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10장-협상
ㅎ아마 내 무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제정신으로 이런말을 하는건지 의문부터 들테지만 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이러는거다.
내가 미쳤다고 믿는 구석도 없이 덤비겠는가.
정면으로 싸우면 성인 여자도 간신히 이길까말까한 이 몸으로.
"혹시 설득할 자신 없으면 미리 말하세요. 어디서 가면이라도 구해올테니까."
"혹시 그 상인이라는사람 무인이에요?"
"일류 정도는 될걸요?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자신이 있어야 그런짓도 할테니."
일류라.
그정도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정면으로 덤비면 어림도 없겠지만.
"아 그리고."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면서 여소천을 따라가던 도중 여소천이 나를 돌아보더니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당신이 만나는 사람이 천마. 그 괴물같은 여자라면.. 가급적이면 그 여자의 천기는 읽지 마세요."
보기 드문 여소천의 진지한 표정이었기에 나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수가 없었다.
"..뭐 제가 보면 안되는거라도 있어요?"
"몰라요."
"네?"
"저도 모르고. 당신도 몰라요. 아무도 알지 못해요. 그 여자의 천기는."
"..."
무슨말일까 저건.
"자세히 설명드리기엔 저도 아는게 없어서 힘들지만 하나 확실한건 괜히 건드려서 좋을건 없다는거에요. 가만히 둬도 세상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홀로 방에 박혀있는 여자니까."
"아무튼 괜히 건드리지 말라는거죠?"
"네. 안 그래도 신경쓸게 많은데 그런 괴물이 중원에 풀려나는 것까지 생각하면.. 몸이 열개여도 모자랄테니까요."
제가 10명이어도 그 여자를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라고 덧붙인 여소천의 말은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천마가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로 말없이 한참 걸어가던 중
-멈칫
"다 왔네요. 저 사람이에요."
여소천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자 마차에 짐을 정리 중인 사람이 보였다.
꽤 순박한 인상의 젊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외모에서 추측되는 나이는 한 20대 초중반?
무인들은 대게 본래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걸 감안하면 그것보단 나이가 좀 더 있을 수도 있어 보였다.
"험악하게 생긴 그런 사람을 예상했는데 의외네요?"
"오히려 그러니까 더 역할에 어울리는 거죠. 원래 유능한 세작들은 오히려 평범한 외모의 사람들이 많아요? 미인계를 전문으로 사용한다면 모를까."
"그것도 그러네요."
겉으로 보기엔 꽤 순박해 보이는 인상이라 마교와 거래하는 상인이라는 이미지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는데 나도 여소천에게 듣지 않았다면 그냥 젊은 상인이겠거니 하고 말았을 거다.
"왜요. 또 여자랑 단 둘이 마차 타고 가려니까 설레요?"
"...저 사람이랑요?"
"쓸데없는 입을 늘리기 싫었는지 일행 없이 활동하는 것 같더라고요. 일류 정도면 그래도 어디 가서 비명횡사할 경지는 아니니 자신감도 충분했을 거고요."
질투심이 섞여 나오는 여소천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상인 여성을 쳐다봤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땐 제법 미인이긴 하지만..
-납작
'음.'
일단 확실한 건 내 취향은 아니다.
그리고 어디 까지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제법 미인이라는 거지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하늘을 뚫고 올라 가버린 내 눈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제 취향은 아니에요."
"...확실히 당신 취향은 아니겠네요. 안심해도 되겠어요."
"그거 저 사람한테 실례 아닐까요..?"
"..."
이 이상 대화를 이어나갔다간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대화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이상하게 탈 동양인급이 많아서 그렇지 오히려 저 정도면 중원에선 평범한 수준이다.
"...아무튼 이야기하러 가볼게요."
"...잘 해보세요."
하필 방금 나눈 대화가 저런 종류라서 태워 달라고 말하기 뭔가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쪽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조금 잔인해지기로 했다.
* * *
"안녕하세요 잠시 물건 좀 볼 수 있을까요?"
짐을 정리하고 있는 여성에게 평범한 손님인 척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 지금 물건은 납품하기로 한 데가 정해져 있어서.. 죄송합니다."
"에이 그래도 여분은 있을 거 아니에요. 척 보니까 양도 엄청 많은데."
"이게 다 납품해야 하는 거라.. 아.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차라리 다른 상인을 소개 시켜드릴게요. 저는 납품만 주로 해서 품질은 그쪽이 훨씬 좋을 거에요."
"저도 지금 정말 급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안될까요? 값은 시세의 2.. 아니 4배로 쳐드릴게요."
"...4배?"
마교와 거래한다지만 역시 상인은 상인인지 시가 4배의 유혹을 떨치기는 어려웠나 보다.
"흐흠.. 그, 그러고 보니 여분의 물건이 있긴 있네요. 잠깐 이쪽으로 들어와 보시겠어요?"
상인은 헛기침을 하면서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더니 마차 안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래서 찾으시는 물건이 뭐라고 하셨죠? 웬만한 것들은 있으니까 뭐든지 말만 하시면.."
그녀는 상품이 포장되어있는 상자를 열며 내게 등을 보였고 나는 소매 안쪽으로 들고 있던 밧줄에 힘을 풀었다.
'묶어.'
-휘리릭!
"꺅?!"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린 하얀 밧줄을 보며 확실히 포인트 값은 한다고 생각했다.
[신성한 밧줄]
[이교도를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죠! 우선 밧줄로 묶습니다! 그 뒤 호수에 집어 던집니다! 마땅한 호수가 없다면 적당한 깊이의 수조도 괜찮습니다! 이후 만일 밧줄을 끊고 나온다면 그것은 사이한 이교도의 힘으로 풀어낸 것이 분명하니 창으로 찔러 기름과 함께 불태워 죽입니다! 네? 못 풀면 어떡하냐고요? 괜찮습니다! 사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물고기였을테니까요! -한 이단심문관-]
살벌한 설명에 비해 그 효과는 간단했는데 바로 일정 능력 이하의 상대를 자동으로 포박하는 효과였다.
당아영과 확인해본 결과 절정 정도부터는 밧줄 혼자서 포박하진 못해서 먼저 사람이 제압을 해줘야 묶을 수 있지만 그 아래는 이 밧줄 혼자서도 충분히 제압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강도는 초절정의 고수라도 쉽게 끊을 수 없는 수준.
"소, 손님? 장난이 심하시네요. 이런 장난은 재미 없어요?"
여소천 정도 인물이 경지를 잘못 볼 리가 없으니 고작해야 일류에 불과한 무인 한 명 정도는 이 밧줄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제압이 가능했다.
그래도 괜히 일류 무인은 아니라는 걸까
밧줄이 포박하는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떨쳐내려고 했던 반응 속도는 확실히 일반인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래봤자 수백 포인트나 주고 사온 이세계의 물건을 무력화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자.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쪽을 공격하거나 해칠 의사가 없어요. 뭔가를 강탈하려는 생각도 없고요."
"뭐, 뭘 원하시죠? 전 그냥 평범한 상인.."
"마교랑 거래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
순간 당황한 표정이 아주 잠깐 얼굴에 스쳐 지나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무슨 그런 살벌한 말씀이세요! 그런 곳이랑 거래를 할 리가 없잖아요?! 아무래도 사람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전혀 모른다는 듯이 억울한 연기를 시작했다.
확신을 가지고 온 사람이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
"에이. 다 알고 왔는데 시치미 떼지 맙시다. 선수들끼리."
"그러니까 저는 손님이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지.."
"품속에 뭐 숨겨두고 있는 거 모를 줄 알아요? 아까도 꺼낼까 말까 고민하던데."
"!!"
아 참고로 이건 구라다.
그런 거 모른다. 본 적도 없고.
근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마교와의 거래라는 위험천만한 일을 하는 데다 일류 정도 되는 무인이 품속에 뭐 하나 안 숨겨두고 있을 리가 없다.
암기, 독. 언제든 쓸 수 있는 비상용 호신용품 하나쯤은 있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니까.
"그..으.."
그런 내 추측은 사실이었는지 점점 그녀의 포커페이스가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쯤에서 몰아붙이는 걸 멈추기로 했다.
"관이나 무림맹에 일러바치려는 거 아니니까 안심하시죠. 저도 도움이 필요해서 온 거니까."
"에?"
"사실 제가 이런 사람이거든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그녀의 앞으로 내가 마교에서 받은 서신을 내밀었다.
그녀는 서신 구석에 박혀있는 마교의 인장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표정에서 두려움이 옅어지고 안도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뭐에요. 동류였으면 동류였다고 처음부터 말을 하지. 괜히 겁먹었잖아요. 이대로 무림맹으로 끌려가서 꼼짝없이 고문 당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안 묶어 놓고 대화했으면 일단 시작부터 제 목 앞에 칼이 드리워져 있을 거라는 것쯤은 에상 가능하거든요."
"그건 맞지만.. 쳇. 뭐 무림에선 당한 쪽이 잘못이죠. 마교까지 데려다 주길 원하는 거 맞죠?"
"네. 잘 아시네요."
"알았어요. 데려다 드릴 테니 이제 이것 좀 풀어주세요. 반격도 안 할 테니까."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밧줄을 풀어달라는 듯이 몸을 돌렸지만
"제가 왜요?"
"...네?"
미안하지만 아직이었다.
"그쪽이 반격 안 할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죠?"
"아, 안 하겠다고 말했잖아요!"
"근데 그건 말 뿐이잖아요. 열 마디 뱉어서 열 한 마디가 거짓일 수 있다는 게 말인데 제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그건.. 후.. 어떻게 하면 믿어주실 건데요?"
"상인이라 그런지 말이 잘 통하네요."
여성은 뭐라 반박하려는 듯 하다가 체념하고 협상을 요구했다.
"뭐. 어려울 건 없어요. 여기에 서명만 해주시면 되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손을 펴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들어 올렸고
-퐁!
그 위로 나타난 종이 한 장을 여성에게 내밀었다.
"...을은 갑이 무사히 마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협력한다. 을은 갑에게 육체적, 정신적인 상해를 입힐 수 없다. 위 내용을 어길 경우 을은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어때요?"
"그.. 제가 서명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이게 정말 효력이 있어요..? 고작 계약 좀 어겼다고 그 자리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게.."
"혼자서 사람 묶는 밧줄도 있는 마당에 그런 계약서라고 없겠어요. 방금도 손 위에서 갑자기 나타났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또 납득이 가네요."
여성은 어딘가 꺼림찍한 표정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갑자기 나타나서 마교까지 안 데려다 주면 죽는다는 계약서를 쓰게 만드는 상황인데 그 누가 아무렇지도 않아할까.
"마지막 줄까지 읽으세요. 저도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니니까."
"...단 갑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 을의 능력을 뛰어넘었을 때는 예외로 한다. 그리고 위 계약이 만료될 때 갑은 을에게 금 50냥을 지급..?!"
"할 마음이 좀 드세요?"
"할게요!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자, 여기 지장 찍으시고. 엄지 내밀으세요."
묶여있는 여성의 손을 움직여 계약서에 지장을 찍자 계약서 주위로 푸른 불꽃이 튀어나왔다.
계약서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묶은 밧줄을 회수하고 마차 밖으로 몸을 빼내 멀리서 이쪽을 주시하던 여소천에게 엄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제 칭찬은요!]
그리고...
[용사니임!! 저도 칭찬!! 수기로 열심히 썼다고요!!]
'...알았어요. 잘했어요.'
[헤헤.]
...'평범한' 종이에 계약서처럼 글씨를 써서 1포인트로 전송해준 성녀님에게도 칭찬을 해줬다.
[참 잘했어요 도장 모으면 저번처럼 사진 찍게 해주시는 거죠?]
'...'
[후후.. 앞으로 9번만 더 모으면..]
나는 말없이 상점창을 닫아 통신을 끊었다.
더 들었다간 내 정신력 수치가 깎일 것 같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