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10장-예고
-스륵 슥
온통 책과 기록물로 가득 차 붓을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오는 방 안.
-푸드덕
천마신교 안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방의 창문으로 발에 쪽지를 매단 전서구가 날아들어 왔다.
한참 붓을 움직이던 군사는 몸을 일으켜 전서구의 쪽지를 푼 뒤 옆에 놓아둔 육포를 두어 개 집어 전서구의 입에 물려주며 쪽지를 펼쳤고
"...후우우."
쪽지를 내려놓으며 안도의 감정이 담긴 한숨을 쉬었다.
그 내용은 일전의 섬서의 점쟁이가 서신을 받았으며 이쪽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혹시 무시하거나 그대로 잠적이라도 했으면 곤란했을텐데 다행이었다.
간만에 교주님이 관심을 보이신 외부인이니 만일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무력을 동원하는 것도 고려했었는데 평화적으로 나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조금은 아쉬운 면도 있군.'
어쩌면 정말 무력을 동원해 억지로 그를 끌고 오고 그 일을 계기로 교주님의 마음을 돌려 중원으로 그 발길을 향하게 만들 가능성도 기대해 볼 수 있었겠지만 금방 마음을 접었다.
그랬다가 시키지도 않은 괜한 짓을 했다고 하실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아니, 쓸데없는 관심을 극도로 귀찮아하는 그 성격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가 제 발로 온다는 것 같으니 이젠 어찌 됐든 좋은 이야기였지만.
-탁탁
'섬서에서 이곳까지.. 상당히 걸리겠어.'
절정 수준의 무인이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치더라도 몇 주는 걸릴 것이다.
고작해야 점쟁이가 그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테니 못해도 두세 달은 걸릴 터.
마교까지 오는 것도 일일테니 동선을 파악한 뒤 미리 사람을 보내 마차를 마련해 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교주님에게 알려드려야겠군.'
마침 교주님을 뵈러 가던 차였으니 시간도 맞는다.
교주님에게 보고할 내용들을 챙겨 교주님의 처소로 향한다.
어차피 귀 기울여 들으시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신교의 위계가 무너진다.
나는 어디까지나 군사인 몸. 신교의 모든 결정은 교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 가야 한다.
비록 교주님이 신교에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똑똑
"교주ㄴ.."
"들어오거라."
"..실례하겠습니다."
-끼익
이제 이름과 직급을 밝히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듯 바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왔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늘 그렇듯 교주님은 이쪽에 눈길만 살짝 보내며 손에 들고 계시던 술을 마저 홀짝이실 뿐이었다.
한때는 일부러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시는 것 아닐까.
사실 우리도 모르는 곳에서 수련을 하고 계시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애당초 그녀가 이 이상 수련이 필요한 경지인지조차 자신은 헤아릴 수 없었지만.
"이제 들어올 때마다 절 하는 것도 그만 두는 게 어떤가. 그대도 슬슬 몸을 신경 써야 하는 나이 아닌가."
"명하신다면 받들겠습니다만.."
"되었다. 하려고 하던 이야기나 해보거라."
"네, 우선.."
늘 하던 대로 신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다 마지막에 그 점쟁이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일전에 말씀하셨던 그 점쟁이가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가."
대부분의 대답을 관심 없다는 듯이 단답식으로 끝내는 그녀였지만 이번엔 뒤에 또 다른 말이 이어졌다.
"그러면 얼마나 걸리는 거지?"
"...!"
"모르나?"
"아, 아닙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아마 3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3개월이라.."
"아, 아무래도 섬서부터 이곳까진 거리가 있다 보니.."
"으음.. 괜찮은 술 벗을 찾았다고 생각했거늘.."
"예?"
"되었다. 알았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 보거라. 다음에 소식이 있다면 그때 다시 오거라."
"...알겠습니다."
굉장히 오랜만에.
아니 사실상 거의 처음 보는 듯한 교주님의 아쉬워하는 표정을 뒤로 한 채 물러난 뒤
그 점쟁이가 이미 신교의 영역에 근접했다는 소식을 접한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 * *
책도 슬슬 재밌는 건 다 읽고 흥미가 떨어져가던 상황.
무료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제법 괜찮은 놀이를 발견했다.
[당신은 던전에 들어갔습니다. 어두컴컴한 길을 손에 든 횃불에 의지하며 걸어가던 중 당신은 저 멀리 검은 형체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일단 검을 뽑고 공격하기 전에 말을 걸어볼게요.'
[당신은 그것을 향해 말을 걸었고 그것은 당신을 발견하고 그와 동시에 당신도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민첩 판정하겠습니다. 주사위 굴릴게요.]
-또륵
[83]
[당신은 슬라임에게 기습 당했습니다. 방어 판정하겠습니다. 주사위 20. 당신은 무사히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HP는 닳지 않았습니다.]
지구에서 TRPG라고 불리는 놀이인데 제법 할만 했다.
플레이어가 나밖에 없는 탓에 TRPG라기보단 사실상 주사위 굴리는 말로 하는 rpg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어딘가.
저 드럽게 재미없는 책들을 읽는 것보단 훨씬 재밌었다.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당신은 슬라임을 물리친 뒤 마저 던전을 탐사했고 그러던 중 함정에 빠졌습니다. 끈적한 촉수들이 당신의 옷을 벗기..]
'스탑.'
[시, 실제로 있던 던전이에요! 제가 성녀 견습생이던 시절에 직접 탐사했던 던전이 모티브라구요!]
'그쪽이 당했다고 저까지 더럽히지 말라고요.'
[아. 그때 전 촉수가 몸에 닿기 전에 전부 불태웠답니다.]
'어쨌든 의도가 너무 투명해요. 재구성해줘요.'
[우우..]
이렇게 가끔씩 게임 장르가 야겜으로 변하려 한다는 게 문제였다.
던전에서 에로트랩이 나오질 않나. 갑자기 여관에 서큐버스가 쳐들어오질 않나. 영입했던 엘프 동료가 자기네 마을로 납치하려고 하질 않나.
'아니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지만 그래도 성녀 아니세요? 어째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하시는 거 같은데.'
[세상에 남자가 없어서 망하게 생겼는데 성녀고 뭐고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뭐 성녀면 그런 생각도 욕망도 품으면 안돼요?! 저도 여자거든요?! 저도 야한 거 좋아하거든요!]
'틀렸어 이 사람. 이미 성녀 실격이야.'
[용사님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책임져주세요..!]
아니 내가 뭘 했는데.
그리고 저 정도면 중증인 것 같은데 좀 휴가라도 갔다 오세요. 좀 무서울 지경이니까.
[독백으로 하셔도 다 읽어지니까요..!]
'히익.'
[그리고 휴가라고 하셔도 갈 곳도 없어요. 저한테는 이렇게 하루 종일 용사님만 지켜보는 게 휴가에요. 365일 24시간 봐도 질리지 않는답니다.]
'아니 좀 질려요 그 정도면!'
무서워!
농담이 아니라 진짜 무서워 이 정도면!
대체 내가 뭐라고 저렇게 까지 하는 건데!
[넘어오시겠다고 게약서 써주시면 잠깐 휴가 정도는 갔다 와드릴 수 있어요..!]
'아. 그냥 계속 보세요.'
[어째서!]
배신감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성녀님을 보며 화면을 꺼 통신을 끊었다.
'결국 오늘도 이런 결론이네.'
성녀님이랑 좀 대화를 하다 보면 항상 끝은 이런 식이었다.
어떻게든 건수를 물어서 저쪽 세계로 끌고 오려고 하는데..
'..당장 지구로 가는 것도 고민하는 판에.'
성녀님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나에게 성녀님의 세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여러가지 일이 있긴 했지만 당장 부인이 3명이나 생기게 생긴 판이고
아직은 산속에 계시지만 곧 나와서 나를 쫓아오실 스승님도 계신다.
예전엔 그렇게 떠나고 싶어했던 세상이지만 지금은 나름 적응도 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사는 게 옛날만큼 힘들지도 않은데다 저런 인연을 만들어버렸으니..
'에휴.'
이래서 연애는 하기 싫었는데.
괜히 인연을 쌓았다가 나중에 헤어질 때 힘들어지거나 마음 약해져서 못 돌아갈 까봐 괜히 깊은 인연을 쌓고 싶지 않았던 거였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
성녀님의 말을 들어보면 차원 이동이 여러 명이 가능할 정도로 쉬운 일도 아닌 것 같고
겨우 나 좋자고 이미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다른 세계로 가자고 할 만큼 독하진 못했다.
나한테나 지구가 고향인 거지 그사람들한테는 여기가 고향이니까.
지구로 귀환하는 것도 이러는 판에 멸망해가는 판타지 세계?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세상 구하자고 나 하나 희생할 정도의 위인이 아니다.
심지어 죽는 것도 아니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정액싸개로 살아야 하는 삶을 살 정도는 더더욱.
나는 지금 부인들 감당하는 것도 벅차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한숨을 쉬세요? 무슨 일 있어요?"
"들렸어요?"
"엄청 쉬시던데. 몰랐어요?"
고민하느라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던 모양이다.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요."
"뭐, 복잡할 것 같긴 하네요. 그 마교로 제발로 들어가는 기분이라. 저도 옛날엔 그랬었죠."
"..."
지금 내가 그거 때문에 복잡한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저것도 복잡하긴 마찬가지긴 했다.
내가 안 가면 천마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니. 그런 가정을 하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너무 불안해 하진 마세요. 계속 불안해 하면 그게 현실이 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유능한 점쟁이신데 본인 미래도 확 읽어버리세요."
"원래 점쟁이들은 자기 미래는 못 읽어요."
"...진짜요?"
"그럴 수 있었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나요."
그 여소천도 본인의 미래는 못 읽는다.
그녀가 못 읽는 거면 다른 사람들도 다 못 읽는다고 봐야겠지.
"저기 그러면.. 혹시 제 미래는 어떻게 안될까요?"
"...뭐가 궁금하신데요?"
"제물운도 궁금한데.. 일단.. 연애운부터 좀.."
"..."
최소 30살까지 노처녀로 산다는 점괘가 나왔지만 곧 좋은 인연을 만날 거라고 해줬다.
가끔은 하얀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