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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166화 (166/250)

[166화] 10장-취중진담

"그래서 한번 손 봐주고 돌려보냈더니 이번에는 아예 무리를 이끌고 왔더라고요. 아주 제대로 준비를 하고 왔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뭐.. 그래봤자 무공도 제대로 안 익힌 길거리 왈패들이었고.. 제 지인한텐 한주먹거리도 안됐죠. 다들 평생 죽만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다음에서야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관에 넘기지는 않았나? 그 정도라면 충분히 옥에 집어넣을 수 있을텐데."

"어차피 막장인생인 것 같아서 안 넣어도 살기 힘들 것 같더군요. 옥에 갇혀도 밥은 주지 않습니까. 바깥에선 먹을 것 구하기도 힘들 겁니다."

"그런가."

잔뜩 쫄은 상태로 시작한 내 경험담은 예상 외로 꽤 괜찮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냥 평범하게 점집을 운영하던 시절에 있었던 조금 특별했던 일들만 말해주는 것 뿐인데 꽤 재밌다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렇게 심심했나?'

하루 종일 이 방 안에서만 지내는 그녀에겐 겨우 이 정도 이야기도 꽤 재밌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각색이나 과장을 조금 보태긴 했지만 그렇게 까지 신기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다행이다.'

혹시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바로 목이 베이는 거 아닐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왠지 옛날에 동화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봤던 것 같긴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넘어가고

'이대로 적당히 맞춰주다가 받을 거 받고 돌아가야지.'

어쨌든 지금 내 최우선 목표는 무사귀환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눈앞의 천마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고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비위 잘 맞춰주고 해달라는 것만 해줘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

"재밌는 이야기에 꽤 재주가 있구나. 그동안 전해듣던 심심한 이야기에 비하면 훨씬 재밌어."

"하하.. 이래 보여도 입으로 먹고사는 입장 아닙니까."

"내가 원하던 건 이런 이야기였는데 군사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심심하기 짝이 없었지. 어디 지역에서 신동이 나타나서 몇 살에 비무대회에서 우승했다니.. 그게 뭐가 재밌는 이야기란 말이냐."

-꿀꺽 꿀꺽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술을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 채로 들이켰다.

술이 얼마 남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지만 여자치고 꽤 터프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자세가 상당히 흐트러진 상태라서 살이 노출되는 면적이 많은 상황이었는데 저렇게 행동하니 점점 더 눈 둘 곳이 없어진다는 게 문제였지만.

'마음 놓고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아무리 자기가 그냥 대놓고 노출하고 있는 상황이라지만 대놓고 빤히 쳐다볼 순 없었다.

그렇다고 눈을 돌리기에도 솔직히 아까운 장면이고

'남자라는 게 눈을 돌린다고 돌려지는 게 아니라서요!!'

의식하고 보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눈이 그쪽으로 향한다.

애인이 있는 것도 모자라서 3명이나 되는 마당에 다른 여자한테 한눈파는 게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지만 이게 진짜 어쩔 수가 없다.

부처님한텐 죄송하지만 소림에 있는 승려를 데려와도 솔직히 저건 볼 거라고 생각한다.

까놓고 말해서 유뷰남이라고 야동을 안보는 건 아니..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깜짝!

"예, 예?!"

"왜 그렇게 놀라나.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나?"

"아..하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하다가 그랬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그렇게 남용할 필요는 없네."

-쪼르륵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슬슬 배부른데.'

물배도 아니고 술배가 차오르고 있는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더 넣을 여력이 있었다.

아까 잠깐 오싹했던 것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필름이 끊길 것 같지도 않고..

'에라이.'

어차피 여기 아니면 먹지도 못하는 술. 주저할게 뭐 있나 하며 그대로 들이켰..

"그대 애인은 있나?"

"푸크흡?!"

"이런.."

"푸흡.. 케헥.. 죄, 죄송.. 쿠흑.."

"자자,  우선 진정부터 하게."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들은 탓에 코로 역류해버린 술에 괴로워하는 사이 천마가 건네준 천으로 얼굴을 닦았다.

"후우.. 후우우.."

"이제 좀 진정이 됐나?"

"죄, 죄송합니다. 제가 진정하지 못하고 그만.."

"무얼. 별 생각 없이 마시고 있는 도중에 그런 질문을 한 내 탓도 있으니 신경은 쓰지 말게."

"아, 아닙니다. 제가 조절하지 못한 탓이죠."

"뭐. 누구의 잘못인지는 제쳐두고. 나는 답변이 궁금하다만? 그리고 여기도 묻었군."

천마는 내 대답을 재촉하면서 손을 뻗어 천으로 내 볼을 닦았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대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애인이 있냐고?'

그런 의미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남녀간의 술자리에서 애인이 있냐고 물어보는 상황이라니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너무 크지 않은가.

아마 정말 순전한 궁금증으로 물어본 것이리라.

지금까지 본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호기심이 꽤 많은 것 같으니 남의 연애사도 궁금한 거겠지.

..천마씩이나 돼서 남의 연애사가 궁금한가 싶긴 하지만

"예. 있습니다."

"호오."

우선 순순히 대답하자 그녀는 흥미롭다는 표정과 함께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자식은 있나?"

아니 갑자기 진도를 너무 나간 거 같은데!

"...아직 혼인도 안 올린 몸입니다."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닌가 보구나."

"그 정도 사이.."

잠시 당아영, 여소천, 검후님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정도로 몸을 섞었으면서 결혼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면 욕먹는다.

근데 그렇다고 스승님이니 멸망이니 그런 거 때문에 혼인은 미루고 있다고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이야기도 복잡하고 길어지니까..

"뭐.. 대충 그렇습니다."

대충 그렇게 때우기로 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셨습니까?"

"아아. 별 거 아니네. 그냥 그대에게 돌아가야 할 곳이 있나 궁금해서 그런 것 뿐이니."

아 그렇구나.

내가 돌아갈 곳이 있나 물어보려고..

"...네?"

"그대가 해주는 이야기들이 꽤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그대가 괜찮다면 계속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다만.."

-싸아

갑자기 주변의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주변이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고 시야가 좁아지며 청각은 차단된다.

아까부터 창문 바깥에서 불어오던 사긋한 바람 스치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덜덜덜덜

'...루트를 잘못 밟았나?'

아무래도 말을 너무 잘해줘서 문제였던 모양이다.

그냥 적당히 재밌었으면 보내줬을 거 같은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계속 붙들고 있으려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앞으로 내 집은 마교 지하실인 것 같..

"애인이 있다면 돌아 가봐야 하지 않겠나?

"에?"

다시 시야가 밝아지고 귓가로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천마는 여전히 속내를 알기 힘든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 있나?"

"아, 아닙니다..?"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계속 머물러도 된다만?"

"아, 아닙니다! 가봐야 합니다!"

"그렇겠지. 돌아가지 않으면 애인이 가슴 아파하지 않겠나?"

...이건 협박일까 장난일까.

특유의 미소 때문에 표정으로 감정을 읽는 게 쉽지 않은 데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저게 나를 협박하려고 하는 건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방금도 말했지만 본녀는 그대가 꽤 마음에 들었네. 계속 곁에 두고 매일 주도를 즐기며 취중진담을 나누고 싶은 심정이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즐기려니 심심해서 가끔 억지로 교인들을 불러서 잔을 나누곤 했었지. 장로들이라거나.. 최근 제법 훌륭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이들도 불렀었지만 제대로 주도를 즐기는 이는 없더군. 감히 그럴 수 없다며 본녀의 잔도 채워주지 못하는 이들하고 무슨 주도를 즐긴단 말이냐."

'...그럴 거 같은데요.'

나야 외부인이니까 그나마 그런 상하관계에서 자유롭다고 하지만 교인에게 그녀는 교주 아닌가.

같이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는 것도 부담스러워 죽을텐데 거기서 뭘 더 원한다고.

"순순히 즐겨주는 것 같아도 속으론 어떻게든 정진할 실마리를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는 속내가 가득하니 술맛이 좋으려다가도 뚝 떨어지게 되지. 대화를 하려고 하면 결국 가르침을 내려 달라는 결론으로 향하니까 말이야. 본교의 교인으로서 기특하긴 하지만 주도를 즐기려고 부른 입장에선 마음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더군."

'...그것도 당연할 거 같은데요.'

아니 교인 입장에서 설마 교주가 불러서 술 한 잔 하자는데 그게 정말 술만 먹자는 이야기인 줄 알겠냐고.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거라 생각할 테고 특히 깨달음에 환장한 무인들이니 기회가 있을 때 가르침 한마디라도 더 들어보려고 목을 메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무인이었어도 당연한 마당에 힘을 숭상하는 마교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대는 참 마음에 들어.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이라 그런지 내게 가르침을 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금품에 대한 욕심이 과한 것 같지도 않고. 술도 잘 즐길 줄 아는데다 대화도 잘 해주는 이상적인 술벗이네. 특별히 내게 원하는 게 있어 보이지도 않고."

...대가는 이미 눈호강으로 충분히 받고 있다.

굳이 원하는 게 있다면 무사히 돌려보내주는 것 정도.

'..흰색.'

뭐가 흰색이냐는 질문은 받지 않겠다.

"그래서 계속 곁에 두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는데.. 욕심인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저렇게 말하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냐.'

마음이 무겁다.

그냥 잘 대접해주면 무사히 돌려 보내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된걸까.

물론 나도 무서웠다는거 빼면 즐거운 술자리였지만 그렇다고 마교에서 계속 지내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

'후우..'

지키지 못할 말을 꺼내면 안되지만 지금 상황을 가장 무난히 넘길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다음에 또 방문하겠습니다."

"호오?"

"거리가 멀어서 오는 게 쉽진 않겠지만.. 저도 즐거운 술자리였던 만큼 언젠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여기서 틈을 주면 언제 올 거냐고 물어볼 기세라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새로운 화제를 꺼내기로 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저도 한 가지 선물을 드릴까 하는데.."

아무리 천마라고 해도 안 궁금할 수가 없는 화제.

"혹시 운명의 상대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꿀꺽

이것만 봐주고 집으로 튄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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