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9장-상태
"검후님이 상태가 안 좋으시다고요?!"
"아 진정하세요. 막 목숨이 위태롭거나 병이 위독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니까요."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요."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말에 손을 가슴에 올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불길한 상상이 스쳐갔기에 더욱 안도감이 컸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걸까
"..그렇게 친했어요?"
-움찔!
"치, 친했죠! 제, 제가 검후님한테 얼마나 빚을 졌는데 당연히 은인이 걱정이 될수밖에요!"
"그래요?"
"네. 그, 그냥 적당히 강해 보이고 성격도 괜찮은 것 같고 목적지도 같길래 빌붙어 다니려고 했던 무인이 설마 검후님이었을거라고는 저도 몰랐죠. 그러다가 여러 번 구해주시기도 했고."
묘하게 의심스러운 기색이 있는 당아영의 눈을 마주 보면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이래도 의심할 거냐는 눈빛.
"..크흠.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네요."
당아영은 헛기침을 하면서 의심의 시선을 거뒀다.
"그, 그래서 어떤 의미로 상태가 안 좋으신데요? 목숨이 위험하거나 병이 위독한게 아니면.."
"뭐.. 그냥 정신적으로 조금 불안정한 정도?"
"...괜찮은 게 아닌 거 같은데요?!"
"에이 뭐 몸이 아픈 게 아니면 괜찮은 거죠."
"신체적인 문제보다 정신적인 문제가 더 고치기 힘들어요?!"
지구 출신인 나로서는 당연한 상식이었지만 이 세계의 의학 수준을 생각하면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에는 현대 수준의 의학 기술이 없으니까.
"그런데 검후님 정도 수준의 무인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면.. 위험한 거 아닌가요?"
내가 잠시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이 당아영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정신적으로 거의 완성되신 경지일테니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이미 생겼다면 보통 일은 아닐텐데요."
"...하아. 보통 일이 아니긴 하죠."
여소천이 한숨을 쉬면서 아주 잠깐 동안 나를 흘겨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잘못 봤나.'
"당신은 모르겠지만 무인의 정신은 일반인에 비해 훨씬 견고해요. 경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를 단련하여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해나가기 때문에 더욱 더 견고해지고요. 그러니까 검후나 저 정도의 경지의 무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일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 정도는 알고 있거든요!"
"표정이 멍청해보여서 당연히 모르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왜 갑자기 매도.."
"아무튼 그런 검후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는 건 자칫 잘못하다간 주화입마가 올 수도 있다는 거에요."
"...!"
여소천의 말에 당아영과 나는 동시에 숨을 삼켰다.
주화입마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죽..는거죠?"
"일반적으로는 죽죠. 운이 좋다면 몸과 정신이 망가진 폐인으로 살아남거나 만약 운이 안 좋다면.. 폭주해서 날뛰겠죠."
"..."
"차라리 앞의 두 경우는 나아요. 마지막이 제일 문제지."
나도 들어본 적 있다.
주화입마에 걸린 무인이 폭주한 상태로 난동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보통 주화입마에 걸린 상태에서 심마에 잡아먹히거나 잘못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일어나는 일인데 잘못됐더라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긴 얻은 상태이기 때문에 평상시보다 훨씬 강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검후님에게 일어난다면..
-오싹
"크, 큰일 나겠네요."
"어떤 상황인지 이해했죠?"
"네, 네."
"자, 그러니까 서둘러서 가보죠. 이러는 사이에도 그 여자한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여소천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난 별다른 반항도 못하고 그대로 여소천에게 끌려가다가
"자, 잠깐! 은근슬쩍 손잡지 마세요!"
-터덥!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당아영에 의해 당아영의 몸과 밀착됐다.
거의 파묻혀서 뒤통수를 넘어 뺨에서 까지 느껴지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에 새삼스럽지만 참 호사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키 큰 년들은."
"네?"
"됐어요. 빨리 가기나 해요. 쓸데없는 일로 시간이 많이 지체 됐으니까."
어떤 부분에서 여소천의 심기가 안 좋아졌는지는 당아영과 나 모두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빠르게 멀어지는 여소천의 뒤를 쫓아 화산으로 향했다.
.
.
.
"확인했습니다. 청뢰검님. 무면금귀. 그리고.."
"독봉이에요!"
"네. 독봉.. 그런데 독봉님도 징표가 있으신가요?"
"제, 제가 보증할게요!"
"..알겠습니다. 검후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딘가 깐깐해 보이는 표정의 여인에게 검후님에게 받은 징표를 보여준 이후에 우리는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우으.. 나름 밖에서는 유명인인데.."
"화, 화산이잖아요. 도사들이니까 속세에는 관심이 없는 걸 거에요."
"제가 당신한테 보증을 받고 어딘가에 들어가야 하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아하하.. 다 소저 덕분이죠."
어딘가 침울해 보이는 표정의 당아영을 살살 위로하며 안내하는 여인의 뒤를 따라갔다.
"소개장을 들고 저한테 찾아와서 가게 여는 것 좀 도와달라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것도 벌써 2년 전이네요."
"사실 그때는 뭔가 좀 신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듣도 보도 못한 요술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 나름 시험이랍시고 내본 걸 정말 통과해버리지. 목소리도 나름 중성적이라 그때는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헷갈렸었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죠."
이렇게 들으니 뭔가 굉장히 오래된 일 같았다.
"이제 와서 물어보는 건데 제 첫 인상은 어땠었어요?"
"..당신 첫 인상이요?"
"네."
당아영과 만난지 2년.
어느덧 연인 관계 까지 된 상태에서 충분히 궁금할 수 있는 의문이었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까지 생각하긴 했어요."
"푸흡!"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잠깐만. 저를 너무 쉬운 여자로 보지 마세요."
"콜록.. 콜록.."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던 대답이라 순간적으로 사레에 들려 한참 동안 캑캑대고 있었다.
"새, 생각했던 것보다 낭만적인 성격이셨네요."
"아, 아니 일단 들어보세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정략결혼이나 대릴사위를 목적으로 생각했던 거지."
"아.."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됐었다.
문파가 아니라 세가인 사천당가의 특성 상 유능한 남성이나 여성을 정략결혼을 통해 가문에 편입 시키는 건 사실상 수백 년 동안 그들을 유지 시켜 준 시스템이나 다름이 없으니 당아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때는 저 자신의 행복보다는 좀 더 가문을 생각하는 성격이 강했었으니까요. 높은 적중률로 미래를 읽을 수 있는 남자를 가문에 편입 시키는 데 저 정도면 오히려 싸게 먹힌다고 생각했죠."
"그렇군요."
"..혹시 기분 나빴어요? 계산적이라서?"
"아뇨. 딱히."
뭐 내가 '사랑에 다른 요소나 감정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라는 꽉 틀어막힌 사고방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리고 지금은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지금 그녀가 내게 주는 감정에 그런 계산적인 감정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소저가 저한테 주는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 기분 나쁠 리가 없죠."
나름 적당히 잘 넘겼다고 생각했지만
"..."
-부들부들
"..소저?"
"후으으으.."
당아영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쯤 되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흥분했다는 걸.
"진짜 말을 해도 어떻게 저렇게 기특한 말만 하는 거지.."
"음.. 소저. 진정하세요 여기 지금 밖이고 저 앞에 다른 사람도 있어요."
"아, 알아요. 다른 곳도 아니라 화산에서 그런 일을 저지를 수는 없죠. 지금 가라앉히고 있어요."
'..화산이 아니었으면 저질렀어?'
"여기가 그냥 시장 정도였으면 골목에 밀어 넣고 하는 거였는데.."
"..."
이제 더 이상 바깥도 안전 지대가 아니구나.
어째 풀어주면 풀어줄수록 더 성욕이 늘어나는 것 같은 당아영의 상태를 보면서 한참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멀어서 듣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멈칫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쉰 순간 앞서가던 여인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더니
"사이가 각별하신 건 알겠지만 화산 내에서는 조금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싸늘한 눈빛으로 나와 당아영을 내려다봤다.
"흐, 흠. 젊은 애들이 그러면 그렇죠."
그 와중에 여소천은 옆에서 헛기침을 하고 있었고.
"검후님의 거처로 가는 길이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지만 젊음의 혈기를 억누르고 수련에 열중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산입니다. 속세에서는 상관 없지만 이곳에선 조금 자제해 주시길."
"...넵."
"죄송합니다.."
-쭈글
혼났다.
침울해진 건 당아영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 둘 모두 약간 찌그러진 상태로 힘없이 여인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그런 우리 상태를 본 건지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꽤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으신데 부디 무사히 백년해로 하시길."
"푸흡!"
"뭐, 뭐요?!"
"네?!"
여인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또 사레에 들렸고 여소천은 크게 당황하며 당아영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 정말 잘 어울려요? 정말요?"
"자, 잠깐만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저런 게 뭐가 어울린다고! 저런 싸가지 없는 년보다는 제가 훨씬 더 낫.."
"...청뢰검님?"
"..을 것 같다는 거죠! 물론 저는 저 두 명의 사이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관련도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뭔가 갑자기 난장판이 된 분위기로 수많은 말이 오고 가며 우리는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갔고
"다 왔습니다. 이곳이 그분이 계시는 거처입니다."
어느덧 검후님이 계신다는 장소로 도착할 수 있었다.
"우선 제가 인사를 드릴 테니 반응이 돌아오면 그 후에.."
-쾅!
"어이 검후! 당신이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 데려왔으니 빨랑 나와봐요!"
"..."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그냥 쾅 열어버린 여소천이었다.
"..저거 뭐라고 안 해요?"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웠던 전우라고 하셨으니 이 정도는 무례도 아니겠죠."
"또 전처럼 자다가 한 시진이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저번에는 한 시진을 기다렸어요?"
"흠흠."
솔직히 이 여인도 한 시진이나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문을 그냥 열어버린 여소천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검후님의 거처로 들어갔고 쉽게 검후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넓은 방의 가운데에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있는 모습.
천천히 닫힌 눈이 열리며 검후님의 푸른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지만 확실히 전과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느꼈던 청명한 푸른빛이 아니라 어딘가 탁하게 느껴지는 푸른빛.
"아.."
어딘가 기운이 없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검후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또 이 꿈인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거의 내 앞까지 다가온 뒤에
"어차피 꿈이라면.."
-쿵!
내가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내 시야가 뒤집힌 후였다.
"조금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그런 내 몸의 위에는 어느새 검후님이 올라 타있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