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177화 (177/250)

[177화] 10장-첫인상

"이, 일단 아침 사왔어요...."

"또 소면이면 들어올 생각 하지 마세요."

"...우육면이요."

"...일단 들어오세요."

또 면이지만 소면보단 낫다.

그래도 일반적인 객잔에서 우육면 정도면 상당히 비싼 요리니 저번에 소면을 가져왔던 걸 생각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고기도 든든하게 들어있으니 몸에 힘이 없는 지금 상황에 먹기 딱 좋은 요리이기도 하고.

-우물우물

"어, 어때요? 맛있어요?"

"...먹을 만 하네요."

"그, 그러면 다행이고요."

여소천은 예전이 생각나는 모양인지 아까부터 꽤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사실 나도 그렇게 화나진 않았다.

그동안 여소천이랑 조금 친해진 것도 있고 사실 이번엔 내가 먼저 유혹한 것도 있고..

이제 섹스하다가 기절 당하는 건 거의 일상이라 점점 무게감이 옅어지는 것도 있었다.

기분이 조금 뚱한 정도지 저렇게 눈치를 볼 정도까진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편하니까 그냥 삐진 척 해야지.'

기왕 부려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그냥 계속 삐진 척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덕분일까

"...자. 고기 좀 더 드세요. 전 도사라서.."

"와아."

여소천 몫의 고기를 얻어낼 수 있었다.

큰 수확을 뒤로 하고 이후엔 풀린 표정으로 식사를 하면서 잡담을 나눴다.

검후님은 간단하게 짐을 가져와 현재 당아영의 집에서 방 하나를 받아 지내는 중이라고 하고

당아영은 그 사이에 본가에 한번 갔다 왔다가 집에서 하루 종일 짜증을 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결혼 재촉을 들은 거 같다고..

"아니 그 나이에 재촉을 받아요?"

"이상할 나이는 아닌데요? 집안이 웬만큼 잘 사는 게 아니면 양민들은 보통 16세 전후로 혼인해요. 무인이면 임신은 수련에 치명적이니까 사정이 조금 다르다곤 하지만 나이 자체는 재촉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긴 하죠. 세가는 보통 세력을 늘리는 방식이 혼인이니 더 그런 편이고요."

"그러면 당신도.."

"...도사가 혼인을 권유 받겠어요?"

"...아."

생각해보니 검후님이나 여소천 둘 다 도사였다.

당아영만 경우가 조금 다른 편이고.

"뭐 도사가 아니었더라도 젊었을 때부터 이미 장로보다 더한 대우를 받았으니까 감히 저한테 그런 걸 권유할 사람도 없었을 거고.. 아무리 나이가 성인이라도 이런 외형에 권유하긴 더 힘들었겠죠."

"음.."

"저도 당장 2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제가 이렇게 될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나 원 참. 어쩌다가 이런 남자한테 홀려서.."

여소천은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내 볼을 꼬집었다.

쌀쌀한 말투와 다르게 묘하게 애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살짝 볼을 부풀릴 뿐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근데 저번에 당아영 아버지는 만나 뵀었는데.."

"당신 때문에 독봉 성격이 망가진 걸 보고 최대한 빨리 떠넘겨야겠다 싶은 거겠죠 뭐."

"...그런 말을 하긴 했었네요."

계속 미루고 미루고 있던 혼인 문제.

1차적인 변명이 스승님이었다면 그 다음 변명은 흡혈귀들이었다.

숨어서 세계를 갉아먹으며 이 세계의 멸망을 노리고 있는 다른 세계에서 온 흡혈귀들.

가능하면 가정을 꾸리는 건 그 문제까지 해결하고 하고 싶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거니까.

"대충 짐작 가긴 하지만 아직 혼인할 생각은 없는거죠?"

"..."

-끄덕

"돌아가면 독봉이랑 잘 놀아주기나 하세요. 당신 없는 동안 제일 외로워한 게 그녀였으니까요."

인생 선배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가고 나면 마지막으로 준비할 걸 끝낸 다음에 흡혈귀들을 끌어들일 함정을 퍼트릴 거에요. 당신도 뭘 말하는지 알죠?"

"..그거 벌써 준비가 끝났어요?"

"아마 돌아가고 나서 일주일 정도 뒤엔 준비가 다 끝날 거에요. 검후와 저는 '그곳'에서 그 마귀들과 싸울 거니까.. 당신이랑 독봉은.."

"..안전하게 섬서에 있으라는 거죠?"

"잘 기억하고 있네요."

여소천이 말한 흡혈귀들을 끌어들일 함정.

그건 우리가 미리 방문했던 신투의 보고를 말하는 거다.

다른 세계에서 온 흡혈귀들이 사실상 현재의 혈교를 장악한 상태라곤 하지만 그들이 기존의 혈교의 잔당들에 의해서 소환되고 그 이름을 계승한 이상 혈교의 신물을 무시할 순 없었다.

실제로 쓸모가 있던 없던 그들에게 새겨진 제약 때문에라도 그들은 신물을 확보해야만 하고 그렇다면 당연히 그곳에 병력의 대부분은 물론 그 대장까지 모습을 드러낼 터.

"저와 검후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히 쓸만한 후배들도 몇 명 섭외해 놨으니 문제없겠죠. 제 검도 되찾은 이상 제가 그 우두머리에게 밀릴 일은 없어요. 정면 승부는 자신 있다구요."

검후님과 여소천 모두 20년 전에는 혈교에게 패배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경지 자체가 달랐다.

지금 상태론 다시 그때의 혈교와 싸워도 자신 있다고 하니 믿어야겠지.

애초에 안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리고 이제..

"제 이야기는 대충 끝났으니 당신 이야기나 해보죠.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 보이던데."

-꿀꺽

올 것이 왔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말하기 전에 질문할게 있는데요.."

"뭔가요?"

"천기를 읽을 때.. 그 천기 안에 있는 인물이 바깥의 관찰자를 인지하고 간섭할 수 있나요?"

"...?"

내 질문에 여소천이 그게 대체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제가 이해한 게 천기 안에 있는 인물이 바깥에 있는 관찰자.. 즉 당신을 인지하고 간섭할 수 있냐는 거죠?"

"네.."

"그런 게 될 리가 없죠? 비유하자면 책 속에 있는 인물이 바깥의 독자를 인지하는 것도 모자라서 실제로 물리력도 행사한다는 건데.. 그런 게 말이 될 리가 없잖아요?"

"그.. 혹시 그 사람이 천기를 읽는 거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면.."

"그래도 안돼요. 저희가 천기를 읽는 거랑 그 바깥의 천기를 인지하는 건 말만 같은 천기지 아예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 그건 저라고 해도 불가능해요. 혹시 당장 다른 천기의 누군가가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더라도요."

"음.."

"저희가 하는 게 '관찰'의 영역이면 당신이 말한 건 '관리'의 영역이에요. 그리고 천기의 관리자는.."

"...천지신명?"

"예. 신의 영역이죠.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여소천의 대답을 듣고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면 천마가 천지신명인가?'

순간 의식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갔지만 그 생각이 깨지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분명 천마는 나를 처음 보는 것 같은 눈치였다.

만약 천마가 천지신명이라면 그동안 계속 하늘 위에서 나를 지켜봐 놓고 이제 와서 처음 보는 척을 했다는 건데 끝까지 그런 척을 할 거라면 끝까지 했지 굳이 천기를 읽는 중인 나를 겁탈하며 이렇게 뻔히 들키게 만들진 않았을 거다.

그러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미친.'

천마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최소한 신의 영역에 발을 걸친 강자라는 것이었다.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데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비정상적인 상황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일이 커질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나는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 대로면 지금 상태는 꽤 심각한 상태였다.

지금 내가 그런 여자한테 관심을 끌어버린 셈이니까.

-덜덜덜덜

'..좆된거 같은데.'

1차 위기가 스승님. 2차 위기가 뱀파이어였다면 3차 위기는 천마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 강자.

그런 사람이 지금..

"...상태가 이상해보이는데요? 혹시 진짜 그런 일이 있던 건 아니죠?"

"...사실은.."

여소천의 재촉에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천마의 천기를 보게 됐는데 그 안에서 천마가 내 존재를 눈치채고 겁탈했다고.

아직 어떻게 될지 몰라서 천마의 운명의 상대로 내가 나왔다는 거나 내가 그 안에서 갇혀있었다는 것까진 말하지 않았지만 저것 만으로도 충분히 심각한 상황인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괴물 같은 여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여소천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어쩐지 구름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도 이상한 기운에 막힌다 싶었더니.. 그 정도면 안되는 게 당연했겠네요. 후우.."

"그.. 혹시 심각한 거에요?"

나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에 걱정어린 마음으로 물어봤지만

"...아뇨. 지금 당장은 크게 문제될 건 없어요."

"네?"

"어차피 그 여자가 그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고.. 마교 밖으로 나와 중원으로 발길이 향하지만 않는다면 결국 지금 까지와 다를 건 없으니까요."

생각보다 싱거운 답변이 돌아왔다.

"...제가 겁탈당한건요?"

"...뭐. 누가 나를 관찰하나 하고 봤더니 당신 같은 남자가 있으면 할 수도 있죠? 당장 당신 그 망토 없이 중원에 던져 놓으면 한동안 중원 여자들 사이에서 피바람이 불 거 같은데."

"어.."

여소천이 저렇다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뒤쪽의 말은 조금 과장된 게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 외모가 위험한 물건이라는 건 이미 나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니던가.

"아, 아무튼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 나는 안도하며 나도 모르게 몸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살짝 남아있던 면이 다 불어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야 뭐 일이 잘 풀렸으면 된 거 아니겠는가.

어차피 돈도 많은데 부족하면 하나 더 시키면 그만이고.

그러면 이제 섬서로 돌아가서 당아영이랑 검후님을 만나고 할 일만 하면 되겠..

"다행이죠. 혹시 그 읽었다는 천기 안에서 당신이 천마와 연관되어 있었다면 훨씬 일이 복잡해졌겠지만 지금 정도면 그냥 그 여자를 자극하지만 않으면 돼요."

...어?

"그 정도 영역이면 상상이 곧 천기가 되어버리거든요. 아예 현실적인 이유로 불가능한 게 아닌 이상 원하는 건 뭐든지 이룰 수 있는 영역이니까요. 산을 부수고자 하면 산을 부술 수 있고 사람을 취하고자 하면 상대가 거부할 수도 없으니 원하는 게 곧 미래가 되어버리는 거죠.

......어?

"근데 뭐 당신은 그때 천마를 처음 만났을 거 아니에요? 기껏해야 방금 만난 사람하고 미래를 그릴 일도 별로 없죠. 뭐 첫눈에 반해서 자식 이름까지 생각했다거나 할 정도로 강렬하지만 않으면 천기가 생성되지도 않고요. 당신은 망토 때문에 얼굴도 가리고 있으니.. 그걸 뚫어봤다면 모를까 첫 만남에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겠죠."

............................................

"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