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147화 (147/250)

[147화] 9장-경쟁

뭔가 많은 일이 있던 참사 이후 우리는 간신히 상황을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드디어 여기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걸 깨닫는데 성공한 검후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안하네."

-넙죽

언젠가 여소천에게서도 봤던 도게ㅈ..아니 절이었다.

"자, 잠깐만 그렇게까지 사과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나이나 배분이 무슨 상관이겠나. 잘못을 했다면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게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도리. 난 아무렇지 않으니 부디 받아주게나."

"아, 알았어요! 사과 받을 테니까 빨리 일어나세요!"

나는 좀 놀란 정도였지만 당아영은 검후님에게 절을 받는 게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정도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던 게

나이 차이는 물론이고 중원에서의 명성, 이름값, 경지 등 당아영 입장에서 검후님은 함부로 말을 섞기도 힘든 대선배중의 선배였다.

아무렴 아무리 당아영이 후기지수중 최고라도 해도 검후님은 정파 최고의 고수 중 한 명이니 그런 쪽으로 꽤 보수적인 이 세상의 인식으로 생각하면 그런 검후님에게 절을 받는다는 건 당아영으로서도 부담스러운 일 아닐까.

그렇게 이해하니까 당아영의 태도가 이해가 됐다.

"자. 빠, 빨리 일어나세요. 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 정도까지 하실 일은 아니니까요."

당아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검후님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보다보니까 든 생각인데.

"저기.. 결국 당한 건 저 아닌가요? 왜 용서를 소저가.."

"어.. 그야 당신 몸은 제꺼나 다름 없으니까요?"

"제 몸은 제꺼에요?!"

"아하하 농담이죠 농담."

아무리 사실상 당아영 마음대로 할 수 있다지만 내 몸의 주인은 나다.

'...뭔가 점점 남자로서 실격이 되는 기분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이러다가 진짜 나중가면 매일매일 방에 갇혀서 먹고 자고 섹스만 하는 삶으로 전락하는거 아닐까.

당장 당아영과 여소천만으로도 거의 그렇게 될 것 같아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나중에 기회를 봐서 자유시간을 얻는 합의점이라도 마련해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와

"..뭐. 저도 괜찮아요. 어차피 이미 더한 것도 한 사인데 그 정도는 상관없죠."

"아아.. 요, 용서해줘서 고맙네."

'...딱히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요.'

워낙 갑작스러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솔직히 예쁜 여자가 자지를 빨아주는데 실어할 남자가 어디 있을까.

남남도 아니라 마음의 벽 같은 것도 거의 없는 사이인데 저 정도 사고 정도야 사실 저렇게까지 사과할 일도 아니다.

검후님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내가 괜히 두 명 사이에 큰 균열을 일으킨 게 아닐까 걱정되네만."

"...네?"

"아, 아까 그러지 않았나.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멍

당아영과 나는 검후님의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하얘져서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아까 검후님이 한참 정신을 못 차리고 계셨을 때 당아영이 자기소개를 하면서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아. 그래서 그렇게.."

"그, 그렇게 가벼운 문제는 아니지 않나? 내, 내가 그, 그대의 남자와 그런 짓을 한 셈인데.."

"아뇨 뭐.. 사실 처음이 아니라서 그렇게 까지 무거운 문제는 아니고요.."

-움찔!

묘하게 가시가 있는 말에 여소천과 내 몸이 숨간 움찔거렸다.

"그리고 이미 들었거든요. 사실 검후님도 이미 그이랑 몸을 섞으신 관계시라고."

"...아."

"이미 벌어진 건 어.."

"미, 미안하네. 내, 내가 아무리 말해봤자 설득력은 부족하겠지만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그때 그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네. 사, 사실 내가 정 힘들다면 의원이 대신 해주겠다고 말하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여인보다는 그래도 친분이 있는 여인이 낫지 않을까 해서 그랬는데 정말 미안하네. 내 검에 맹세코 다른 의도는 없었.."

검후님이 몸을 덜덜 떨면서 속사포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건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거의 반쯤 패닉 상태에 가까운 모습.

"자, 잠깐만요. 사정은 들었어요. 들었고 괜찮으니까 일단 좀 진정하세요."

당아영은 그런 검후님의 모습에 당황하면서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검후님의 팔을 붙잡았다.

점차 검후님의 몸의 떨림이 옅어지는 게 보였다.

"정말 괜찮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검후님은 잘못한 게 없으시니까."

"저, 정말인가?"

"물론이고 말고요. 외간 남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직접 몸을 바치신 건데 같은 여인으로서 어떻게 거기에 대고 뭐라고 할 수 있겠어요?"

...당아영이 원래 저렇게 성격이 좋았나?

사정 상 크게 뭐라고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검후님에게 상냥한 태도였다.

기본적으로 성격이 좋은 편이긴 한데 양보할 수 없는 부분에선 강경해지는 성격인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무언가 노리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기.. 근데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데 말이죠."

"..뭔가?"

"혹시.. 정실 자리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푸흡!"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저런 꿍꿍이(?)가 있었을 줄이야.

'반쯤 예상은 했지만..'

설마 면전에 대고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역시 여자는 무섭다.

"그, 그게 무슨 소린가. 정실이라니."

검후님은 실수로 살짝 뿜어버린 침을 닦아내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는지 옆에 있던 찻잔에 입을 대..

"아직 사정이 있어서 제대로 혼인은 못 맺은 상태인데.. 사실 그이가 검후님 말고도 몸을 섞은 상대가 있거든요."

"푸흡! 푸흡! 켁!"

"..."

..뭔가 오늘따라 검후님의 이미지가 많이 망가지는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저런 캐릭터 아니었던 거 같은데.

"쿨럭.. 미, 미안하네. 너무 놀라서. 아, 아무튼 그래서 누가 처인지 묻는 건가?"

"네. 어쨌든 중원의 법률상 처는 한명밖에 안되니까요. 혹시 검후님이 그 자리를 원하신다면.."

"나, 나는 첩이어도 상관없네."

"경쟁을.. 네?"

-멍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당아영과 나 모두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ㅁ, 뭐라고요? 제,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바, 방금 뭐라고.."

"나는 첩이어도 괜찮다고 했네."

"어..?"

당아영이 그대로 굳어버린 사이 검후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당황하는 건지는 이해하네만 나는 정말 괜찮네. 사실 도사된 몸으로 혼인을 올리는 것부터 화산의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니 원래대로라면 첩도 불가능하겠지. 첩이어도 혼인을 올리는 것은 마찬가지니."

"어..어.."

"그러나 이유가 어떻게 됐던 내가 그와 정을 통한 것도 사실. 그 당시에는 그의 요청에 따라 없던 일로 하기로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일을 덮기에는 무리겠지. 그러니 내가 화산을 나가겠네."

"네?!"

"예?!"

갑자기 터진 검후님의 폭탄선언.

조용히 검후님의 말을 듣고 있던 나도 깜짝 놀라 입을 열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가, 갑자기요?! 아, 아니 왜? 거, 검후님이 화산을 나오신다고요?"

"규율이란 중요한 것이네. 생명의 무게 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규율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 화산에서 수련 중일 후학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내가 말이야."

"그, 그렇다곤 하지만 검후님인데.."

"규율이란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어선 안되네. 나라고 예외가 될 수 있겠는가."

..나 때문에 검후님이 화산을 나온다고?

머리가 혼란스럽다 못해 새하얗게 될 정도의 충격이었다.

도사가 몸을 섞어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있긴 있었지만 설마 저 정도까지 각오할 줄이야.

"그,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쨌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고.."

"그럴 순 없네. 설령 다른 사람이 봐준다고 하더라도 나 자신이 용납하지 못해."

틀렸다.

바늘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강경한 태도였다.

"뭐.. 내가 화산을 나간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네. 단전이나 무공을 포기할 생각도 없고. 사실 이미 내 무공은 화산의 것을 기원에 두고 있을 뿐이지 그보다 벗어난 상태이니 장로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부분은 뭐라고 하지 못할 거야."

"어.. 그나마 다행.. 이네요?"

"..물론 화산에 위기가 닥친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도 않을 거고."

잠깐 검후님의 눈빛에 스산한 기운이 스쳤다.

'..다행이다.'

나는 그런 검후님의 태도를 보고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설마 나 때문에 검후님이 화산에 정이 떨어진 건가 했는데 오히려 화산을 아끼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고 계시는 것이었으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나도 화산도 포기 못하겠다는. 검후님의 안에서 나와 화산의 가치가 동일하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건 좀 과대해석이겠지.

그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검후님이 분위기 환기를 시도하시는 듯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여셨다.

"그런데 그 다른 한 명의 여인은 누군가? 일단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나도 인사 한번은 나눠야.."

"저에요 검후."

-홱

검후님이 여소천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대도 그와 정을 나눴다고?"

"네."

"...그대도 곤륜을 나왔나?"

"제가 왜요."

"......내가 알기로 곤륜의 규율은 화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텐데."

"그런 거 제가 바꾸면 그만이죠. 뭐 어쩔거야. 어차피 곤륜에 저보다 권한이 높은 양반이 없는데."

"..."

여러가지 의미로 검후님과 정반대되는 반응.

"솔직히 정 한번 나눴다고 수십 년 동안 지내던 문파에서 나오는 것도 이상하거든요. 제가 우화등선 포기하고 여인으로서의 기쁨을 좀 누리겠다는데 왜 남들 눈치를 봐야 해요?"

"..."

"당신도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차라리 불만 있으면 덤비라고 하세요. 솔직히 당신이나 저나 나간다고 하면 장로들이 제일 난리일걸요. 그동안 저희 평판 이용해서 해먹은게 얼마나 많은데 이제와서 보내주고 싶을 리가 없거든요."

뭔가 상당히 이기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비판이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와 저딴게 성녀.'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또 다른 성녀 한사람.

그 사람은..

[자 그 각도에서! 조금만! 옆으로 3도 정도만 튼 다음에 옷깃 살짝 올리고! 아뇨 그것보다 조금이요! 지금은 너무 보여요! 보일랑 말랑 절대영역을 강조하는 부분이 포인트..]

...음.

지구에 있던 시절에 형성된 성녀라는 인물에 대한 환상이 마지막 한조각까지 깨진 날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