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9장-기다림
어느새 도착한 당아영의 집 앞.
-삐질삐질
'...그냥 선물 살걸.'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괜히 멋진 말 좀 해보겠다고 그런 건데 생각해보니 그냥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에헤헤.."
"..."
평소 그렇게 틱틱대던 여소천이 저렇게 헤실헤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괜히 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여소천도 사가라고 했었는데 멋진 척 하지 말고 그냥 살걸 그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차피 저 상태도 길어봐야 내일 자고 일어나면 평소처럼 틱틱대는 성격으로 바뀌어있을 텐데 그 잠깐의 변화를 위해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을까?
-꼬옥
-물컹
'...걸 만하네.'
원래 남자라는 생물은 이 잠깐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는 바보같은 생명체다.
가슴은 언제나 옳다.
언제 또 여소천이 이런 서비스를 해준단 말인가.
"슬슬 들어가야 하니까 팔짱은 풀죠."
"네!"
'...진짜 여소천 맞지 이거?'
대체 뇌에서 도파민이 얼마나 뿜어져 나오고 있으면 그 사납던 여자가 이렇게 귀엽고 순종적으로 된 걸까.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 보기 귀한 장면인 만큼 마음 같아선 집에 들어가지 않고 이대로 더 보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미래의 나는 더 힘들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자제했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당아영이라 여소천의 이런 핑크빛 분위기를 보면 끝나고 바로 온 게 아닌 중간에 무슨 일이 더 있었다는 것 정도는 금방 추리해낼 것이다.
그러니까 여소천을 원래 상태로 돌려놔야..
"...들어가서 괜히 어색한 척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요."
"네!"
'에휴.'
그러긴 또 아까워서 그냥 조용히 하라고 했다.
눈치채면 뭐 그냥 큰일 나는 거지.
이미 거의 MAX치를 찍은 분노 게이지를 더 채워봐야 크게 변하는 건 없을 거다.
"들어가기 전에 잠깐 심호흡 좀 하고.."
"후우 하아.."
'...너는 왜 해.'
옆에서 나를 따라 심호흡을 한 여소천을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마음을 다잡은 뒤 문을 열었다.
-벌컥!
"소저! 저희 왔.."
당장 현관 앞에서 당아영이 덮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며 문을 열었지만 실제로 눈에 보인 광경은 내가 상상했던 것 중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소저?"
"없는 거 같은데요?"
"화장실이라도 갔나..?"
집안의 공기가 서늘하고 등불 하나 안켜져 있는 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당연히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무릎 꿇을 준비부터 하고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예상했던 것 중에는 없었다.
그래서 집 안을 두리번거리다 부엌에 불빛이 보이는 걸 발견했고 그쪽으로 가자
"...음식?"
"다 식었네요."
작은 등불과 함께 차려져 있는 식사가 보였다.
-부스럭
'쪽지..?'
그리고 접시 옆에 당아영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쪽지도 하나 있었는데
[기다리다가 졸려서 먼저 잘게요. 배고프실테니 드시고 주무세요.]
덕분에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당아영이 우릴 기다리면서 밥을 차려 놨는데 우리가 너무 늦게 와서 당아영은 그냥 자러 가고 식사는 그대로 남겨진 것.
-삐질삐질
'야, 양심의 가책이.'
당아영의 성격을 생각하면 조금 기다리다가 먼저 들어간 게 아니라 한참 동안 기다렸을 거다.
그런데 식사도 차갑게 식어있고 당아영이 쪽지까지 남기고 자러 갈 정도면 정말 한참 동안 기다렸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
그러는 동안 다른 여자랑 시장에서 데이트하면서 꽁냥거리고 있던 놈은 대체 뭐하는 쓰레기란 말인가.
아니 변명 좀 해보자면 어차피 그냥 가나 좀 농땡이피다 가나 바로 침대에 던져진 상태로 당아영의 분노를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배라도 채울 겸 그렇게 했던.. 건데
'이러면 내가 뭐가 돼..!!'
이렇게 식사까지 차려 놓고 기다렸을 줄이야.
심지어 그러다가 지쳐서 먼저 들어갔을 줄이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양심에 찔려서 그런지 옆에서 아직도 실실 웃고 있는 여소천의 시선이 왠지 나를 나무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네?"
"아니요.. 신경 쓰지 마세요.."
가슴을 부여잡고 차갑게 식은 식사를 바라봤다.
그 와중에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더 괴로웠다.
"그리고.. 일단 먹을까요."
"이미 뭐 먹고 오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거라도 안 먹으면 제 양심이 허락을 못해요..!"
"...?"
시장에서 뭘 먹고 오긴 했지만 배부르게 먹고 온 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거다.
따지고 보면 시장에서 먹었던 것들은 간식이었으니까.
-싸늘
'..식은 건 어쩔 수 없지만.'
지구였으면 전자레인지를 이용하면 됐겠지만 이 세계에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식은 상태로 먹..
"데워드릴까요?"
"어떻게요?!"
"삼매진화를 조금 응용해서 음식에 열기만 전달하면 돼요."
'그게 말하는 것처럼 쉬운 건 아니지 않나?!'
그냥 삼매진화도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그걸 응용해서 열기만 음식에 보낸다니
감히 그런 대단한 기술을 겨우 음식 데우는데 쓸 수..
"자요. 따뜻하게 드세요."
"와아."
있다.
원래 기술은 사람의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고등 기술이면 뭐 어떤가. 유용하면 됐지.
"그나저나 독봉 요리실력이 꽤 좋네요. 안 그럴 것 같았는데."
"의외죠?"
항상 신세 지고 있지만 당아영의 요리 실력은 아부가 아니라 정말 좋은 편이었다.
귀한 집안 아가씨라 손에 물도 안 묻혀봤을 것 같은 이미지와 달라 의외였는데 아마 손재주가 좋은 게 요리에도 반영된 거 아닐까 싶다.
나랑 동거를 시작한 뒤로 당아영이 본격적으로 요리 공부를 한 것도 있는 덕분에 지금 당아영의 요리 실력은 웬만한 객잔 못지 않았다.
과장 조금 보태면 외식 할 바에 당아영에게 부탁하는 게 나을 정도.
-달칵
"아 잘 먹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난 뒤 뒷정리를 하고 슬슬 자러 갈 준비를..
"근데 전 어디서 자면 될까요?"
"아."
그러고 보니 당아영이 지금 자고 있다.
원래 적당히 빈 방 하나 받아서 거기서 자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집 주인이 자고 있는 상황.
어느 방이 지금 청소가 되어있고 침대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죠. 제가 당아영 방에서 잘 테니까 제 방에서 자세요."
"당신 방이요..?"
"네. 사실 저도 대부분 당아영 방에서 자서 제 방에서 자는 일은 별로 없어요. 딱히 냄새가 나거나 하진 않을 거에요."
"쳇."
"...왜 아쉬워해요."
그렇게 여소천을 내 방으로 보내고 나는 당아영의 방으로 향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당신도요."
-쿵!
아마 자고 일어나면 지금 저 순한 모습도 끝이겠지.
'조금 아쉽네.'
-끼익
방문을 열자 침대 위에 당아영이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아영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침대로 다가가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당아영이 깨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은 가지만 미안한 마음에 그 정도는 각오하고 이불 안으로 들어온 거다.
기껏 기다려줬는데 혼자 자게 두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부스럭
"으응.."
-움찔!
그 순간 당아영이 졸음이 느껴지는 신음과 함께 살며시 눈을 떴다.
"당신이에요..?"
"저, 저 왔어요..."
"좀 늦었네요.. 기다리다가 먼저 잤는데. 차려 놓은 식사는 봤어요?"
"마, 맛있게 먹었어요."
"그러면 다행이고요.."
아직 잠에 취한 탓일까 당아영은 예상한 것과 달리 순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꼬옥
"아.. 그러고 보니 청뢰검님 방도 안내해 드려야 했었는데.."
"제 방에서 자라고 했어요."
"그러면 잘 했네요.. 수고했어요.."
-토닥토닥
당아영은 나를 끌어안더니 내 등을 토닥였다.
'...이게 끝?'
"화 안내요?"
"화요..? 왜요..?"
"제, 제가 너무 늦게 와서.."
"뭐 화낼게 있나요.. 다른 부인이랑 시간 보내고 온다는 데 그거 가지고 왜 화를 내요.."
-피식
당아영이 묘하게 졸린 기운이 남아있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당신을 좋아하는 만큼 다른 분들도 당신을 좋아할 테니까.. 어쩔 수 없죠 뭐. 저만 생각할 순 없잖아요?"
"..."
-꼬옥
나는 말없이 당아영의 허리에 감은 손에 힘을 줬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전부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고
"...오늘은 안 해도 돼요?"
결국 내 입 밖으로 나온 건 저 한마디였다.
"당신은 무슨 제가 머릿속에 교접 밖에 없는 사람인 줄 아세요?"
"..."
"...오늘은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하면 안돼요."
"...?"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그 성욕 넘치던 사람이 웬일로 거절..
"오늘.. 위험한 날이라서요.."
"어우."
그러면 안되지.
큰일 날 뻔했다.
그것도 모르고 해버렸으면 바로 애아ㅃ..
"...잠깐만."
그러고 보니 우리가 그동안 피임을 했던가?
아니 애초에 이 세계에 피임법이 존재하긴 하나?
-오싹
"소, 소저. 혹시 최근에 월경.."
"안 했냐고요? 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당신이 신경 안 써도 위험한 날에는 꾸준히 약으로 대비하고 있으니까."
"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물론 임신이 나쁜 건 아니고 생명 탄생이라는 거룩한 행위이긴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일렀다.
아직 결혼도 안 한 데다가 이 나이에 애 아빠가 되는 건..
'절대 안돼.'
준비가 된 뒤라면 모를까 마음의 준비도 없이 애를 가지는 건 절대 하면 안된다.
"...근데 왜 지금은?"
"...약재가 떨어졌어요."
"아하."
간단한 이유였다.
모르고 정사를 나눴으면 큰일 날뻔 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렇게 안도하고 있던 도중 당아영이 볼을 부풀리면서 말했다.
"쉰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약재가 도착하거나 기간만 끝나면 밀린 만큼 받을 테니까."
"...당분간 매끼 장어라도 먹어야겠네요."
"미리 사뒀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런 건 준비 안 해도 되는데.
"에휴.."
한숨을 쉬면서 몸을 움직여 당아영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포근한 압박감이 얼굴을 감쌌다.
참고로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다. 당아영도 이러면 가슴이 따뜻해서 좋다나.
'서로 좋은 거겠지..'
어찌 됐든 걱정하던 모든 게 풀리자 밀렸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검후님이랑 거사를 치룬 뒤 쉬지도 못하고 계속 다른 뭔가를 했으니까.
"...서방님. 그러면 아이는 언제 가질까요?"
"...일단 결혼은 하고 생각하죠."
"싫은 건 아닌 거죠...?"
"..."
"임신하면 유방이 커진다던데.."
"...묵비권을 행사할게요."
순간 혹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일렀다.
당장 마교에도 갔다와야 하고 뱀파이어들의 음모도 막아야 한다.
만약 가정을 꾸린다면 그건 모든 일이 해결된 다음에 하는 게 맞다.
...사실 내 몸뚱아리로 선택권은 없지만.
그렇게 당아영의 품속에서 잠들고 일어난 다음날
잠에서 깬 뒤 어차피 질내사정만 안 하면 된다는 걸 깨달은 당아영에게 아침부터 유사 성행위로 짜였다.
원래 성격으로 돌아온 여소천에게 그 장면을 들키고 아침부터 혼난 건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