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9장-결심
-쾅!
문을 닫고 벽에 손을 기대고 다른 한 손으론 입을 틀어 막는다.
"우욱.."
역겹다.
나 자신이 역겹다.
뭘 그렇게 좋아했단 말인가.
자신의 과오로 큰 상처를 입은 아이와 혼인을 올리게 되는 것이 그렇게 기쁜 일이란 말인가.
"후으.. 으읍.."
차오르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아낸다.
그러나 차오르는 죄악감과 자기혐오는 참을 수 없었다.
다리로부터 죄악감이 허리를 감고 올라오고 내가 이런 더러운 인간이었다는 혐오감이 머리를 지배한다.
-아득
혼인. 그래. 혼인까지는 괜찮다.
내가 저지른 과오를 평생 곁에서 봉사하며 속죄한다고 생각하면 문제될 것도 없다.
하지만 스스로 그걸 좋아했다는 건 다른 문제다.
속죄하면서 즐거워한다면 그것이 속죄인가?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아도 모자란 마당에 그걸 즐거워하다니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하아.. 하아.."
-질끈
잠시 좀 그와 떨어져 지냈다고 그 사이에 잊었단 말인가.
어차피 꿈이라는 방패 뒤에서 해소한 욕망을 현실에서도 실현해도 되는 것이라고 착각했단 말인가.
'간신히 마음을 좀 정리했다고 생각했거늘..'
하룻밤의 불장난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지 주제도 모르고 달아오르는 몸을 약까지 써가며 억누르고 스스로 해결하며 간신히 마음을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기회가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잡는 꼴이라니
이래서야 어디가 속죄하는 사람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정녕 그에게 미안해 하는 마음이 있긴 한건가?'
이제 이런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소연이 때문에 인생을 망친 그 아이를 찾아 헤맨 세월이 몇년이던가.
정말 미안했다면 그를 찾자마자 내가 소연이의 스승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며 그에게 보상했어야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어떻던가.
그가 내가 찾아 헤매던 그 아이가 아닐 거라며 현실을 부정하고 평범한 젊은 고수인 척 그를 속이며 여행을 즐기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또 한번 내 실수로 그를 혈교의 마수에 닿게 만들었고
그 결과 기억에 이상까지 생기고 말았다.
그의 인생을 망친 소연이에 대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산 속에 들어가서 살았다는 것도..'
소연이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니었다면 그럴 일도 없었을 거다.
좋은 스승에게 거두어진 것 같아서 다행이지 만일 그 스승이란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단전이 망가진 상태인 어린 아이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중원은 친절한 땅이 아니었다.
그런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했을뻔 했으면서
그에게 미움 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에게 경멸 당하는 게 두려워서.
소연이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내가 과거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남겼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그런 주제에 혼인이라.'
검후라는 이름이 아까웠다.
뭐가 정파 최고의 고수냐. 뭐가 정파란 말이냐.
무엇이 정(正)이고 무엇이 사(邪)란 말인가.
평생 매진했던 화산의 가르침이 겨우 이딴 것이었나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사람을 속이고 좋아하는 꼴이라니.
이래서야 그동안 토벌한 악인들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내게 그들을 심판할 자격이 있었을까?'
-덜컥
간신히 몰아낸 심마가 다시 몰려오기 시작한다.
신념이 무너지고, 정의가 무너진다.
인생을 지탱하던, 나라는 인간을 지탱하던 기둥이 무너진다.
수십 년 간 살아온 인생이 모순으로 점칠된 덩어리였다는 사실이 가슴을 찌른다.
무인에게 있어 검보다 더 조심해야하는 것이 심마이거늘 심마를 물리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악인은 처단해야 한다.]
-스릉
검집에서 검이 뽑혀 손에 들린다.
사실상 내 몸이나 다름없는 검의 감각이 느껴진다.
-부들부들
"아.."
몸이 심마에 저항하려는 듯 검을 쥔 손이 떨리고 있지만 정작 검은 여전히 굳세게 손에 붙들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제자의 관리를 잘못해 무고한 아이에게 평생 달고 살아야 할 상처를 입혔으며
제때 그 아이를 거두지 못해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방치했으며
정작 그 아이를 만나고 나서는 주제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 현실을 부정하고 기회를 타 관계를 맺은 뒤 혼인을 올리자는 말에 죄책감 없이 받아들인 주제에
평생을 자신은 정의롭다고 살아온 자는
악인인가?
"..."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들고 있는 검이 조금 더 움직이는 것 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그런 정의를 가진 인간이 선인일리가 없으니까.
-질끈
머릿속으로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
그에 따라 천천히 손에 들린 검이 따라 움직이고
이윽고 검이 내 가슴을 찌르..
-벌컥!
"검후님! 안에 계세요?"
-화들짝!
"으, 응?"
익숙한 목소리에 재빠르게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문 쪽에는 내게 복잡한 의미를 가진 사내가 서있었다.
피풍의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안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절로 그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뭐하고 계셨어요?"
"자, 잠깐 무언가 실마리를 얻은 것 같아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중이었네."
"아하."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르고 적당한 변명이었다.
"그, 그런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갑자기 자리를 피해서 대화가 끊긴 건 미안했네."
"아 별건 아니고.. 이제 저희는 가본다고 전해드리려고 했는데 그래도 얼굴은 보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
내심 들떴던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뭘 기대했던 걸까.
무언가 실망한 건 확실했는데 정작 뭘 기대했는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 알겠네. 아까 했던 이야기는 적당히 판단을 내린 다음에 직접 가거나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해 줄테니 먼저 돌아가 있게."
내심 아쉬워하는 감정을 감추며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걸로 그도 적당히 나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 그리고 또 드릴 말이 있는데요.."
그가 내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뭐, 뭔가?"
"저번에도 감사 인사를 드리긴 했지만 그때는 사실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서요."
내게 다가온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잡더니
"다시 한번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대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
나는 그 말에 굳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그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아 그러고 보니 이럴 때도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네요."
-스륵
모자를 내려 얼굴을 드러내더니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활짝
순수라는 단어 자체를 나타내는 것과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쿵!
나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 * *
"..저기 검후님?"
"핫?!"
"괜찮으세요..?"
나는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미동도 없이 굳어있던 검후님이 정신을 차리는 모습을 보면서 괜찮은 건지 물었다.
아까 급하게 자리를 뜬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정말 어디 몸이 안 좋으시기는 한 것 같았다.
"약이라도 구해다 드릴까요? 아까 보니까 여소천도 적당히 의학 지식은 있는 것 같고 당아영도 보니까 잡학다식하던데.."
"아, 아니네. 그런 병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냥 조금.. 고민이 있어서 그랬던 거니까."
"고민이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살짝 의외였다.
항상 당당하고 멋진 모습만 보이던 그 검후님이 고민이 있다고 할 줄이야.
뭐든 시원시원하게 해치울 것 같은 분이셔서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는데 역시 검후님도 사람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저한테 말해보실래요? 제가 또 그런 건 전문이거든요."
"그, 그대에게 말인가?"
"네. 사실 점집 운영하면서 오는 손님의 한 3할 정도는 고민상담 때문에 오는 사람들이에요. 정말 미래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오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점술에 투자할 정도로 미래를 궁금해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미래가 있거나 현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러는 거거든요. 덕분에 고민 상담에는 자신 있다고요?"
"그, 그런가.."
요즘엔 계속 섹스만 해서 그렇지 내 본업은 점쟁이였다.
점쟁이라고 정말 점만 봐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불길한 미래가 있으면 그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알려줘야 하고 좋은 미래가 있다고 안주하지 말고 다 내팽겨치면 미래도 떠나가니까 조심하라고 말도 해줘야 하고 사실상 절반은 상담사나 다름 없었다.
덕분에 세상엔 온갖 종류의 인간 군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자, 저는 괜찮으니까 편하신대로 말씀해보세요. 필요하면 점이라도 봐드릴 테니까."
뭐 이런데 쓸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니겠는가.
"그, 그게.. 그러니까.."
"혹시 제가 못 미더워서 그러세요?"
"아, 아닐세! 내가 그대가 못 미더울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다만?"
"...으으."
검후님이 잠시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닫더니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에 들은 어떤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네."
-끄덕
나는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이 을에게 씻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남겼고.. 덕분에 을은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도 모자라 남은 인생을 전부 상처를 안고 살아갸야 하는 처지에 놓였네."
"저런. 어쩌다가."
"...그러나 그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을도 어떻게든 적응하고 세상을 살았지. 그러던 중 그에게 상처를 준 갑과 다시 재회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네."
"그래서 싸웠나요?"
"..아니.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난 탓인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고 평범하게 좋은 인연을 쌓았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갑은 을이 그가 과거 큰 상처를 입힌 그 을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는 지금 을과의 관계가 마음에 들어서 을에게 자신이 갑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네."
"상황이 재밌게 흘러가네요."
"...재미있는 상황이지.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 한 사건을 계기로 갑은 을에게 그가 그에게 상처를 입혔던 갑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게 되네. 하지만 을은 모종의 이유로 갑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억을 잃은 상태였고 갑을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갑도 괜히 그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감추고 있고."
"흠.."
'소설이라도 읽으셨나.'
일단 현실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검후님이 말을 했으니 현실에 있는 일이 맞을 거다.
"이런 상황일 때.. 을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이유로 진실을 감추고 있는 갑의 행동은.. 옳은 것인가?"
"그게 고민이신 거에요?"
"...그렇네."
"...흠. 사람마다 관점은 다르겠지만 우선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딱히 문제될 것도 없지 않나요?"
"..."
조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검후님의 눈을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상처를 입긴 했어도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았다는 거 보면 어떻게든 극복하거나 적응하고 살고 있는 모양이고.. 갑에 대해서 잊었다는 걸 보면 그렇게 신경 쓰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요."
"...그런가?"
"네. 사실 그렇잖아요? 진짜 용서할 수 없는 철천지 원수였으면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잊을 수가 없죠."
"..."
"갑이 끝까지 감춘 것도 아니고 어쨌든 밝히긴 밝혔는데 기억 못한거면 그냥 그걸로 된 거죠. 굳이 잊은 기억까지 자극하고 끄집어내서 미움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요. 어차피 마침 지금 관계는 좋은 편이라고 했으니 빚은 그 상태에서 차근차근 갚아나가면 되는 거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검후님의 목소리에서 약간 떨림이 느껴졌다.
"네. 뭐.. 솔직히 제가 을이라고 해도 이미 좋게 지내고 있는 사람이 사실 원수였다는 걸 아는 것도 딱히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것 같고요. 말하는 걸 들어보면 상처를 준 것도 실수에서 비롯된 사건 같은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면 더 그렇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
'..그러고 보니 이 속담 중원에도 있나?'
별 생각 없이 속담을 쓰다 보니 가끔 이런 문제가 있다.
이 속담이 중원에도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내가 다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아 그 말이 무슨 뜻이냐면.."
"...아니네. 됐네."
-스륵
내 대답을 들은 뒤 땅을 바라보고 있던 검후님이 몸을 세우고 내게 다가왔다.
...왠지 분위기가 뭔가 무서웠다.
"...검후님?"
"미안하지만..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는가?"
"무, 무슨 부탁이요?"
-턱
어느새 내 앞에 검후님이 다가와 있었고 그런 내 뒤에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꿀꺽
어쩐지 익숙한 상황.
나는 왠지 이 이후에 무슨 일을 당할지 예상되는 기분이었다.
나를 내려다보던 검후님이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고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곧 느껴질 부유감을 각오했..
"나를.. 범해줄 수 있겠는가?"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