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10장-암약
-타다닷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면서 마교까지 태워다 준 상인과 만나기로 한 곳으로 달려갔다.
아직 그녀가 떠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는 많이 남아있긴 했지만
-덜컥!
"소, 손님?"
"볼일 끝났죠?! 지금 출발할 수 있죠?!"
"네, 네.. 출발할 수 있긴 한데.."
"그러면 바로 출발해요! 지금!"
"어어.. 네.."
나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재촉해서 바로 마차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손님.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뭐 훔치거나 죄 짓고서 달아나는 건 아니죠? 그러면 저도 위험.."
"금 20전."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저런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괜히 백마디 해서 설득하는 것보다 한마디가 더 효과적이었다.
어차피 지금 돈이 중요한 게 아니기도 하고..
-쿵쿵쿵
'안 들켰겠지..?'
뭔가를 훔친 건 아니었지만 일단 찔리는 것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혹시라도 쫓아오기 전에 빠르게 튀려는 마음이 간절했다.
갑자기 뭐가 수상하다며 멈추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다그닥
"그러면 뭐 놓고 온 물건은 없으시죠?"
"있어도 그냥 갈 거에요."
"어휴 겁을 많이 먹으셨네. 하긴 저도 처음에 여기 왔을땐 그랬죠. 아무튼 출발할게요."
어차피 내 귀중품은 대부분 망토 안에 있고 혹시 쓰러진 사이에 무슨 일 없었나 확인하는 사이 전부 제대로 있는 걸 확인했다.
제일 중요한 구슬도 제대로 챙겼고.
'왠지 빛이 조금 바랜 거 같은데 기분탓이겠지.'
스승님 걸 훔쳐온 물건이라 혹시 망가지기라도 하면 내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다.
안 그래도 이제 슬슬 폐관수련이 끝나고 밖으로 나올 때가 됐는데 내가 집에 없는 걸 확인하면 100% 확률로 나를 잡으러 산에서 뛰쳐나올 인간인데 그 상황에서 구슬도 망가진다?
'...무덤 자리라도 알아봐야 하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수가 있었다.
아무리 미워도 설마 제자를 죽이겠냐고 해도..
'제자가 스승이 폐관수련에 들어간 사이 살림살이를 챙겨서 도망치는 건 말이 되고..?'
업보가 업보라서 마냥 낙관적으로 생각하기 힘들었다.
비록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나약한 제자를 남겨두고 폐관수련에 들어간건 스승님이 먼저라고 해도 말이다.
일단 구슬은 나중에 한번 알아보는 걸로 하고..
"혹시 쫓아오는 사람 없죠..?"
"진짜 뭐 훔쳐서 나왔어요?"
"...누군가의 마음?"
"..."
-끼릭..
"반쯤 농담이니까 마차 멈추지 마요. 제가 잘못했어요."
"저 방금 손님을 묶어서 마교에 다시 던져 놓고 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빚 때문에 고생 중인 노처녀 앞에서 하기 좋은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도 훔치고 싶어서 훔친 게 아니지만 그것도 노처녀한테는 기만처럼 들릴게 뻔하니 조용히 분을 삭히고 있는 그녀를 적당히 위로하며 다시 마차를 앞으로 몰았다.
-다그닥..
그렇게 마차를 몰고 어느덧 우리가 출발했던 장소가 작은 점으로 보일때쯤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됐는지 내게 입을 열었다.
"손님 혹시 주변에 소캐시켜줄만한 좋은 남자 없어요?"
"주변에 이상할 정도로 남자가 없어서요."
"...저도 같은 처지라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분명 세상의 절반은 여자와 남자일텐데 이상하게 내 주변엔 여자만 있단 말이지.
그래도 뭐..
-하아
'내 팔자가 그렇지 뭐..'
이제 나도 반쯤 자포자기 상태다.
여기서 더 늘어나지만 않길 바랄 뿐이지 여기서 더 나아지는 건 기대도 안 한다.
이쯤 되면 진짜 그냥 내가 밖에 돌아다니는 게 문제가 아닌가 싶고..
-힐끔
"..."
"뭘 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여자는 전부 경계하면서 다녀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언젠가 당아영이 여자는 다 짐승이라고 했던 걸 웃으면서 흘려들었던 적이 있는데 이제 마냥 웃을 수도 없다.
분명 얼굴도 보여준 적 없는 천마마저 위험 신호를 보내는 상황까지 왔단 말이다.
그 여소천마저 그냥 마교에 가만히 있게 두는 게 안전하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 혹시 나 때문에 중원에 풀려나기라도 하면..
-부들부들
그땐 흡혈귀가 문제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 * *
-챙!
-핑그르르..
"..졌습니다."
한때 검화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플로라 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대련상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죽었다 살아나 새로운 생명을 받고 흡혈귀라고 불리는 종족으로 다시 태어나고도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가 한일은 그저 끊임없는 수련과 그녀에게 향한 시비를 정면에서 부숴주는 것 뿐.
무언가를 먹을 필요도, 잠을 잘 필요도 없는 몸이었기에 살아있던 시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수련에 투자할 수 있었다.
그 평화로웠던 시기와 다르게 지금은 목표 또한 확실히 있지 않던가.
'스승..'
이제 님이라는 말도 필요 없다.
한때 부모와도 같이 생각했던 여자였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찢어 죽일 원수에 불과했다.
감히 올려다보기도 어려운 격 자체가 다른 여자를 목표로 삼고 수련 한 덕분일까
성장 속도는 자체는 무시무시했다.
-스릉
"..."
그녀는 빛이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그와 대비되게 선명하게 붉은 빛을 내고 있는 강기를 바라봤다.
흡혈귀들의 세계에선 마스터. 중원에선 화경이라고 불리는 경지.
그녀의 죽기 전 경지가 절정이었던 걸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성장 속도였다.
그녀의 스승도 이 시기에 이 경지까지 도달하진 못했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까득
'부족해.'
그래도 그녀의 스승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했다.
다른 이가 상대였다면 모를까 그녀가 상대해야 할 건 다름아닌 검후였으니
꽃은 여왕을 꺾기엔 너무 연약했다.
이미 충분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그녀라도 슬슬 조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도 유성이는 그 간악한 여자에게 안겨있을 텐데 만일 유성이가 완전히 그 여자에게 빠져버린다면..?
-까드득
'제때 결혼했다면 그만한 손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주제에..'
상상만으로도 역겨워 이 저주받은 몸에 흐르는 피를 전부 토해낼 것 같은데 그 장면을 실제로 봤다간 그녀 자신도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유성이에게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유성이가 먼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한.
간신히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며 마저 수련을 하기 위해 돌아가던 중
"오! 플로라! 그대도 왔구나! 어서 이쪽으로 오거라!"
"..."
흡혈귀들의 왕이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부르니 표정이 일그러질 뻔 했지만 지금 그녀는 바르슈타인을 철저히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간신히 표정관리를 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그래봤자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이었지만.
"무슨 일이야?"
"얼마 전에 말했었지. 슬슬 태양빛을 보러 나가야 할 때가 올 것 같다고."
"...그런데?"
바르슈타인은 어느새 가져온 핏빛 액체가 든 유리잔을 돌리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된 일정이 정해졌다."
"...!"
"아직 이 세계를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슬슬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은 들어서 말이야."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중원을 정복하고 그들의 주인을 이 세계에서 부활시키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무림인이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은 학살이 필요하다는 것도.
'학살..'
그야말로 예전의 혈교와 다를 것 없는 짓이었다.
바르슈타인이 그 이름을 부정하지 않는 것에는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그가 이 세계로 소환되는 과정에서 있던 의식에 새겨진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새로운 집단을 만드는 것보다 기존에 이미 중원에서 큰 혼란을 일으켰던 혈교의 이름과 공포심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보다 편한 일이었으니까.
"이미 심어 놓은 간자들이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은 혈교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야. 아직 세간에 공표하지 않은 이유는 혼란 방지와 더불어 우리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거겠지."
"..그런거야?"
"그러니 지금이 그들이 더 준비를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한방 크게 터뜨려야 할 때다. 계속 몸을 사리고 몸집을 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분을 불러올 의식을 준비하기 위해선 단순히 숨어 지내는 것 만으론 부족해."
"...그렇구나."
그녀는 그들이 학살을 저지르던 봉사 활동을 하던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유성이와 관련된 게 아니라면 어떤 이야기라도 상관 없..
"그래서 본교의 첫 번째 무대는 화산으로 정했다."
"...!"
"기왕 기습 공격을 할 거라면 적장 중 한 놈의 팔이나 다리 정도는 가져와야 타산이 맞겠지. 듣기론 그곳이 구파일방이라고 불리는 중원에서 가장 강한 조직 중 하나라지? 주변에 민간인들도 아주 많고. 첫 목표로 제격이야."
이후로도 바르슈타인의 사담이 한참 동안 이어졌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과거 그녀가 몸담았던 곳이자 스승이 있는 곳.
그리고 아마 유성이도 있을 곳.
생각보다 빠르게 기회가 찾아왔다.
-텁
"자. 미리 올리는 축배니라. 산을 불태울 시간이다."
바르슈타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비웠다.
......
"저기 근데.."
"음?"
"화산은 불타는 산이 아니야.."
"뭣?!"
서양인의 한자 공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