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9장-결정
"..화산을 나가는 건 조금 고민해보도록 하지."
"그렇게 하던가요."
의외로 그런 여소천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검후님은 화산을 나간다는 결정은 보류하겠다는 말을 하셨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검후님이 남자를 이유로 화산에서 자진해서 나왔다는 말이 퍼지면 또 얼마나 큰 파장이 생겨날지 벌써 머리가 아픈 참이었는데
그 방법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일단 미뤄졌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까지 되니까 진짜 내가 미친놈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는데
'..진짜 어떻게 꼬셨지?'
독봉, 검후, 청뢰검.
정파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여인들 3명과 결혼을 하네 마네 하고 있는 내가 나 스스로도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진짜 남들이 보면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10번은 구했을 놈이라고 할 상황이긴 하지만..
-삐질삐질
'결혼생활이 3배..?'
부담스럽다.
부담감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다.
아니 물론 내가 직접 결혼생활을 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변에서 들은 게 있는데
그걸 한 명도 아니고 3명..?
'..아니 잠깐만. 그리고 스승님도 모시고 살아야하니까..'
지금은 폐관수련 때문에 산속에 있는 집에 내버려두고 있지만 언젠가 나오긴 나오실 테니 그냥 혼자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엔 대체 혼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 인간의 생활력이 최악이라는 걸 내가 아는데 그걸 어떻게 혼자 둔단 말인가.
'그렇다고 스승님을 모시고 사는 것도 모양새가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지구로 비유하면 신혼집에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느낌이니 모양새가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근처에 집을 하나 마련해 드려야 하나..?
아니 근데 산에서 나오려고 하기는 할까?
결혼이고 뭐고 헛소리하지 말고 허락 못해주니까 따라오라면서 다시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면 어떻게 하지?
'..하아.'
벌써부터 생각할 거리가 많은 걸 보면 절대 편온한 결혼생활은 아닐 것 같다.
무려 부인이 3명이다 3명.
성격도 그렇고 신체적 차이도 그렇고 내가 무조건 잡혀살게 뻔한데 그런 부인이 3명이다.
당장 잠자리 문제만 생각하더라도 우선 당아영은 내가 부인이 몇명이 되든 지금과 같은 수준의 양을 요구한다고 했고..
검후님이나 여소천이 당아영같이 혈기왕성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많이 줄여서 둘이 합쳐서 당아영 정도만 된다고 해도..
'...'
나 그냥 집에서 살아야겠는데.
아니 이건 애초에 무리다.
아무리 이 몸이 탈인간급의 정력을 자랑한다고 해도 그래도 사람인데 당연히 한계라는 게 있다.
만약에 어떻게 버틴다고 해도 이 정도면 낮에는 하루 종일 침대에서 요양해야 할 수준인데 결국 밤에는 다시..
'..튈까.'
내 남은 인생에 사형선고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다.
유부남들이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고 하던 이유가 이런거였을까.
아마 결혼식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보는 햇빛이 내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햇빛 아닐까.
설마 인생의 무덤이란 게 이런 의미일 줄은 몰랐는데.
"...그대?"
"네, 넷?!"
"뭐에요. 못 듣고 있었어요?"
그 순간 나를 부르는 검후님의 목소리에 정신이 팍 들자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 같은 상황이 눈앞에 보였다.
"어, 어.. 잠깐 뭣 좀 생각하느라."
"뭐, 그럴 수도 있죠. 우리가 여기 온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어, 어.. 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를 얘기하고 있었구나.
...그게 뭐였지.
"...으으음.."
"...혹시 까먹은 거 아니죠?"
"잠깐만요.. 잠깐 기억이.. 아!"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뒤져 간신히 이유를 찾는데 성공했다.
"마교!"
그러고 보니 그거 때문에 온 거였지.
워낙 방금 전 큰 일이 있었어서 깜빡 까먹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마교라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교라는 단어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검후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마교에서 나에게 서신이 도착했는데 그 서신에서 나보고 마교에 방문해 달라는 요청이 담겨있었다고.
그리고 검후님은 예상했던 반응과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긴 표정을 하고 계셨다.
'..당아영처럼 날뛰실 줄 알았는데.'
절대 가면 안된다. 상대는 그 마교다. 하면서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꽤 침착한 모습이었다.
"흠.."
"...어떻게 할까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연히 그 마교의 본거지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건 권유하고 싶지 않다만.. 오히려 그 마교라서 더 고민 되는군. 괜히 거부했다가 정말 납치라도 하려고 든다면 막기 여긴 힘든 게 아닐테니."
"..에이. 저한테 그 정도.."
"겸손은 좋지만 자신의 가치를 파악해두는 건 중요하다네. 지금 그대는 무림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인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납치의 가능성이 있다는 건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네."
"..."
..그렇긴 하다.
중원에 널리고 널린 자칭 점쟁이들과 다르게 나는 이미 검증된 예언자 아닌가.
미래를 읽는 것도 모자라 경지를 올릴 수 있는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는 예언자라면 어떤 집단에서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
"아마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당분간 안전한 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게 현명하겠지. 마교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 말이야. 마침 그대 주위에 있는 이들이 있으니 사천당가나 곤륜.. 아니면 화산도 괜찮겠군."
"..저기 근데 여소천이 말했었던 게 있는데.."
"뭔가?"
"천마가 나오면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못 막는다고 하던데.. 정말일까요?"
-움찔!
천마.
그 이름이 나오자 검후님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검후님?"
"....후우. 미안하네.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랬네."
"...네."
금방 떨림이 잦아들긴 했지만 분명히 검후님의 몸이 떨렸던 걸 볼 수 있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 만으로도 대답을 대신하기엔 충분했다.
검후님도 천마를 막을 순 없었다.
만약 그녀가 나선다면의 이야기였지만.
"...그 서신이 천마가 보낸 서신이었나?"
"아뇨.. 누가 보냈다는 말도 없었어요."
"...부디 그녀가 아니길 빌어야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부른 게 맞다면.."
검후님이 말을 하다가 한숨을 푹 쉬더니 기운 없는 목소리로
"..가는 게 나을 걸세."
이미 예상하고 있던 말을 이으셨다.
"자, 잠깐만요. 천마가 부른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 사람만 아니면.."
"..지금의 천마가 전대의 천마를 꺾고 그 자리에 오른 뒤. 마교는 이상할 정도로 중원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네."
"...네?"
"그대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그동안 역사에서 마교가 중원을 향해 야욕을 드러낸 건 하루 이틀이 아니지. 당연히 인재에 대한 욕심도 엄청났네. 유망주로 기대 받던 후기지수가 마공에 타락해 마교로 넘어가는 일은 잊혀질 만 하면 일어나는 일이었고 정파 무림의 뛰어난 인물이 암살을 당하거나 기술자의 경우 납치를 당하는 일도 자주 있었을 정도로."
"...그렇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천마가 자리에 올라선 뒤에는 그런 관심이 굉장히 줄어들었어. 한창 혈교와의 전쟁으로 중원이 시끄러웠던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오히려 그동안의 마교였다면 그 혼란을 틈타 중원을 점령했겠지."
-부르르
"...혈교의 교주만 잡고 물러서는 게 아니라."
"..."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검후님 정도의 고수가 몸이 떨릴 정도.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깨닫는데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정도로 강하면 왜 중원은.."
"모르겠네."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
"아니 사실..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하지만 확실하진 않군."
"뭐죠?"
"그때 그녀가 혈교주와 싸울 때 그녀의 감정을 읽었었네."
-솔깃
절로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였다.
궁금증을 자극하는 내용.
그리고 열린 검후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료함이었네."
"...네?"
"무료함. 지루함. 실망감. 그녀가 홀로 혈교의 교주와 간부들, 졸개들까지 순식간에 처치하면서 표정에 드러났던 감정이었네."
"..."
그런 엄청난 짓을 하면서 느꼈다는 게 무료함?
대체 뭐하는 인물이란 말인가.
아니, 그리고 싸우면서 왜 지루함을 느낀단 말인가.
뭘 기대했길래 실망감을..
"...설마."
"...나와 전우들을 쓰러트린 혈교주도 그녀에게 있어선 심심풀이였다는거지. 정확히는 그것조차도 되지 않는."
"..."
"그러니까 아마 그녀가 중원을 침략하지 않는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
차마 검후님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중원이 아직 마교의 손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니 마교가 중원에 야욕을 드러내고 있지 않고 있는 것에는 그녀의 의사가 반영되어있겠지. 애초에 마교는 상하관계가 명확한 집단이고 모든 교인들은 그녀의 명령에 따라야 하니까. 그런 마교에서 외부인에게 서신이 보냈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이 서신에 천마의 의사도 없다고 볼 수는 없는 거네요."
"...그렇겠지."
만약 그녀 본인이 부른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녀는 이 서신의 존재는 알고 있을 거다.
다르게 말하자면 내 존재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 확대 가능하고.
"...그러면 이건 가는 게 맞겠는데요."
"..."
"여소천이 말했던 것처럼.. 괜히 안 갔다가 진짜로 천마라도 나오면.. 큰일이니까."
내가 사실상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당아영이 옆에서 나를 끌어안으면서 등을 토닥였다.
"혹시 거기 감금이라도 당하면 언젠가 꼭 구하러 갈 테니까 그냥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다 해요..? 괜히 반항하다가 다치거나 하지 말고.. 정파의 약점을 알려 달라고 해도 그냥 다 알려주고.."
"아니 왜 벌써부터 감금을 전제하에 깔고 가는 건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망토는 최대한 벗지 말고.. 진짜 어쩔 수 없이 벗어야 하면 아마 밤에 이상한 여자들이 찾아올 테니까 어떻게 잘 구슬려보고.."
"아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흑.. 저는 당신이 아무리 더럽혀져도 괜찮으니까 괜히 자결이라거나 그런 건 하지 말아주세요..?"
대체 당아영의 머릿속의 나는 무슨 이미지길래 저런 걱정을 다한단 말인가.
왠지 분위기가 이상한 것 같아서 여소천이 있던 쪽을 바라보자 아까 쓰러졌던 안내인 여성한테 어디선가 가져온 이불을 덮어주고 있었다.
"...그쪽은 저 걱정 안돼요?"
"...? 안되는데요."
"..."
뭘까 저 당연히 내가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는 모습은.
왠지 뭔가 떠오를 것 같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생각의 상념을 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