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160화 (160/250)

[160화] 10장-상인

-다그닥

여소천과 헤어진 뒤 나는 상인의 마차에 타 마교행을 시작했다.

시간이 단축되긴 했지만 몇 주 정도는 지루하게 마차를 타고 다녀야 하기에 그동안 읽을 책이라도 근처에서 사왔지만..

"...이걸로 버티기엔 길겠죠?"

"다 읽으시면 말하세요. 제가 읽던 거라도 드릴 테니."

"그쪽도 있어요?"

"사람이 몇 주 동안 다른 사람이랑 대화 한마디 못하고 허허벌판만 보는 걸 몇 년 동안 하다 보면 미치기 시작하거든요.."

"...아."

"완전 허허벌판은 아니고 그래도 가끔씩 뭔가 나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별로 없는 땅이니까요.. 마을도 별로 없고.."

나는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그녀의 눈을 보며 말없이 애도를 표했다.

"반쯤 억지로 체결된 계약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사람이랑 같이 다니니까 좋네요. 이렇게 마차 타고 가면서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도 얼마만인지.."

"...동료를 만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저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네요! 비슷한 처지 사람을 찾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문제죠!"

"비슷한 처지요?"

"네. 원래 마교랑 연관 없던 사람을 이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잖아요? 언제 등을 칼로 찌른 뒤 무림맹에 팔아넘길지 모르는데."

...하긴.

그렇게 들으니 마교랑 거래하는 것도 마냥 쉬운 일 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그냥 평범하게 중원에서 장사하는 게 훨씬 낫지 않아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자고로 상행이란 위험이 클수록 얻는 것도 많은 법이거든요. 남한테 들키면 큰일 날 뿐이지 지극히 상인의 관점으로만 봤을 땐 마교만한 거래 상대도 별로 없어요? 값 하나는 정말 잘 쳐주는 데다가 중원에서처럼 장사할 때 신경 쓸 게 많지도 않거든요."

"...그래요?"

"어느 지역에 무슨 작물이 많이 자랐는지.. 어느 지역에 재해가 일어나서 뭐의 가격이 올랐고 내렸는지.. 그런 걸 다 신경 쓰고 상행을 해야 손해를 안 보는데.. 그게 말처럼 쉽나요.."

그러고 보니 옛날에 알던 상인들이 그거 가지고 골머리를 썩는 걸 보긴 봤었다.

상인은 그냥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선 머리를 써야 하고 그러다가 삐끗하는 순간 쫄딱 망한 뒤 빚더미에 올라 인생 망치는 것도 한순간이다.

점집을 운영할 때 그런 인간들 때문에 나도 제법 고생했던 기억도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짓도 마냥 못할 짓거리도 아니란 말씀. 들키지만 않는 한 마차 몰면서 물건만 가져다 주는 것 만으로도 웬만한 상인보다 훨씬 잘 버니까요."

"대신 들키면 죽는 거 아니에요?"

"...사실 안 그래도 전에 망한 것 때문에 빚이 있어서.. 이렇게라도 벌어야 죽기 전에 갚을 수 있어요.."

"저런.."

"너무 늦기 전에 결혼도 해야 하는데.. 누가 빚 있는 여자랑 결혼해주겠어요.. 뭐든지 해서 빨리 빚부터 갚아야.."

상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힘이 빠졌는지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 사람도 나름 인생이 고달픈 사람이었구나.

마교와 거래하는 사람이니 특별한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뭔가 생각보다 현실적인 이유라서 조금 놀랐다.

그렇게 잠깐 측은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별 말을 못하고 있던 도중

"그런데 그쪽은 어쩌다가 마교에 불러가시게 된 거에요?"

"저요?"

"여기서 제가 대화를 나눌 사람이 당신밖에 없는걸요."

갑자기 내 처지에도 관심이 생겼는지 내게 마교로 가는 이유를 물어왔다.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말하기 곤란하시면 안 하셔도 돼요. 저는 그냥 데려다 주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아뇨 곤란한 건 아니고.. 음.. 너무 유명해서 불려간다고 해야 하나.."

"..."

마차를 몰던 상인이 굉장히 재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아니 그렇지만 사실인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애초에 유명하지 않으면 마교에 불려갈 일이 얼마나 있다고.

"뭐 그냥 가서 점 좀 봐 달래요. 정확히 어떤 걸 봐달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점이요?"

"점술 아시죠? 그 대충 목패 몇개 쉬릭 쉬릭 한 다음에 미래 읽어주고 하는 거요."

"네.. 알긴 아는데.. 그거 순 사이ㅂ.. 흡!"

상인은 말하다 말고 말 실수라도 한 것처럼 손으로 입을 틀어 막고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 점술이 사이비라고 해서 내가 불쾌해 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은데

"익숙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 그,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 있어요! 피풍의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데 신기하게 어떤 각도로 봐도 얼굴이 안 보인다는 점쟁이! 그, 그.. 별호도 있던데요! 무면.."

"무면금귀요?"

"아, 네. 그거요. 처음엔 상인 별호인 줄 알았는데 웬 점쟁이 별호라길래 의아했던 기억이 있네요."

"뭐.. 좀 그런 느낌이긴 하죠."

한참 저 별호가 붙여졌을 때의 나는 꽤 돈을 밝히는 성격이었으니 가장 큰 특징인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서 무면(無面)과 금귀(金鬼)가 붇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덕분에 나는 지금도 별로 안 좋아하는 별호이기도 하고.

"어, 어쩐지 금 거금을 선뜻 준다길래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 이상의 거물이셨네요?"

"..."

딱히 내가 번 돈은 아니긴 한데.

괜히 여기서 애인들한테 받은 돈이라고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빚 갚으려고 위험하게 일하는 사람 앞에서 남의 돈으로 사치 부리고 있다고 하긴 뭐했으니까.

"아 맞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들어봤네요. 몇 달 전에 어떤 점쟁이가 검후님의 목숨을 구해주고 다음 경지로 올라갈 실마리까지 얻게 해줬다고 해서 중원이 발칵 뒤집혔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당신이었죠 아마?"

"...잘 기억하시네요."

"기억 못 할 수가 없죠. 그래도 직업 상 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러고 보니 그 뒤로 소식이 뚝 끊겨서 누가 납치해간 거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었는데.. 설마 마교랑 연을 맺었을 줄이야."

"...네?"

"누구 만나러 가시는 거에요? 높으신 분? 대주? 장로? 혹시 교주님은 아니시겠죠? 아 교주님은 아무리 당신이라도 무리일려나요..? 무공 단련을 위해서 하루 종일 힘쓰고 계시느라 장로들도 고작해야 일년에 두 세 번 정도 뵙는다는 게 교주님이니까..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외부인을 함부로 만나주시진 않겠네요. 그러면 장로나 대주일텐데.. 유독 3장로님이 그런 쪽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뭔가 오해를 한 것 같다.

내가 무슨 마교랑 지속적으로 연을 맺은 것처럼 착각이라도 한 것 같은데

"저도 서신은 얼마 전에 받았고.. 이번이 처음 가는 거라서요."

"아.. 그래요?"

상인은 어쩐지 아쉬워하는 투였다.

"그러면 이번에 한번 가고 마는 거에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제가 거기서 납치라도 당하지 않는 한."

"..."

"...왜 말이 없어요."

"제 고마운 고객님들이지만 납치 가능성이 없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

지금이라도 차 돌리자고 할까.

"에, 에이 아무리 그래도 자기들이 불러 놓고 납치를 하겠어요? 괜히 남들한테 인식 망칠 일 있어요?"

"...더 망칠 이미지가 있던가요?"

"...에이! 밑바닥에도 밑바닥은 있는 법이잖아요! 그래도 그러면 다음부턴 누굴 불러도 아무도 안 올텐데 그런 위험부담을 지겠어요?"

"...저 정도면 질만 하지 않을까요?"

"...어, 음."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행운을 빌게요..?"

그 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없이 마차를 몰 뿐이었다.

* * *

"플로라 이것을 보거라!"

"...?"

소드 플로라.

과거에는 검화라는 별호로 불리던 그녀는 그녀를 부르는 바르슈타인의 말에 검을 휘두르다 뒤를 돌아봤고

"이 몸의 새 옷이다! 어울리느냐!"

난생 처음 보는 옷을 입은 채로 소매를 붙잡고 자신에게 팔을 벌려 보여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그 옷은."

"...안 어울리는가?"

"아니 어울리긴 하는데.. 옷이.."

정말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어딘가 중원식 복장이랑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다른. 적어도 자신이 생전에 중원에서는 본 적 없는 방식의 복장.

아니 이건 중원의 복장이라기 보단..

'바다 건너 사람들이 입는 옷 같은데..?'

지금은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이자 과거의 스승에게 가르침 받던 시절 그림으로 본 기억이 희미하게 있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원의 옷이 아닌 것 같은데?"

"음? 그런가?"

"어디서 구해온 거야..?"

"우연히 발견했는데 제법 괜찮은 디자인을 가지고 있길래 입어보았다. 이 나라의 복장이 아닌 건 방금 알았군. 내 눈엔 거기서 거기로 보여서 말이지."

바르슈타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옥좌에 기대듯이 앉았다.

그러고 보니 유독 바르슈타인이나 그 부하들은 중원의 분위기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이름이 한소연이라고 알려줘도 소연한이라고 멋대로 바꿔 부르는 녀석들도 자주 있었고..

바르슈타인이 나를 플로라라고 부르는 이유엔 그런 이유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한자는 발음하기 어렵다고.

'...내 입장에선 저 이름이 더 괴상한데.'

옥좌에 앉아 이상한 모양의 잔에 붉은 술을 따라 마시는 바르슈타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중원의 복장이 아니라는 건 지적해 줬지만 아무래도 갈아입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갈아입진 않을 거야?"

"전에 입던 옷은 이미 태워버렸다. 과거에 미련은 가지지 말자는 주의라서 말이지."

"태워버릴 필요까진 없지 않았을까..?"

"뭐, 그거랑 별개로도 어차피 불태울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슬슬 태양빛을 보러 나가야 할 때가 올 것 같아서 말이지."

"...!"

곧 지상으로 올라간다는 말에 검을 쥐고 있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죽어서 되살아난 뒤, 바르슈타인의 피를 받고 이 이상한 힘을 다루는데도 제법 익숙해졌다.

살아있던 시절의 강함과 비교해도 몇 배는 강해졌다고 자신할 수 있지만..

'스승..'

-까득

그 여자를 상대로는 아직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어릴 적 한참 무공의 성취가 빠르게 늘어 자신감에 차있던 시절에 스승님에게 졸라 그녀의 실력이 오롯이 담긴 검격을 본 적이 있었다.

보여주기 싫다는 것을 어린 시절 특유의 어리광으로 몇 번이고 졸라 간신히 볼 수 있었던 스승님의 검격은..

[-파사삭]

[자, 언젠가는 너가 뛰어넘어야 할 경지이니라.]

검을 한번 휘둘러 반대쪽 산에 있는 매화나무 위에 내려앉은 눈을 떨어트리는 묘기를 과연 지금 자신의 힘으로 재현 가능할까?

"..."

-까득

'아직..'

아직도 멀었다.

그 망할 여자의 손에서 유성이를 뺏어오기 위해선.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