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10장-하늘
마교에서 볼일을 마치고 도망치듯이 빠져나온 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여정이 시작되고도 또 몇 주.
"돌아왔다...."
-풀썩
나는 드디어 다시 중원 땅을 밟는데 성공했다.
"아아.. 이 그리운 흙 내음.. 다시 못 맡는 줄 알았어.."
"...이해해요 이해해."
나랑은 경우가 조금 달랐겠지만 그녀도 나와 비슷한 시절이 있었는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땅바닥에 엎어지는 건 상관없는데 아까 보니까 거기에 벌레집이.."
"꺄악?!"
-펄쩍!
"..농담이었어요."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당황한 표정의 상인을 노려봤다.
어차피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내 표정이 보이진 않았겠지만 분위기 상 노려본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는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 장난 좀 친건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죠."
"감동의 재회를 그렇게 망치지 말아주실래요..!"
"아, 아니 사내가 돼 가지고 고작 벌레 좀 있다고 했다고 그렇게 계집애처럼 비명 지르면서 펄쩍.."
"원래 주려던 추가금은 없던 걸로 할게요."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습니다."
사장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나쁜 직원에게 인센티브따위는 없다.
-탁탁
"칫."
농담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영 찝찝한 기분에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원 땅이라고 표현한 이곳은 곤륜의 영역이지만 아직 주변에 성이나 마을 같은 건 보이지 않는 벌판이었다.
마교와 거래하는 만큼 다른 상인들처럼 평범하게 정문으로 성에 들어갈 수 없는 처지라 우리가 만났던 곳까지 데려다 주기는 어렵다는 말에 적당히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내려주는 걸로 타협을 봤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면 특별히 위험이랄 것도 없고 곤륜의 영역에서 도적질을 하는 간 큰 이들도 없을 테니까.
"근데 정말 여기까지만 데려다 드려도 괜찮겠어요?"
"성까지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은데요 뭐."
"뭐 고객님이 괜찮다고 하시면 상인이 뭐라 더 할 말은 없죠."
나는 말없이 미리 분류해둔 보수를 담은 주머니를 그녀에게 던졌고 그녀는 눈을 빛내며 양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잘그락
"이용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도 또 이용해주세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슬프네요."
"말해 놓으신 시기에 미리 일정 비워두겠습니다! 다음엔 장난감도 더 준비해 놓을게요!"
"내가 무슨 애인 줄 아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고민이 많지만 우선 반년 안에 다시 천마를 만나러 오기로 약속한 상황이었기에 5개월쯤 뒤에 다시 만나자고 상인에게도 말해 놓은 상태다.
직업 특성 상 그 사이에 무림맹에 걸려서 쓱싹 당할지도 모르긴 하지만..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뭐.'
지금까지 안 걸린 걸 보면 나름 베테랑인 것 같은데 알아서 살아남을 거라 믿었다.
슬쩍 읽어본 천기를 보면 아직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으니까 별일 없을 거다.
-두리번
"..갔나?"
상인이 마차를 이끌고 자리를 벗어나 시야 밖으로 사라진 뒤로도 조금 뒤.
나는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어차피 주변에 아무도 없을만한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여소천을 부를 준비를 했다.
사람 많은 데서 부르기엔 소리도 요란하고 그녀의 외모가 눈에 너무 띄는 편이었으니까.
자 그러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도 확인 했으니까..
'이번엔 어떻게 부를까.'
여소천을 부를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방법 자체는 간단했다.
지금까지의 경험 대로면 천지신명을 욕하면 바로 튀어왔으니까 똑같이 하면 부를 수 있을 거다.
즉, 여소천을 부른다는 핑계로 합법적으로 천지신명을 욕할 수 있다는 것.
그래도 어떻게 보면 신성모독인데 두렵지 않냐고?
'그쪽은 저한테 왜 그랬는데요.'
멋대로 다른 세계로 끌려와서 지금 생체딜도로 살게 생겼는데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길 빌면 양심이 없는 거다.
원래 성녀님 세계로 끌려가던 걸 구해줬다고는 하는데 이제 와선 그쪽이나 이쪽이나 생체딜도 신세인건 마찬가지 아닌가.
[마찬가지면 역시 인프라라도 좋은 이쪽 세계가 더 메리트가 있..]
'시끄러워요.'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쪽에선 얼굴도 모르는 수십, 수백 명의 여자랑 섹스를 강요하진 않는다.
수백이 뭔가. 저쪽 세계의 상황을 생각하면 수만까지 볼 수도 있다.
이상한 마법 같은 것도 많은 세상이라 억지로 수명도 늘려버릴지도 모르고.
[뜨끔.]
'...진짜였나본데.'
[오, 오래 살면 좋잖아요. 역사적으로 수많은 마법사들이 뼈다귀 뿐인 리치가 되어가면서 까지 추구하던 영생을 아무런 패널티 없이 누릴 수 있는 기회..]
'관심 없어요.'
그리고 인프라 좋아하시네.
신전 밖으로 내보내주긴 할지도 의문인데.
[...선심 써서 1년에 30분 정도는 햇빛을 쐬게 해드릴게요.]
'그게 선심이라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었다고.'
사람이 저렇게 입 열 때마다 분위기가 깨는 것도 참 쉽지 않은데.
외모만 보면 신성한 성녀 그 자체인데 어떻게 성격이 저렇게 글러 먹었을까.
[저도 원래는 용사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이미지였어요! 용사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최소한 본인이 글러먹었다는 자각은 있으니 다행인가.
그래도 아직은 이쪽 세계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성녀님과의 통신을 끊었다.
그렇다고 물론 이쪽 세계라고 좋은 건 아니다.
따지자면 지구>>>>>>>>>>무림>>판타지 정도니 상대적으로 낫다고 내가 천지신명을 욕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자 그러면 이번엔 어떤 욕을 해볼..'
"...이미 와있으니까 안 해도 돼요."
"으꺅?!"
갑자기 인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펄쩍 뛰며 뒤를 돌아봤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치곤 좀 흉하네요."
"여, 여소천?"
"네, 저 맞아요. 오랜만에 뵙네요. 어떻게든 그 기회를 타서 모욕 한번 해보려는 게 참 당신 답고요."
"아, 알고 있네요?"
"당신 생각이 뻔하죠 뭘. 그 정도는 계시 없어도 읽혀요."
무림인의 감인 건지 여자의 감인 건지 둘 다인 건지 모르겠지만 남의 생각을 훤히 읽는 모습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으휴 이 주둥아리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꾹
"웁."
여소천이 양손으로 내 양 볼을 눌러 찌그러트렸다.
그렇다고 과한 힘이 실리진 않은 마치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힘이었다.
천둥소리 하나 없이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정말 여소천이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여소천의 모습 그대로 였기에 금방 의심을 거뒀다.
그녀처럼 생긴 사람이 중원에 둘이나 있을 리도 없고
아무리 체형을 바꾸는 기술이 있다고 해도 여소천의 체형을 따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린 소녀의 키와 몸집에 가슴이나 골반은 성인의 것인 체형을 무림의 기술로 어떻게 따라할까.
그거야말로 무공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뭘 그렇게 봐요. 뭐가 수상해요?"
"아니 소리 하나 없이 나왔길래.."
"그야 미리 근처에 와있어서 구름이나 천둥까지 몰고 다닐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아하."
의문이 금방 풀렸다.
평상시 구름과 천둥을 몰고 다니는 건 빨리 이동하기 위해 경공을 펼칠 때의 여파인 거지 그냥 근처에서 걸어왔다면 그런 요란한 걸 몰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도 잠시
"그래서. 잘 다녀 왔어요? 거기서 별일 없었고요?"
-뜨끔!
"...그으..게 말이죠."
별일 없었냐는 여소천의 물음에는 눈을 돌리며 대답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천마의 천기를 읽어줬더니 미래의 상대가 나였다고.
대책을 강구하려면 솔직히 말해야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혼인하기로 한 사이에 이런 걸 대놓고 말하기엔 여러모로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천기 관련해서 고민을 털어놓기엔 여소천이 제일 좋은 상대이기도 했고...
'...역시 말하는 게 맞겠지.'
다른 2명한테 말하기 전에 여소천에게 먼저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입을 열려던 순간
-쓰담쓰담
"됐어요. 나중에 말해요 나중에."
"...?"
"으휴."
여소천이 내 말문을 막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담쓰담
"...뭐 하는 거에요."
"그냥 귀여워서요."
"..."
원래 이런 성격이던가.
오늘 따라 뭔가 나를 애 다루듯이 다루는 것 같은 모습에 나도 괜히 손을 들어 여소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소천은 그런 나를 제지하지 않았고 결국 어린애 둘이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괴상한 그림이 완성됐다.
'...뭐지 이게.'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어색한 상황에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던 도중
"...돌아가고 싶어요?"
여소천이 돌연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네?"
"돌아가고 싶냐구요. 지구로."
"...갑자기요?"
"대답이나 하세요."
"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지구로 돌아가고 싶냐니.
당황스럽긴 했지만 일단 질문을 했으니 대답을 하긴 해야겠지.
옛날 같았으면 바로 돌아가고 싶다는 대답이 나왔겠지만..
"...딱히요."
이제 아니었다.
스승님도 스승님이지만 당아영, 검후님, 여소천 등의 이 세계에서 만든 인연이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었고
그에 반해 지구의 흔적은 흐릿해서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지구가 정말 좋고 편한 세계라는 기억과 지식 정도는 있지만 정말 거기까지.
구체적인 지구에서의 생활이나 인과관계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지구에서 쓰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아 이 몸에 처음 빙의했을 당시 주머니에 있던 명찰에 남아있던 단유성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지 않던가.
그에 반해 직접 쌓은 이 세계에서의 기억과 인연은 선명하게 남아있으니 지구와 무림 중 한 세계를 진지하게 고르라고 한다면 내 선택은 후자였다.
"언제는 매일 돌아가고 싶다고 징징대고 난리더니."
"그건 이 세계가 너무 살기 힘드니까 버릇처럼 하는 투정이고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말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수단이 눈앞에 있으면 상황이 또 달라질지도 모른다.
어차피 현재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상점창이 포인트가 한참 모잘라 의미가 없는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어지간하면 이 세계에 남아있을 것 같지만.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다행이네.]
의문을 가지고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자 여소천이 사라져있었다.
"...여소천?"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찾아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아까 확인했던 것처럼 아무도 없는 벌판 뿐
그제서야 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여소천이 내가 돌아가고 싶다고 징징대던 걸 어떻게 알지..?'
내가 매일같이 그랬던 건 비교적 빙의 초창기 시절.
스승님을 만나기 전 뒷골목에서 나뒹굴던 시절이나 스승님에게 거두어지고도 몸이 낫지 않았던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이었다.
여소천이 나를 만나기는 커녕 그녀나 나나 서로의 존재도 모르던 시절.
근데 그걸 여소천이 어떻게..
-콰릉!
"아! 여기 있었네요! 왜 성으로 안 오고 이런 데에 있었어요! 부르기라도 하지!"
내가 의문을 품고 있던 사이 여소천이 구름과 함께 푸른 번개에 감싸인 채로 옆에서 나타났다.
"...여소천?"
"오랜만에 보네요. 잘 다녀 왔어요? 거기서 별일 없었고요?"
방금 전 만났던 여소천과 똑같은 외모와 똑같은 목소리의 똑같은 대사.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다르게 내 본능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 깨닫는데 성공했다.
'..천지신명.'
나는 방금 신을 만났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