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9장-반응
이 무림이라는 세계가 살기 힘든 이유엔 여러가지가 있다.
당장 현대 지구와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는 인프라,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의 분위기도 큰 이유였지만
실질적으로 일반인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무림인들의 칼부림이다.
정파와 무림맹이 아무리 강세라고 하지만 세상에 정파와 무림맹만 있는 게 아니고 넓은 중원 땅 구석구석 곳곳을 그들이 지켜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정파 소속 무림인이라고 사고를 안 치는 것도 아니다. 정파 소속이라고 정말 정의로운 마음씨를 가진 무림인을 찾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정파 사파를 떠나서 자존심이 강한 편이라 상대가 조금만 잘못해도 칼이 오가는 성격들이고
정파와 사파의 차이가 있다면 사파는 욱하면 검부터 뽑지만 정파는 한번 참은 다음에 검을 뽑는다 정도지 딱히 정파라고 착하고 남들을 배려해주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내 점집에서 칼부람이 일어난 건 아니지만..'
평소 자주 가던 객잔이 무림인들의 난동 때문에 내부를 수리하느라 한동안 문을 닫게 되는 일은 중원에선 일상적인 것이었다.
나도 칼부림까진 아니어도 나를 위협하던 손님을 당아영이 내쫓아준 적은 몇 번 있었다.
'자영업자들이 살기 참 힘든 세상이야.'
언제 어디서 사고를 칠 줄 모르는 인간 폭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는 세상이라.
무림인들은 평균적으로 씀씀이가 좋은 편이라 매출을 제법 많이 올려준다는 장점이라도 없었다면 자영업자들은 무림인들이 가게에 들어오는 것도 싫어했을 거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요지가 뭐냐면..
"다시 똑바로! 하나!"
""함부로!""
"둘!"
""싸우지 않는다!!!""
"목소리에 진정성이 없잖아요! 다시 하나!!"
'...저 여자가 저건 어떻게 아는 거야.'
눈앞에서 여소천에게 얼차려를 받고 있는 사내 4명이 10분도 안되는 시간 동안 어지럽힌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차 4개쯤이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서 널브러져 있으며 주변 땅이나 벽에 칼로 그은 상처가 가득하고 저 뒤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금창약을 바르고 있는 사람도 여럿 보였다.
다행히 사내들의 경지가 별로 높지 않아 이 정도로 그친 거지 조금이라도 더 높은 무림인들이 난동을 부렸으면 저기 누워서 약을 바르고 있는 사람들이 저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거다.
경지가 높은 무인들이 흔치 않다는 건 그나마 위안이었다.
"어딜 지금 은근슬쩍 손가락을 늘려요! 손가락 2개만 쓰라고요! 어쭈?! 쓰지 말라니까 내공까지 써요?!"
"히익!"
무인답게 얼차려도 진화해서 한 손. 그중에서도 손가락 2개만 쓰라고 하더라. 물론 내공도 안 쓰고.
아무리 무인이라지만 경지가 그렇게 높아 보이진 않는데 내공도 없이 저게 되나 싶다가도 여소천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하며 남아있는 사탕을 핥았다.
아마 사내들도 이렇게 될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라는 이상한 불문율 때문에 정말 선을 심하게 넘는 경우가 아니면 관군도 통제 못하는 게 무림인들이다.
괜히 무림인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게 아닌데
'상대가 관군이 아니라 같은 무림인이면 뭐..'
어쩔 수 있나. 약한 게 잘못이지.
사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원래 난동을 부리던 건 4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
근데 왜 얼차려 받는 게 4명이냐고 묻는다면..
'..괜찮으려나.'
나는 잠시 여소천이 살기를 풀풀 뿜으며 난동의 근원지로 찾아왔을 때의 기억을 재생했다.
[...당신들인가요? 소란을 피운 게?]
[뭐냐 꼬맹아. 아저씨들은 지금 바쁘니까 가서 엄마 손이나 잡고..]
-빠각!
나는 지구에서 보던 영화에서도 그렇게 턱주가리에 시원하게 들어간 니킥은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 명의 희생(?)으로는 아직 그들과 여소천의 격차를 파악하기 부족했는지 이빨이 아작 난 채로 쓰러진 사내의 동료가 여소천에게 덤벼들었고
-반짝반짝
어두운 저녁임에도 빛나는 머리를 가지게 되었다.
미용사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단칼에 깔끔하게 자른 건지는 아직도 신기하다.
그래도 순식간에 2명이나 쓰러지자 여소천의 특징적인 외모 덕분에 금방 그녀를 알아챈 사람들이 생겼고 소란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래도 한 명을 제외하면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상태로 사태가 마무리된 건 다행이었다.
...이 시대에 틀니가 발전해있기를 기도하자.
"이제야 좀 자세가 봐줄 만 하네요. 앞으로 100회 더 하고 당신들이 도맡아서 뒷정리도 하세요. 당신들이 일으킨 소란이니까."
"...저쪽이 먼저 소인들을 모욕.."
"당신도 평생 죽만 먹고 싶나요?"
"..."
대부분의 무림인들간의 다툼이 그렇지만 이번 일도 뭐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2대3으로 시비가 붙었고 말싸움에서 그대로 칼싸움까지 이어졌다는 흔하디 흔한 다툼이다.
-탁탁
"어휴. 젊은 놈들이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지는 게 없네요. 그래도 알건 다 아는 놈들이 왜 그렇게 못 싸워서 안달인 건지."
"..그 외모로 그런 말 하지 말아주실래요? 인지 부조화가 와서.."
"흥. 외모가 나이 값을 못하는 건 사돈 남 말할 처지가 마찬가지거든요."
"아니 그래도 당신이랑 저는 차이ㄱ.."
-파직
"조용히 하겠습니다."
"흥."
괜히 대꾸했다 본전도 못 찾았다.
"..."
-투덜투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속으로 삼키면서 여소천을 따라 걸었다.
아까 일어난 소란 탓에 이미 다른 상인들도 괜히 불똥 튈 세라 대부분 자리를 뜬 지 오래였고 시장을 구경하던 사람들도 많이 도망간 덕분에 시장은 어느덧 많이 횅 해진 상태였다.
"...아쉽네요. 모처럼의 둘이 하는 산책이었는데."
그나마 남은 마차들도 이번 장은 이걸로 끝물이라는 걸 느꼈는지 접고 있는 게 보이는 상황이었으니 이 이상 장을 돌아다니는 건 의미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돌아갈까요?"
"네.. 뭐.. 그래야죠."
"...음."
내가 아무리 평소 눈치가 없다고 구박을 자주 듣지만 지금 여소천의 기분이 침울한 상태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실상 첫 데이트가 웬 잡놈들 때문에 어정쩡하게 마무리된 셈이니 그럴만도 했다.
"..."
아직도 비고에서 당했던 그 전기충격의 원한은 잊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같이 눈 마주치고 살아야 하는 사이 아니던가.
첫 데이트에 좋은 추억 정도는 남겨 줘야겠지.
-두리번
"잠깐만 있어봐요."
"...?"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물건을 정리하고 짐을 싸고 있는 상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아직 정리 안 끝났죠?"
"아 손님이십니까? 여기 펼쳐드릴 테니 천천히 보시죠."
"으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 장신구 하나를 골라 품속에 있던 지갑에서 값을 지불했다.
그 뒤 여소천에게 돌아오자 아까 그 자리에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얼굴과 장신구를 번갈아 보더니 무언가 깨달은듯한 표정을 했다.
"아하. 선물로 독봉의 마음을 사보려는 건가요?"
"...네?"
"뭐 독봉이라면 이런 시장에서 파는 장신구 정도가 눈에 들어오진 않겠지만 여자의 마음이란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죠. 좋아하는 남자가 기껏 준비해준 선물이면 화난 마음도 충분히.."
나는 여소천의 말을 끊고 손을 뻗어 여소천의 머리에 장신구를 착용 시켰다.
특이한 푸른색이라 무슨 색이 어울릴지 좀 고민하긴 했었는데
"잘 어울리네요."
"...에?"
"그쪽 거에요. 당아영 게 아니라."
"에?"
여소천은 머리가 복잡해졌는지 한참 동안 제대로 말도 못하고 우왕좌왕 거리더니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제, 제거요? 정말요?"
"왜요. 싫어요?"
"아, 아뇨! 당연히 좋죠! 시, 싫다는 게 아니라 갑자기 당신이 저한테 이런 걸 해주니까.."
여소천은 갑자기 내가 이런 행동을 한 게 어지간히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왜요. 저도 선물 할 줄 아는데."
"아, 아니 그.. 당신 저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
"그, 그치만.. 제가 비고에서 너무 심하게 하기도 했고.. 제 성격이 좋은 편도 아니고.. 다, 당신도 저한테 유독 날을 세우시는 것 같아서 절 싫어한다고 생각.."
"...하아."
설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본인도 츤데레면서 자기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어쩌잔 말인가.
"제가 그쪽을 싫어했으면 그냥 순순히 결혼한다 했겠어요?"
"그, 그건.. 겁탈이긴 했지만 관계를 맺긴 맺었으니까.."
"...제가 있던 세계에선 관계만 맺었다고 결혼하거나 하지 않아요."
여소천은 뭔가 충격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혹시 지금 다니는 것도 일단 부부니까 억지로 다닌다고 생각했던 거에요?"
"..."
-끄덕
여소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미간을 짚었다.
"후우.."
"그, 그래서.. 기왕 억지로라도 다니는 거 좋은 기억이라도 남겨주려고 했던 건데.. 말도 생각했던 대로 잘 안 나오고 행동도 잘 못하고 하필 또 저런 일까지 일어나니까.."
"아이고 이 화상아."
여소천은 이제 반쯤 울먹이고 있었다.
평소 안 하던 대로 솔직하게 말하려니 힘든 모양이었다.
"내가 이래서 츤데레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으휴."
"거, 거봐요. 당신도 별로 안.."
"근데 그렇다고 딱히 그쪽이 싫진 않아요."
"네?"
나는 옷 소매로 여소천의 눈물을 닦았다.
"어떻게 사람의 모든 점이 마음에 들겠어요.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싫고. 그런 게 종합되는 거지 어떻게 다 좋아하겠어요. 그쵸?"
-훌쩍
"근데 저는 당신한테 몹쓸 짓을.."
"그건 됐어요 그냥. 어차피 지난 거. 솔직히 그거 한번 당하고 이런 신붓감 얻으면 남는 장사죠 뭐."
돈 많지. 무력 강하지. 권력도 높은데다 외모도 최상위권.
성격이 안 좋다는 단점은 씹어 먹고도 남는 조건들이었다.
"근데 그 전기충격은 또 하진 마요. 진짜 아파요 그거."
"...네."
"아니면 좀 살살 하던가요."
"...조절해 볼게요."
지금은 이렇게 순하게 말 잘 듣는 성격으로 변했다지만 아마 내일. 아니 몇 시간만 지나도 평소 여소천의 성격으로 돌아올 것이다.
벌써부터 부끄러워하면서 잊으라고 말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래도 모처럼 귀여운 구경 했네.'
"그러면 슬슬 갈까요? 더 늦으면 당아영이 진짜 화낼 것 같은데."
"도, 독봉 선물도 사가세요. 그러면 아마 훨씬 나을.."
"에이 됐어요."
여소천의 손을 잡고 집 가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랑 데이트 중에 다른 여자 선물을 살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아서."
여소천이 모자를 내려버린 까닭에 이번엔 여소천의 반응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완전히 붉게 물든 얼굴을 보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이 없는 걸 보면 여소천은 눈치 못 챈 것 같지만
사실 처음부터 지갑은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