져. 묶여있는데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이면 위험하다니까. 나이도 있는데 다치면 안되지.]
[옷 벗지 마! 뭐 하는 건데! 아빠한테 뭘 원하는 건데!!]
[큰 걸 바라는 건 아니고.. 동생 하나만 만들어줘.]
[그, 그런 거면 네 엄마 돌아오면 얘기해 볼 테니까.. 제발.. 제발 옷 좀 입..]
-찌걱!
[이, 이 미친년아아악..!!!]
[아빠. 딸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아, 아직 안 늦었으니까.. 지금이라도 빼면..]
.
.
.
-벌떡!
"허억..! 허억..!"
몸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침대와 이불의 감촉.
허둥대는 손으로 아무렇게나 이불을 껴안은 뒤 주변을 살피자 어둑어둑하지만 익숙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당아영의 방이었다.
내 방보다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사실상 실질적인 내 방.
-벌컥!
"무슨 일이에요?! 다리에 쥐라도.."
내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당아영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급하게 당아영을 끌어안았다.
-와락!
"엇."
"허억.. 허억.."
위치 상 딱 내가 머리를 당아영의 젖무덤에 파묻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이미 당아영과 나는 그 정도는 거리낌 없는 사이였고
당장 나도 정신이 없는 마당이었기에 눈에 보이는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끌어안은 것 뿐이었다.
-토닥 토닥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기에 들려오는 심장 박동 소리와 말없이 내 등을 토닥이는 당아영의 손길.
그 감촉에 몸에 남아있던 끈적하고 끔찍했던 꿈의 잔재가 점점 현실의 공기에 희석되어갔고
그 상태로 시간이 10분 정도 지났을까
"..."
"진정됐어요?"
"...네."
나는 간신히 당아영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몸은 다행히 당아영의 허리에 올렸던 손을 포함해 온몸이 덜덜 떨리던 방금 전에 비하면 한참 진정된 상태였다.
-토닥 토닥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왜 그래요. 악몽이라도 꿨어요?"
"...악몽.."
그 말에 저절로 방금 전까지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고 다시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해 결국 또 당아영에게 몸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휴 뭔진 몰라도 엄청 지독했나 보네요. 어디 안 갈 테니까 진정해요."
-쓰담쓰담
"후우.. 후우.."
아무리 현실에서 온갖 짓을 다 당해본 나였지만 이번 꿈의 내용은 그냥 흘려 넘길 수 없는 내용이었다.
천마한테 강제로 감금당해 지낸 것도 모자라 그동안 낳은 딸한테 강간 당하는 내 모습은..
"우웃.."
"자 착하지.. 진정해요 진정해.."
자칫 잘못하면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의 꿈이었다.
겨우 꿈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기냐고 해도 이상하게 꿈 답지 않게 생생했던 것도 문제였지만 그 내용이 더 큰 문제였다.
'내 딸..'
다른 사람.
차라리 얼굴도 모르는 처음 본 여자한테 강간당하는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낳은 딸?
내가. 내 유전자로. 내 정자로 임신 시켜서 그 여자가 낳은 딸한테 내가 강간 당한다고?
도저히 상상할 수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이 저주받을 몸뚱이는 여자는 여자라고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저항 한번 못하고 발기했었으니..
'안돼.'
다른 건 다 참아도 그것 만은 안된다.
차라리 성녀님 세계로 넘어가서 종마로 살면 살았지 내 딸한테 내가 겁탈 당하는 말로 해도 끔찍한 일 만은 절대로..
.
.
.
"이제 진짜로 좀 진정 됐어요?"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러고 있어요. 계속 껴안아도 되니까."
"..."
"어차피 밤도 늦었으니까 그냥 눕죠. 혹시 잠이 안 오면 밤새 말동무라도 해드릴게요."
당아영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살짝 들어 움직이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한참 껴안고 있었던 탓에 불편한 자세를 꽤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어야 했을텐데 쓴소리 하나 없었다.
"자장가라도 불러드릴까요?"
"...푸흡."
"아. 웃었다."
"...지금 기분 울적하니까 웃기려고 하지 마요.."
"딱히 웃기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예상치 못한 드립 때문에 분위기가 깨졌다.
기왕 이렇게 분위기가 잡힌 거 진지하게 고민 좀 해보려고 했었는데..
"아이씨.."
"계속 생각나요?"
"안 어울리게 자장가는 무슨 자장가에요.."
엄마도 아니고 하다못해 누나도 아닌 동갑인 주제에 무슨 자장가란 말인가.
전생 나이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한참은 연상일텐데.
"좀 서방님답게 대우해주면 안돼요?"
"서방님답게 어떻게 대우해드릴까요?"
"...일단 애처럼 취급하는 것부터 어떻게 좀.."
"흐응.."
당아영이 낮게 콧소리를 내며 나를 좀 더 끌어안았다.
"무서운 꿈 좀 꿨다고 일어나자마자 부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서방님을 어떻게 어른처럼 취급해줘야 할까요?"
"...무서운 꿈이 아니라."
"그리고 꿈 아니어도 평소에도 어리광 엄청 부리잖아요.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애교 부리는 주제에."
"그건 소저가 시켜서 그런 거고요..!"
"그러면 오늘은 서방님답게 주도적으로 해보실래요? 저는 수줍은 새색시처럼 가만히 있을 테니까."
"...그냥 내가 말을 말지."
이미 내가 주도적으로 해보려고 몇 번은 시도 했었다.
그때마다 결국 어떤 꼴이 됐는지 알면서도 저런 말을..
"..놀리지 마요."
"왜요. 연습하면 언젠가 될 수도 있잖아요?"
"세상엔 연습만으로 안되는 게 있어요.."
아무리 경험이 쌓여도 참을성이 늘어나긴 커녕 오히려 몸이 더 민감해지고 있는데 잘도 되겠다.
세상에 여자가 가만히 있어도 허리도 제대로 못 흔드는 남자가 어디있단 말인가.
검후님이 거의 숫처녀였을 때도 그렇게 처참하게 패배했는데 그 이후는 뭐 말할 것도 없다.
검후님의 테크닉이 늘면 늘었지 설마 줄어들까.
무인들이라 몸 쓰는 거 하나는 굉장히 빠르게 배울텐데 그 속도를 내가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차피 나는 제자리걸음이니 따라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근데 잠깐만.
"왜 은근슬쩍 서방님이라고 불러요."
"서방님 취급 해달라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뭐에요. 생각하고 한 거 아니었어요?"
...내가 내 입으로 서방님이라고 말했다고?
"..."
"그래서 식은 언제 올리죠? 당신 스승님한테도 인사 해야 하는데."
"...여소천이 말한 거 끝난 다음에 준비해 볼게요."
"지금 스승님이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 거 아니었어요?"
"...그래도 찾으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에요."
당아영한텐 스승님에 관한 건은 대부분 말했다.
스승님이 폐관수련에 들어간 사이에 내가 그냥 말도 없이 혼자서 튀어나온 상황이라 아마 스승님이 내가 사라진 걸 안 뒤에는 바로 산에서 뛰쳐나오실 것 같다고.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내가 산에서 나오기 전에 어디로 갈 거라고 얘기도 안 해 놨다는 거였다.
쪽지를 남겨두긴 했지만 그건 그냥 미사여구 생략하고 간단하게 요약하면 '심심해서 놀러갈게요' 정도의 내용밖에 없다.
애초에 산속에서만 지낸 탓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나오기 전에 어디로 갈 거라고 어떻게 남겨 놓는단 말인가.
스승님의 성격을 생각하면 바로 내 머리끄댕이를 잡으러 산에서 쫓아 나오실 것까진 확신할 수 있지만 내가 있는 곳으로 바로 찾아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스승님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를 테니 여기저기 헤매고 다닐 가능성이 높고
나도 스승님이 어디 있는지 모를 테니 찾아다닐 수도 없다.
그래도 찾으려고 한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개방에 금발에 엄청 예쁜 여자의 목격담을 의뢰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에요."
바로 그 눈에 띄는 외모 때문이었다.
"...사람 머리가 금색일 수가 있나요?"
"여소천은 파란색인데요."
"...아하."
죄다 검은색 투성이인 이 중원에서 금발로 돌아다니면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사실 금발보단 그 압도적인 외모가 더 눈에 띄긴 하지만 그건 됐고
"그리고 중원엔 없는데 서역에 가면 많아요. 중원에선 색목인이라고 불릴텐데."
"스승님이 색목인이었어요?!"
"중원 토박이요."
"방금은 색목인이라면서요?!"
"색목인은 금발이라고했지 제 스승님이 색목인이라고 한 적은 없어요."
나도 처음 봤을 땐 서양 사람 인줄 알았다.
머리색도 금발이고 몸매가 아무리 봐도 동양인 몸매가 아니라서 최소한 혼혈이라고 생각했는데 중원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다나 뭐라나.
"그건 그렇고. 이제 진정된 거 같아서 말하는 건데 당신 돌아와서 아직 인사도 안 했던 거 알아요?"
"...그랬어요?"
"네. 청뢰검님이 데리고 돌아오긴 했는데 깊이 잠든 것처럼 깨어날 기미가 안보이길래 침대로 옮겨놨던 거에요.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도 못하고. 기껏 일어났나 했더니 상태도 안 좋아 보이고."
당아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볼을 부풀렸다.
그러고 보니 여소천에게 돌아가기 위해 기절 당한 다음에 그런 꿈을 꿨던 거였지.
'아니 근데 진짜 꿈 맞나?'
꿈이라기엔 정신이 너무 선명했는데.
자각몽이라고 해도 정작 그 안에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하나 없었고.
처음으로 질내사정 한 순간부턴 다리에 힘이 풀려서 똑바로 서있지도 못했었다.
묶여있던 나도 한 3번째까지는 격렬하게 저항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그냥 축 늘어져서 아무 말도 없이..
"..."
-포옥
"응?"
"...잠깐만 더 이러고 있을게요."
"엄청 무서운 악몽이었나 보네요. 하여간 애라니까."
-토닥 토닥
그냥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괜히 생각날 것 같으면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니까 오늘 꾼 꿈은 내 기억 속에 없는 거다.
그냥 없던 기억이라고 생각하면 언젠가 희미해져서 사라지겠지.
"...소저."
"네?"
"자식은 아들만 낳죠."
"...그게 원하는 대로 되는거던가요?"
"...기도하면 어떻게든 해줄 거에요. 아마도."
그리고 만약 아들을 낳더라도 나는 안 닮았으면 좋겠다.
이런 아빠 닮아서 좋을 거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