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10장-복귀
-다그닥다그닥
"근데 손님 그 보따리는 뭐에요?"
"아 이거요."
나는 그녀의 말에 품에 안고 있던 보따리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나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존재를 반쯤 까먹고 있었다.
왜 손에 리모컨 들고 있으면서 찾으려고 여기저기 둘러볼 때 있지 않나. 딱 그런 느낌이다.
무의식적으로 꽉 잡고 있긴 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이걸 잡고 있다는 것도 까먹고 있던 그 느낌.
"보수라고 줘서 받아왔는데 그러고 보니 저도 깜빡 잊고 있었어요."
"엄청 급해보이시던데 그건 또 용케 챙기셨네요?"
"...그러게요."
나도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정신없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건 또 제대로 손에 붙들고 있었다.
'그 고생을 해서 번 거니 당연한 건가.'
아무리 무서워도 고생한 대가는 받아야지.
무섭다고 그냥 도망쳐 나오면 무료 봉사 수준도 아니고 정신적 피해만 입은 꼴 아닌가.
'뭐 보수래봤자 돈 조금 챙겨준 거겠지.'
그런 내 예상은 거의 적중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따리를 풀자 그 안엔 50개정도 되어 보이는 금전과 함께 예상치 못한 것도 같이 들어있었는데
"...뭐죠 이건?"
"술.. 같은데요?"
"아니 술인 건 알겠는데 그걸 왜 여기.."
병이 깨지지 않게 목함으로 감싸인 술병도 같이 들어있었다.
아무리 함으로 감싸져 있다지만 겨우 보따리인데 혹시라도 깨지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담아놨단 말인가.
"보통 술을 이렇게 보관하던가요?"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긴 한데.. 뭐 그렇게 따지면 마교 자체가 일반적인 집단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하네요."
내가 보따리를 험하게 다뤘으면 귀한 술이 날아갈 뻔 했다는 사실에 가슴을 졸이며 조심스럽게 술의 마개를 열고 향을 맡아봤다.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그러나 전혀 불쾌하지는 않은 향이었다.
'엄청 귀한 술이구만.'
바로 얼마 전까지 쓰러지기 직전까지 술을 마셔 놓고 코로 향이 들어오니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것처럼 침이 흘러나왔다.
아마 내가 사람이 아니라 개라서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뒤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지 않을까.
[아 좋은 아이디어네요 용사님! 다음 화보는 동물귀나 꼬리를 달고 수인 컨셉으로 촬영..]
'차단.'
[거, 걱정 마세요! 용사님이 생각하는 그런 꼬리가 아니라 마법적으로 안전하게 그냥 등에 갖다 붙이면 알아서 감정 상태에 따라 움직이는 마도문명의 정수라고요!]
'저딴게 문명의 정수?'
저 세계는 망했다.
아 진짜 망했지.
[너무해!]
나도 모르게 꽂아 넣은 팩트폭력에 괴로워하는 글러먹은 성녀를 뒤로 하고 술과 함께 들어있던 작은 종이를 꺼냈다.
여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려한 필체로 쓰인 글이었는데 내용을 보자마자 누가 쓴 것인지 예상이 가능했다.
[다음엔 더 좋은 술을 대접하지.]
'...천마.'
천기가 말해준 내 운명의 상대.
외모도 아름답고 취미도 맞는 여인이 운명의 상대라고 지정되면 사내라면 좋아하는 게 정상일텐데 나는 두렵기만 할 뿐이었다.
제발 이 운명이 닥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만 있지 하늘에 맹세코 기대하는 마음은 1%도..
'...'
..아무튼 굉장히 적다.
지하에 감금된 뒤 하루 종일 강간 당하며 사육 당하는 삶 따위 살아줄까 보냐.
헤어지기 전 미래의 천마가 말했던 것처럼 최대한 발버둥 쳐볼 작정이다.
천기라는 건 어디 까지나 수많은 가능성일 뿐이지 확정된 미래가 아니니까.
그런 의미로 내가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현재의 천마에게 천기누설을 행하지 않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흔히 천기누설에 대한 잘못된 오해가 천기누설을 하면 그 미래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게 절대는 아니다.
예를 들어 1분 뒤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람에게 그 미래를 알려준다고 그 미래가 오지 않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 미래를 피하겠답시고 천기누설을 해봤자 그것 만으로 무언가 변하진 않고 오히려 더 안 좋은 미래가 닥칠 가능성도 허다하다.
또 다른 예시로 살수가 숨어서 당신의 뒤를 노리고 있고 1분 뒤에 당신의 목을 벨 예정이다 라고 알려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같이 듣고 있던 살수가 깜짝 놀라서 바로 목을 베어버리겠지.
천기누설이란 그런 거다.
만약 내가 거기서 천기누설을 통한 미래 회피를 노리고 천마에게 운명의 상대로 내가 나왔다고 했다면 아마..
그때부터 이미 나한테 은근히 마음이 있었던 것 같으니까..
'바로 지하실로 끌려갔을지도.'
그래도 당일 만난 사이인데 바로 그렇게 까지 할까 라는 마음도 없는 건 아니지만 미래에서 당했던 일의 임팩트가 조금 컸어야지.
내 안에서 그녀는 이미 예비 강간범이었다.
본인도 억울할 것도 없다.
분명 애인이 이미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유혹하는 건 어느 나라 상도덕이란 말인가.
아무리 무서운 여자라도 외모가 외모인지라 설렘 반 두려움 반의 감정으로 흘려 넘기는 것도 엄청난 고역이었다.
"하아.."
"왜 또 한숨이에요."
"세상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요."
"뭐 언제 세상이 살기 편했던가요."
"그거 참 도움 되는 명언이네요.."
그래 뭐.
세상 살기가 언제는 편했던가.
내가 어쩌다가 여난에 파묻혀서 깔려 죽기 직전까지 왔는지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법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천마를 부인으로 삼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겠지.
"..."
생각하고 나서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이 본다면 아마 배가 불러 티지기 직전인 재수 없는 놈이거나 엄청난 자의식 과잉처럼 보이겠지.
'진짜 배불러 터져 죽겠다는 게 문제고.'
차라리 자의식 과잉이면 좋았을텐데.
성녀님 빨리 제가 자의식 과잉이라고 해줘 봐요.
[아주 눈빛에서 하트가 흘러 넘치던데요? 거기서 용사님이 좋다는 신호를 조금만 보냈어도 바로 결혼식장으로 직행했겠어요.]
'브루투스 너마저!!!'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이미 망한 세계라 눈치 볼 것도 없어서요!]
아. 삐졌구나.
'...뭘 원해요.'
[계야..]
'빼고요.'
[아직 '계약'도 다 못 말했어요?!]
'그건 절대 안된다니까 자꾸 이러시네.'
[그야 그게 제 목표의 전부니까요!]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아직 일러요.'
[대체 진행도가 얼마나 쌓여야 안 이른건데요?!]
'올 CG 해금 이후 나오는 진 엔딩 클리어?'
[그래도 히든엔딩 취급은 해주시는군요..]
'후속작 떡밥인데요.'
[최소한 DLC로는 해줘요?!]
무림에 있는 여자들과는 할 수 없는 종류의 대화에 마음이 편해진다.
비록 저 여자도 판타지 출신이라 지구 출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대화가 통하는 것 만으로도 큰 위안이었다.
[흐흠. 제가 용사님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
'저를 납치하기 위해서 다른 세계를 그렇게 공부해주다니 감동이네요..'
[납치라뇨. 정당한 계약이었다구요.]
'미성년자의 보호자 동의 없는 계약은 무효라고 배웠어요.'
[미성년자 아니잖아!]
'그치만 이 외모면 누가 봐도 미..'
[잠깐 스타아압!!!!]
하마터면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는 대화로 끌려가기 직전에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아무튼 잡담은 이 정도로 마치고.
'그래서 왜 지금까지 불러도 안 나오셨어요?'
이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물어봐야 할 차례였다.
마교의 영역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성녀님과의 연결이 끊겼었다.
상점창을 포함해서 성녀님과 관련된 연결이 전부 끊겼고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오히려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동안 들 정도였는데
-삐질삐질
[그..으건 말이죠..]
'천마한테 쫄았어요?'
[...]
'...진짜요?'
반쯤 장난으로 해본 말이었는데 아무런 말도 없었다.
[쪼, 쫄았다는 표현 대신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했다고 표현해주시겠어요?]
'......'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다른 차원에 간섭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세요? 본체라면 모를까 용사님이랑 통신도 겨우 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여자랑 마주쳤다간..]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말만 안 했지 다 전해졌다고요..]
성녀님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나도 언제 또 천마를 만날지 모르는데 쓸 수 있는 수를 최대한 확보해 놔야 하는 상황이라 알아둘 건 알아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천마 앞에선 상점창도 쓰면 안되는 거에요?'
[첫 만남이라 제가 좀 과하게 대비한 감이 없잖아 있긴 한데.. 그렇다고 대놓고 펼치면 뭔가 이상한 걸 느낄 가능성이 커요.]
'으음..'
그때 가서 뭔가를 사려는 생각은 하면 안되겠다.
필요한 게 있다면 미리 사둬야 한다고 머릿속에 입력해두는 걸로.
그런 결론을 얻고 나자 과연 뭘 사둬야 그 위험한 여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이 생겼다.
사실 그 신위를 생각하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다기 보다는 그녀가 내게 관심을 끊게 만드는 쪽이 더 유효할 것 같은데
'비호감 짓이라도 해야 하나?'
일부러 이상한 짓을 해서 나를 향한 호감도를 떨어지게 만드는 방법이 생각났다.
남자가 여자한테 하면 싫어할 만한 짓..
예를 들면..
'성희롱?'
그러면 잘못 만났다 생각하고 나한테 이성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자.
눈 딱 감고 가슴 한번 만져봤다고 하면..
...생각해보니까 그러면 호감도를 떨어트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모가지가 붙어있을 지를 걱정해야 한다.
잘해 주자니 호감도가 올라가서 정조가 위험해지고
나쁘게 대하자니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여자를 다음에 또 만나야 한다고?
'...시발 진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데.'
나도 모르게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닦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내내 심심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