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9장-예고
"으으으으.."
"괘, 괜찮나? 미, 미안하네. 갑자기 중간부터 절제가 안돼서.."
"안 괜찮아요.."
한참을 불편한 자세로 있던 탓에 뻐근한 다리를 주물럭 거리면서 혈액을 순환 시키는 동안 검후님은 어느새 내 앞에서 다시 도게자를 하고 계셨다.
"아으 다리야.. 아으 허리야.."
"호, 혹시 많이 아프면 내가 대신 주물러.."
"..됐어요. 그냥 가만히 계세요."
괜히 더 아플 것 같다.
검후님이 힘 조절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원래 경험 상 남이 해주는 안마는 아픈 경우가 많더라.
그래야 근육이 풀어진다곤 하지만 아픈 건 싫었다.
"..."
-덜덜덜덜
그런 내 반응을 내가 화난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검후님이 엎드린 상태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하아."
-움찔!
한숨 한번 했다고 저렇게 몸을 떠는 모습 좀 봐라.
"...화 안 났으니까 그렇게 떨지 마세요."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내, 내가 멋대로 색욕에 잡아먹혀서 그대에게 무리를.."
"진짜 안 났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시네."
"하, 하지만.."
"아 쫌!"
-화들짝!
"...진짜 안 났으니까. 일단 엎드린 자세 좀 풀고 그냥 앉아 계세요."
"아, 알겠네."
여전히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자세를 고쳐 앉는 검후님을 보면서 미간을 짚었다.
그냥 좀 힘들어서 투정 부린 정도인데 그걸 저렇게 까지 반응하니 이쪽이 괜히 짜증 날 정도였다.
검후님에게 말했다시피 난 정말 화 안 났다.
중간에 좀 격렬했던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자처한 일이기도 하고..
'...기분 좋으면 됐지.'
섹스란게 그냥 서로 기분 좋으면 된 거 아닌가.
후유증이 남을 정도라면 모를까 좀 쉬면 나을 정도니 이 정도면 그냥 적당한 수준이다.
이미 몇 번이고 겪었다 보니 이제 익숙해지기도 했고.
'...정액 디스펜서에 적응해서 어쩌자는 건지.'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다시 검후님을 바라봤다.
내가 몇번이고 괜찮다고 했음에도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나.'
부끄러워서 하고 싶지 않긴 하지만 계속 저렇게 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침대에서 일어나 검후님에게 다가갔다.
-움찔!
여전히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검후님의 어깨를 잡고 입을 검후님의 귓가에 가져다 대며 입을 열었다.
"..저도 좋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화끈!
순식간의 검후님의 볼이 붉게 물드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나는 얼굴에 손으로 바람을 휘적이며 다시 거리를 벌려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죽 미안해 해야 적당히 넘어가지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움찔 거리면서 반응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
어찌 됐든 앞으로 수십 년은 같이 살아야 하는 부인인데.
"아, 그, 그, 아, 아?"
"...너무 격렬하게 하지만 마요."
"에, 에?"
'...그렇게 충격이었나.'
검후님은 크게 당황한 듯 제대로 된 대답도 못하고 이상한 소리만 내고 있었다.
이 상태에선 괜히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ㄲ..."
어 잠깐만.
"...어?"
그러고 보니 나 가기 전에 검후님한테 잠깐 인사만 하고 오겠다고 하고 온 거 아니었나?
-오싹
순식간에 온몸에 싸늘한 감각이 내려앉았다.
"아, 아무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봬요!"
"아?"
"혹시 볼일 있으시면 당아영 집으로 오시면 돼요! 그전에 제가 올 수도 있고! 아무튼 안녕히 계세요!"
나는 헐레벌떡 옷을 입고 검후님을 뒤로 한 채 방 밖으로 나왔다.
닫히는 문 사이로 잘 가라는 검후님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썰렁
...당아영과 여소천이 없다.
걱정했던 최악의 상황.
"...아. 나오셨습니까."
"제, 제 일행들은 어디 갔어요?"
나는 빨래를 개고있는 것처럼 보이는 안내인 여성에게 다급히 일행의 행방을 물었다.
"나오시자마자 여자들부터 찾는 모습이라.. 대단하시군요. 뭐 어떻게 보면 모두를 소중히 여긴다고 봐야하려나요."
"그,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계시겠다더군요."
-털썩
혹시 잠깐 화장실이라도 갔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이 박살 났다.
-덜덜덜덜
'...좆됐다.'
화났다.
100% 화났다.
아니 화 안 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가기 전에 인사하라고 보내 놨더니 그대로 질펀하게 섹스 한판 때려버리면 기다리는 사람 입장에선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아아아아..'
이건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내 잘못이 맞다.
최소한 미리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했어야 했는데 처음으로 내가 주도권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당아영이나 여소천은 생각 안하고 바로 침대에 누워버린 내 잘못이다.
'어쩌지..'
솔직히 말하자면 여소천은 별로 걱정 안된다. 당아영이 문제지.
평상시엔 제법 상냥한 편이지만 화났을 땐 정말 무섭다.
차라리 바가지만 긁히는 거면 그냥 좀 정신적으로 힘들고 말지 그 화난 걸 침대 위에서 풀려고 하니..
-부들부들
'진짜 좆됐다.'
안 그래도 방금 검후님이랑 격렬하게 한 직후라 온몸이 피곤한데 이 상태로 화난 당아영이랑?
절대 무리다.
상대가 당아영이니 약이라도 쓰면 절대 무리라는 건 없다는 게 문제지.
"아아아아.."
"..보아하니 여자가 많은 것도 마냥 남성에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군요."
"누가 부럽다는 소리만 안 했으면 좋겠어요 제발.."
"뭐,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외부인인 제가 신경 쓸 자격은 없지만.. 굳이 한마디 하자면 기왕 그렇게 된 거 소홀해지는 사람 없이 잘 챙겨주시죠. 남자라면 책임은 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내인 여성은 뭔가 해탈한 느낌이 드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듣기로는 오랜 시간 동안 검후님을 모셔왔다는데 갑자기 검후님이 결혼한다는 것도 모자라서 그 상대가 여자가 한두명이 아니라 세명이라고 하니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그냥 포기하고 앞날을 축복해주는 모양이다.
조언은 정말 고맙긴 하지만..
"...뭔가 오해하시는 게 있는데 제가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당하고 있는 거에요."
"...아."
누가 누굴 책임진단 말인가.
내가 평생 점집에서 일해서 벌어봤자 3명중 한명의 자산 규모도 따라잡지 못할텐데.
"...실례가 안된다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어떻게 한 분도 아니고 세 분이나 연을 맺으셨답니까. 그것도 하나같이 대단한 분들로."
"...그건 저도 궁금하네요."
그러게.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사실 처음 산 밖에 나왔을 때만 해도 연애 같은 건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살다 보니 이렇게 됐다.
"..뭐 어쩌겠어요. 어떻게든 해 봐야지."
눈앞의 여성의 말대로 이미 일어난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래도 남자답게 책임은 져야겠지.
있는 사랑 없는 사랑 다 쥐어 짜내면 3명 정도는 감당 될 거다. 아마도.
...어차피 안된다고 도망가는 것도 못하니까.
"아무튼 저도 이만 가볼게요.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오늘 안내해주느라 수고하셨어요."
"잠깐만요."
"네?"
여성은 문 쪽으로 나가려는 나에게 멈추라고 하더니 그대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검후님을 잘 부탁 드립니다."
"..."
"평생을 무에 매진하신 분이라 비록 여성으로서의 마음가짐은 부족할거라고 생각되지만.. 혼인 전에 제가 최소한 일반적인 여성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알려드릴 테니 부인들이 많다고 소홀해 하지 말아주셨으면.."
"아뇨. 괜찮아요."
-끼익
나는 나가는 문에 손을 대고 아직 내려가 있던 모자를 위로 올리면서 말했다.
"이미 충분히 매력적인 분이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그런 의미를 담아 살짝 미소를 지어주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쿵!
"...나도 시집갈까."
문을 닫기 전에 뭐라고 말하셨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문이 너무 세게 닫혀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느새 날이 완전히 저물어 쌀쌀한 바람이 부는 바깥 공기가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얼굴을 식혔..
-텁
"누구게~요."
갑작스럽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어두워졌다.
"...여소천이요."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눈을 가린 여소천의 손을 치웠다.
"...칫. 재미없게."
"징그럽게 이런 거 하지 마요. 원래 그런 캐릭터 아니면서."
"그건 또 무슨 뜻인데요."
"...말을 말자."
저 천연덕스럽게 모른다는 듯이 말하는 표정 좀 봐라.
내가 보기엔 무슨 말인지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저러는 거다.
여소천의 손을 치우고 앞서 걸어가면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아영이랑 먼저 간 거 아니었어요? 당아영은 먼저 집에 간 거 같았는데."
"제가 독봉 집을 왜 가요. 신혼집으로 거길 쓸 것도 아닌데."
"..아니에요?"
난 당연히 당아영 집에서 다같이 살 줄 알았는데.
"한 집에서 다같이 사는 건 동의하지만 그게 독봉 집이라고 결정한 적은 없잖아요?"
"..근데 그쪽은 집은 있어요?"
"저도 집 있거든요?! 곤륜 안쪽에 저만 사는.."
"그건 집이 아니라 처소고요."
"..."
여소천은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그리고 있다고 쳐도 신혼생활을 곤륜에서 할 거에요? 아무리 그쪽이 제일 높다지만 도사들 많은덴데 거기서 그래도 돼요?"
"...독봉 집에서 사는 걸로 하죠. 주변에 시장도 많고 교통도 좋으니까.."
"어차피 그럴 거 진작 그러시지."
"..."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땅을 바라보고 있는 여소천의 볼이 붉게 물든 게 보였다.
그 상태로 한참을 걸어가다가 당아영 생각이 나서 미리 물어보기로 했다.
"아까까진 당아영이랑 같이 있었었죠?"
"...네."
"그.. 헤어지기 전에 당아영 분위기 어땠는지 혹시 기억 하세요? 뭐 짜증나 보였다거나.."
"...오늘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요?"
음. 확실히 좆됐군.
어차피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확인사살을 당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냥 오늘 죽었다고 복창하자.
"..."
-슬쩍
당아영 생각을 하고 나니 문득 당장 옆에 있는 이 여자도 신경 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아영이랑 같이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혹시 3p로 쥐어 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걸 보면 그럴 마음은 없던 모양이다.
"근데 그쪽은 괜찮아요?"
"...뭐가요."
"그.. 성욕이라거나.. 쌓인 거 없어요?"
"..."
"아. 오,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요!"
양팔을 가슴에 모으면서 여소천에게서 살짝 물러섰다.
"푸흡."
"왜, 왜 웃어요!"
"뭐, 괜찮아요. 제가 독봉처럼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 못할 시기도 아니고.."
"아니고?"
"...이미 저번에 충분히 풀어서요."
여소천은 이해 못할 말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필요 없다면 편한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아무튼 이제 당아영의 집으로 가야 한다.
"...가기 싫다."
"그렇게 독봉이 무서우면 오늘은 객잔에서 주무실래요?"
"그건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굴로 들어갈 수도 있는 노릇이라.."
"그렇긴 하죠."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데 여기서 튀는 건 오히려 악수다.
그냥 얌전히 집에 들어가는 게 낫다.
그래도 집에 그냥 들어가긴 좀 무서우니까..
"그러면 가기 전에 잠깐 시장 좀 들르죠."
"..바로 안 가도 돼요? 독봉 무섭다면서요."
"어차피 늦은 거 조금 더 늦어봤자 변하는 건 없을 거 같고.."
-꼬르륵
"...영양 보충이 필요해요."
이렇게 된 이상 결전을 치루기 전에 미리 단백질과 수분을 보충한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