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10장-무의식
"..."
그 이후로도 대화가 조금 더 이어졌지만 하나도 머리에 제대로 들어오는 게 없었기에 여소천을 적당히 내보내고 혼자 침대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여소천의 말에 따르면 내가 그녀의 천기에 운명의 상대로서 나타났다는 건 천마에게 있어서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즉 '천마가 원하는 미래' 라는 게 된다.
천마에게 있어서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룰 수 있는 것이고 그녀에게 있어서 미래라는 건 그저 언젠가 다가올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듬을 수 있는 것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녀와 결혼하고 지하실에 감금 당한 뒤에 십 수년을 강간 당하면서 지내는 것도 전부 천마가 상상한 미래라는 게 된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인간의 상상력이 미래의 모든 것을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진 않으니 천기가 자동적으로 빈 부분을 메꾼 것도 있긴 있겠지만 결국 기본 베이스가 그녀의 상상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결국 이 말이 의미하는 건..
"이미 늦었다..."
천기를 읽기 전 시점부터 이미 나는 그녀의 손 위에 올라가 있었다 라는 게 된다.
그래야 그런 상상이 내게 천기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그..
'미친 강간마새끼..'
-벅벅
대체 성격이 어떻게 되어 먹었으면 처음 만난 사람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아무리 상상은 자유라지만 저건 좀 도가 지나친 거 아닌가?
첫눈에 반했다는 거 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그걸 바로 지하에 감금하고 애를 넷..
-덜덜덜덜
지구에서 인터넷을 하다가 자신을 가지고 이상한 짓을 하는 글을 본 아이돌들의 심정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우연히 심연을 봤을 때보다 몸이 더 떨려온다.
어떻게 그 외형으로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지?
밖에 재대로 나가지도 않고 친구 같은 것도 없이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서 시간만 때우는 인생이라도 산 게 아니..
'맞네?!'
외모만 멀쩡하다 못해 눈이 부실 뿐이지 행동은 히키코모리 그 자체였다.
같이 술을 마시면서 얘기했던 것 중에 햇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고 내가 사실상 첫 친구라는 뉘앙스로 얘기했던 것도 있었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쩐지 이해가 갔다.
연애 해본 적 없는 사람이 그린 라이트 조금 선 거 가지고 혼자 급발진 해서 결혼은 물론이고 자식 이름까지 생각하는 그런 경우.
이렇게 이해하면 납득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툭툭
"성녀님 나와봐요."
'사장 나오라 그래.'
우선 그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현재 페이지를 점검 중입니다. 나중에 다시 문의해주세요.]
"이것도 성녀님이 띄우는 거잖아요. 빨리 나와봐요."
[아..하하.. 그..게 말이죠.]
내 재촉에 성녀님이 멋쩍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말하는 듯한 순진한 표정.
"판 물건에 하자가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에요."
고작 그 정도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천마가 연애 경험이 없는 처녀였을 거라고 가정을 해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첫눈에 반해서 저를 감금 시키고 싶다고 까지 생각할 거 같지는 않거든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원래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저는 이 망토가 제 기능을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성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괜히 말을 돌리려는 성녀님에게 단도입적으로 물었다.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는 정면 공격.
-삐질삐질
성녀님은 그 모습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돌리더니
[...죄송합니다!]
모 모바일 게임 광고처럼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말로만 죄송하다면 다에요?! A/S나 교환/환불 같은 거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아니 그치만 이건 저도 억울한 게 있다구요! 아무리 신비가 깃든 아티팩트라도 당연히 그 한계가 있어요?! 식칼로 바위를 내려치면 당연히 부서지지 않겠어요?!]
"그래도 팔 때는 그런 말 없었잖아요!"
[저도 그 세계에 그 정도나 되는 괴물이 있을 줄은 몰랐죠! 있다고 해도 용사님은 산 속에서만 지냈고! 애초에 용사님이 그걸 사셨을 땐 채널이 없어서 이렇게 대화도 못했어요!]
...생각해보니 그러네?
애초에 샀을 땐 말을 못했구나?
"...아무튼 뚫렸는데 뭐라도 해줘요. 이거 비싼 거잖아요. 무려 6년이나 걸려서 산 물건인데."
[제가 팔고 있긴 하지만 제가 만든 게 아니라서요.. 용사님도 둘러보면서 알고 계시겠지만 1000 포인트 이상의 물건은 창고에 있는 영웅분들의 유품이 대부분이고요.]
"...음."
[그리고 말이 상점이지 용사님이 지불하시는 포인트는 원래 그런 아티팩트가 없는 세계에 차원방벽을 뚫고 아티팩트를 전송하기 위해 필요한 간섭력이에요. 엄밀히 따지면 물건 값이 아니라 배송비라구요. 다 용사님이 어떻게든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에 있는 살림 없는 살림 다 용사님한테 물건 값도 안 받고 다 바치고 있는 중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해요?]
".......음.."
[그리고 A/S든 교환/환불이든 제가 그 세계에 간섭하려면 크든 작든 간섭력이 소모돼요. 저희가 수급하는 모든 간섭력은 용사님의 포인트로 돌리고 있으니 결국 뭘 하려면 포인트를 소모해야 한다는 거구요.]
...워낙 장사꾼같은 면모를 자주 보여서 그렇지 다 예전부터 설명했던 내용이었다.
간섭력의 제한만 없었으면 성검이고 뭐고 다 갖다 주겠다던 입장이었으니 뭐..
"...생각해보니 제가 좀 너무했네요. 죄송.."
[대신 이미 연결된 채널은 큰 간섭력 소비 없이 유지할 수 있으니까 용사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스트립쇼라도..]
"필요 없어!!!"
이 글러먹은 성녀가!
[왜요?! 사양하실 필요 없어요?! 이미 용사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바칠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겨우 맨몸을 보여주는 것 정도는..]
나랑 신체 접촉을 할 수단이 없으니까 사람이 점점 미쳐가는구나.
직접 만지질 못하니까 노출증이라도 개발할 생각인가.
아니 아무리 내가 건강한 성인 남성에 성녀님이 성격은 둘째 쳐도 외모는 다른 여자들한테 전혀 꿇리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저건 의도가 너무 불순하다.
이제 솔직히 좀 무섭다 이 여자.
처음 만났을 땐 그래도 꽤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실시간으로 광기에 물드는 게 보이니까 더 무섭다.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성녀님이 원하는 대로 저쪽 세계로 갈 생각이 없다는 걸 안 뒤로 좀 더 노골적으로 변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 제가 완전히 타락하기 전에 좀 도와주면 서로서로 좋잖아요..!]
'와 이 사람 이제 진짜 성녀도 아니야.'
[안타깝네요. 전쟁 동안 저를 제외한 조금이라도 성녀적성이 있는 분들은 전부 땅의 품속으로 돌아가셨거든요. 저를 제외하면 성녀를 할 수 있는 사람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씀.]
'...워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공격이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저쪽 세계의 암울한 상황만 전해 듣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 필사의 도움 요청을 나몰라라하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제가 타락하기 전에 적당한 선에선 양보를 좀 부탁 드릴게요. 만약 제가 타락해버리면..]
'...타락해버리면?'
[...매일 아침 자고 일어날 때마다 눈앞에 귀신 사진을 띄워버릴거에요!]
.........................
그래.. 응...
그래도 사람은 참 착해...
...저건 좀 참아줬으면 좋겠지만.
* * *
결국 성녀님을 진정 시키기 위해 또 한번 화보를 찍어줬다.
찍을 때마다 점점 요구하는 수위가 올라가는 게 느껴지는데 과연 언제까지 이걸로 버틸 수 있을까.
나중엔 정말 스트립쇼라도 쳐줘야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여소천에게 가 섬서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돌아갈 준비라고 해도 내가 할 건 별거 없었다.
그냥 이불에 돌돌 싸여서 여소천의 품속에서 기절한 채로 잠깐 눈만 감았다 뜨면 내가 할 일은 끝.
고생은 경공을 펼쳐서 곤륜부터 섬서까지라는 방대한 거리를 하루 만에 건너뛰는 여소천이 다한다.
"자 그러면.. 기절 시킬게요?"
여소천이 섬서에서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 머리에 손을 대고 전류를 흘려보냈다.
아마 그때처럼 눈만 감았다 뜨면 섬서에 도착해있을 거라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
섬서에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내 주변을 비춘 풍경은 삭막하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마치 내가 천기 속에서 봤던 지하실처럼.
'...꿈인가?'
꿈인 것 치고는 이상하게 정신이 선명했지만 아무래도 꿈일 확률이 높았다.
현실이라기엔 내가 눈을 감기 전 상황과 전혀 이어질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내 생각이 맞다고 대답해주기라도 하듯이 주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아."
"...혼자 먹을 수 있어."
"안돼. 엄마가 꼭 다 떠서 먹이랬어. 자, 아~."
"쯧."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미래의 나와 여성 한 명이 있었다.
천마라고 하기엔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외형에 어딘가 천마와 내가 섞인 듯한 모습을 한 여자.
앞선 대화의 내용을 통해 그 정체를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딸이구나.'
아마 내가 읽었던 천기보다 더 시간이 지난 시점인 것 같았다.
그곳에 있던 두 명의 딸 모두 저것보다 한참 어렸었으니까.
'...인상이 참 강렬하긴 했나 보네.'
꿈에 나올까 두렵긴 했지만 설마 이런 형태로 나올 줄이야.
그래도 이런 형태라면 특별히 위험할 것도 없으니 안심이었다.
그냥 평범한 딸과 아버지의 대화 아닌가.
비록 난 여전히 사슬에 묶인 상태로 딸이 주는 밥을 입을 벌려 먹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천마한테 강간 당하는 꿈보단 훨씬 나았다.
그나저나 여기서도 나는 하나도 안 늙었다.
머리가 조금 희게 물들긴 했는데 키도 하나도 안 자랐고 얼굴도 지금 거의 그대로다.
감금 당하면서 지내서 그런지 인상이 좀 사나워 보이긴 했는데 원래 내 얼굴 자체가 순하게 생긴 편이라..
솔직히 말하면 쬐끄만 강아지가 성질 부리는 수준의 느낌이었다.
...아. 저거 나였지.
아무튼 한참 동안 말없이 뚱한 표정으로 밥을 받아먹던 나는 말할 게 생겼는지 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가 넷째던가?"
"아빠는 자식 순서도 몰라?"
"그 여자가 보여준 적이 있어야 알지. 그래도 셋째까지는 아기땐 봤는데 너는 한번도 못 봤어."
"나도 아빠를 실제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니까 할 말은 없네."
...숨막혀!
말만 부녀지 실제로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란다.
성인 정도로 보이는 딸의 나이를 생각하면 시간의 장벽이 상당히 두꺼웠다.
"...그 여자가 괴롭히진 않고?"
"응? 엄마? 화나면 좀 무섭긴 하지만 좋은 엄마라고 생각하는데."
"밥은."
"하루 세끼 제대로 챙겨줘."
"수련은."
"일주일에 한번씩 봐줘."
"때리진 않고."
"아빠. 엄마한테 맞으면 보통 사람은 죽어."
"...잘 키우나 보네."
천마가 자식은 제대로 키우는 모양이다.
이건 그래봤자 천기가 아니라 내 꿈에 불과해서 진짜로 그랬을진 모르지만.
"아빠. 아빠는 우릴 왜 낳았어?"
"낳고 싶어서 낳은 것도 아니야. 그 여자가 멋대로 낳은 거지."
"임신은 부부 상호간의 동의가 필요한 거 아니었어?"
"필요 없더라고."
그러고 보니 내가 다른 사람한테 아예 반말로 얘기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신기했다.
아마 딸이라서 그런 거겠지.
"그렇구나.. 음.."
"밥 다 먹였으면 술 좀 한 병 가져와봐. 저기 선반 열면 많을 거야."
"엄마가 술은 주지 말라던데."
"...한 병만 몰래 갖다 줘. 걸리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도 엄마한테 혼나는 건 무서운데.. 그러면 부탁 하나 들어주라."
"...뭔데."
성인이 되고 나서야 처음 만난 막내 딸의 부탁.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빠 다리 좀 벌려봐."
..................
""응?""
서있는 나와 묶여있는 나의 반응은 완전히 일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