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10장-현실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일단 현실로 무사히 돌아온 건 맞는 것 같은데..
"저기.."
"음?"
"여기가.. 현실 맞죠?"
"현실이라니?"
"아, 아니요.. 네.. 그렇겠죠.."
아무렴 아직도 구슬 안일까.
공간이 무너지는 감각은 확실히 있었고 주변의 천기의 움직임도 정상으로 돌아온 게 보이니 이곳은 현실이 맞을 터였다.
-몰캉
그러니까 이 부드러운 허벅지의 감촉도...
"...???????"
뭐가 순식간에 확확 지나가서 혼란스러웠던 정신이 갑자기 팍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현실에서 천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죄, 죄송합니다!"
나는 내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굴러 자리를 벗어난 다음 바닥에 엎드렸다.
당황, 두려움, 생존 본능 등 다양한 종류의 감정이 실린 움직임.
"그렇게 까지 미안해 할 건 없다만."
"아,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대가 한 것도 아니고 본녀가 내어준 것 뿐인데 미안할 게 뭐가 있겠나. 고작해야 허벅지 정도 아닌가. 갑작스레 쓰러진 이에게 그 정도는 내어줄 수 있는거지."
"..."
확실히 뭐 무릎베개가 그렇게 수위 높은 짓도 아니고 쓰러진 사람한테 그 정도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면 할 말은 없긴 하지만..
-삐질삐질
'부담스러워!'
하필 상대가 상대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하고 말았을텐데 상대가 그 천마란 말이다.
방금 전까지 천기 안에서 나를 무자비하게 겁탈했던 그 여자.
"아니면 이 이상을 원하나..?"
"...장난이 짓궂으십니다."
"그런가. 완전히 장난은 아닌데 말이지."
-으스스
저 은근하게 유혹하는 듯한 행동을 마냥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외모에 속아서 넘어갔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방금 전까지 뼈저리게 체험하고 오지 않았던가.
"..괜찮다면 제가 어쩌다 쓰러졌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괜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을 돌렸다.
저런 말은 괜히 대꾸하면 손해다.
수락을 해도 큰일이고 대놓고 거절을 해도 큰일이라 어떻게든 화재를 돌려버리는 게 최선이다.
"뭐, 그다지 특별한 것은 없었다. 처음엔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한참이 지나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길래 살짝 건드리자 그대로 엎어져버렸기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지켜봤을 뿐."
"그랬습니까.."
"아무래도 일반적인 경우는 아닌 모양이구나?"
"음.. 천기를 읽는 과정에서 조금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사이 현실에선 별다른 일이 없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무사히 돌아온 것 같고 그 사이에도 별일 없던 것 같으니 이제 안전..
"그래서 내 운명의 상대는 본 건가?"
-덜컥
'..아.'
아직 제일 중요한 게 남아있었다.
어떻게 보면 앞선 일들보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마무리가.
"..."
-삐질삐질
'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무사히 돌아갈 수도, 베드엔딩으로 직행 할수도 있는 순간이다.
머리를 빠르게 굴려 대답의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우선 솔직하게 말하는 건 탈락이다.
'제가 사실 당신의 운명의 상대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꼴인 것도 문제였지만 내가 싫다.
저쪽이 기분 나빠해도 문제. 마음에 들어해도 문제인 절대 피해야 하는 선택지.
그 다음은 못 봤다고 대답하는 것.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다.
점 보는 중에 사고가 있어서 원래 읽으려고 했던 천기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미안하다. 대충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면..
"대답이 꽤 오래 걸리는구나. 정리할게 많은 모양이지?"
"ㄴ,네?"
"그대가 쓰러져있는 동안 혼자서 제법 오래 기다려서 말이야. 기다린 만큼 재밌는 답변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싱긋
천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하하.."
마치 내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미리 퇴로를 차단해버리는 모습에 속으로 욕을 삼키며 이번 선택지도 폐기했다.
그러면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
"...키가 훤칠하고 건장해 보이는 청년이었습니다."
"음?"
바로 거짓말이었다.
"긴 백발을 가지고있었고 무공을 익힌 몸인지 꽤 건강해 보였습니다. 얼굴도 잘생긴 청년이었고요."
나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신체조건.
하늘이 무너져도 저 조건에서 나를 연상시킬 수 있을만한 단서는 없을 거다.
완전히 정 반대되는 조건들로만 급하게 생각해서 내뱉은 변명이었으니까.
키가 크지도 않고 건장하지도 않고 머리도 짧고 검은색에 유약한 외모니 만약 내 외모를 들키는 일이 있더라도 그게 나라곤 생각 못할 거다.
"..그런 조건을 가진 이는 살면서 본 적이 없다만."
"나중에 만날 수도 있죠. 새로운 인연이 좋은 인연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으음.."
"뭐, 천기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하니까요. 정 마음에 걸리시면 그냥 흘려듣고 잊으시면 됩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결국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니까요."
-삐질삐질삐질삐질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뻥카를 쳤다는 걸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목소리를 조절했다.
진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들키면..
'진짜 끝장이야.'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을 보게 되리라.
그 상대가 사실 나라는 것까지 들킨다면 더더욱.
"사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다만.. 본녀가 그런 취향이었나.."
"아하하. 원래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겁니다."
"외모보다는 성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서 말이지."
"...네?"
"만일 반려를 가진다면 취미가 맞고 같이 있으면 재밌는 사내로 삼고 싶다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묘하게 나를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텐데 이게 괜히 찔린다고 해야 하나.
'..이거 진짜 유혹하는 거 아니겠지.'
현실에선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천기 안에서 겪었던 일이 워낙 강렬해서 저게 장난인지 진짜 내가 마음에 들어서 유혹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어쩌다가 지뢰를 잘못 밟아서 천마의 이상형에 딱 들어맞아 버렸을지도 모르고..
'..얼굴만 가리고 있으면 안전한 거 아니었나.'
실제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인을 3명이나 만들어버린 전적이 있으니 마냥 아닐 거라고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아까 그 안에서 당했던 일이 떠올랐는지 눈치도 없이 또 몸을 일으키려는 제 2의 자아도 컨트롤해야 해서 아주 죽을 노릇이었다.
사방이 지뢰밭인 곳에서 출구를 찾는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한 발자국. 하다못해 숨 잘못 쉬는 것 만으로도 크게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마음 같아선 이제 봐줄 것도 다 봐줬으니 돌아가 보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방이 지뢰밭이니 섣불리 움직이기 어려웠다.
차이가 있다면 지뢰찾기 게임은 숫자로 알려주기라도 하지 이건 진짜 내 감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거고
게임에 걸린 게 라이프가 아니라 내 진짜 인생이라는 것 정도가 있었다.
어느쪽으로 걸어야 안전할지. 하다못해 덜 위험할지 고민하며 점점 머리가 하얗게 변해가던 그 순간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돌아 가봐야 하지 않겠나?"
"에?"
구원의 동앗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려왔다.
"원래도 마지막으로 점을 봐준 뒤에 떠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예상 못한 사고가 나서 시간이 제법 지체되지 않았나. 돌아가야 할 곳도 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아, 아뇨?! 맞습니다! 가야 해요!"
"헤어지려니 조금 아쉽기야 하구나. 간만에 마음에 드는 술벗이었는데 말이지."
"저, 저도 아쉽네요."
"다행이구나. 그러면 다음에 또 오면 되겠어."
"네! 그러면 되겠네요!"
......................어?
* * *
신교의 군사는 무면금귀가 떠나간 뒤 혼자 남아있을 그들의 교주의 방으로 찾아왔다.
항상 무료하게 그녀의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그녀가 거의 처음으로 외부의 인물에게 관심을 가진 일이었다.
그리 마음에 드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와의 만남으로 그녀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기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수십 년 간 나태한 그녀를 지켜보며 지칠대로 지친 그였으니까.
-똑똑
"교주님을 뵙습니다."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듯 탁상에 반쯤 고개를 묻고 이미 빈 술잔을 손으로 굴리는 모습만 보일 뿐.
"...교주님?"
"아. 왔나."
"만남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굉장히 마음에 들었네. 단지.."
-데구르르
방 곳곳에 널부러져 있는 술병이 그녀의 발치로 굴러왔다.
"...또 기다리기가 참 힘들어서 말이야."
"...뭘 기다리십니까?"
"다음에 또 오기로 했거든. 반년 이내에."
"...그렇습니까."
그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또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보아 다행히 만남이 좋게 풀렸다고 생각했다.
"괜찮다면 어땠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재밌는 자였네. 술벗으로서도 괜찮고 단순히 말벗으로도 꽤 괜찮은 상대야."
"벗입니까.."
감히 점쟁이 따위가 그들의 교주와 벗을 맺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긴 했지만 그것이 그녀의 뜻이라면 따로 무슨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라도 좋으니 그녀가 변하길 바랄 뿐.
그리고 그의 그런 오랜 기다림이 보답 받은 것일까.
"...간만에 바깥 구경을 좀 해봐야겠어."
"?!"
그녀가 굉장히 오랜만에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려고 하십니까?"
"북해빙궁. 들려서 확인해봐야 할 일이 생겨서 말이야."
"...그 점쟁이와 관련된 일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네."
그녀는 술이 반쯤 담긴 잔을 돌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곳에 있다면 그와는 관련 없는 일이 될 테고. 아니라면 그와 관련 있는 일이 될 테지."
"...그렇습니까?"
"본녀는 거짓말쟁이를 싫어하거든."
-오싹
잠깐이지만 그녀의 눈에 스쳐 지나간 살기.
"미심쩍긴 하지만 우선 한번은 믿어줘야 하지 않겠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어쩐지 계속 있으면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그 또한 바쁜 몸이었기에 물러나 보려고 했던 찰나 그녀가 그를 제지했다.
"아, 잠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입니까?"
이래 보여도 신교의 군사로서 수많은 지식과 병법을 공부한 몸.
웬만한 질문들은 순식간에 대답할 수 있..
"최근 중원의 미의 기준이라는게 바뀌었나?"
"...예?"
아무리 그라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질문을 들었다면 대답해줘야 하는 게 신하의 도리.
"...특별히 그런 일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으음.. 역시 그렇겠지."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하도 중원을 멀리 했다 보니 그 사이에 미의 기준이라도 바뀌었나 했네."
"어디가 흉한 얼굴이란 말이냐."
군사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교주의 기운 있는 모습이었기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