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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점쟁이로 살아남기-141화 (141/250)

[141화] 8장-삼자대면

"사, 사이가 좋은 건 알겠지만 대낮부터 그런 짓은 자제하세요! 그것도 손님을 밖에 두고!"

"죄송합니다.."

여소천은 우리 둘을 앉혀 놓고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충 레퍼토리는 나이 많은, 고지식한 도사들이 할법한 그런 종류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말하면서 본인도 민망했는지

"무, 물론 제가 안 좋은 순간에 찾아온 것 같긴 하지만 대답 정도는 할 수 있? 었..잖아요? 그, 그러니까.."

점점 말에 힘이 없어지고 횡설수설 하기 시작했다.

"사, 사실 그게 나쁜 일 자체는 아니죠? 음양의 조화고.. 결국 세상을 순환시키는 원리니까 오히려 세상을 위하는 일이긴 한데.. 열중하다 보면 정신이 팔려서 다른 소리도 잘 못 들을 수 있고.. 또.."

"..점점 말이 산으로 가는 거 같은데요."

"당신은 조용히 하세요! 그거 하나 못 참는 조루주제에!"

"커헉!"

말 한마디 했다고 돌아온 거의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수준의 언어폭력에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아니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요? 보통 그런 상황에서 들키면 깜짝 놀라서 쾌감이고 뭐고 오히려 다 식어버리는 게 보통 아니에요? 그 상황에서 뭐가 좋다고 그대로 토정하는건데요? 자제력이 그렇게 없어요?"

"쿨럭.. 쿨럭.."

여소천의 말이 주먹이 되어 명치를 몇 번 씩이고 가격하는 상황에 정말 입으로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수준 높은 무인은 손을 쓰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 이런 거였나.

살면서 말 만으로 이 정도로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실제로 HP가 깎여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내 상태를 알아본 걸까

"자, 잠깐만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당아영이 팔로 나를 가로막으며 여소천에게 대항을 시작했다.

그래, 역시 나를 도와주는 건 당아영 뿐..

"조루인게 잘못은 아니죠! 몸이 민감하고 싶어서 민감한 것도 아니고!"

"커흑!"

브루투스 너마저!!!!

"그리고 조루면 뭐 어때요! 대신 정력은 좋다구요! 사정해도 강도도 크기도 그대로 계속 즐길 수 있는데 그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잖아요?!"

-부들부들..

믿었던 당아영에게까지 배신 당한 뒤 나는 바닥에 쓰러져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아. 밑바닥에도 밑바닥이 있다는 게 이런 걸 의미하는 거였구나.

이미 부서질대로 부서졌다고 생각했던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이제 가루를 넘어선 무언가로 부서지는 게 느껴졌다.

자존심과 함께 수치심까지 같이 깎여나가서 더욱 더 뼈아프게 느껴졌다.

"에, 에? 네? 지, 지금 뭐라고.."

"그리고 청뢰검님도 할 말은 없을텐데요! 다 들었거든요! 두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예?!"

그 와중에 결국 대놓고 폭파 버튼을 눌러버리는 당아영의 목소리를 듣고 앞으로 펼쳐질 난장판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

.

둘 사이에 한참 동안 논쟁이 오간 뒤 때마침 울린 내 배꼽시계를 들은 당아영이 우선 식사와 함께 휴전을 제안했다.

급하게 1인분을 더 준비한 뒤 우리는 식탁에 앉았고

-달칵

"...네. 우선.."

우리 중 연배(?)가 가장 높은 여소천이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과는 제가 먼저 해야겠죠. 어쨌든 주인 허락 없이 멋대로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저니까요."

-꾸벅

여소천은 그렇게 말하면서 꽤나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혹시 무슨 속셈.."

평소 여소천의 성격을 아는 나로서는 당연한 의심이었지만

-퍽!

"..."

그 순간 탁자 아래로 주입된 예절(?) 덕분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었다.

"죄송해요. 감각에는 분명 안에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한데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으니 저도 모르게 답답해서 그랬네요."

"하하 괜찮아요. 저도 귀를 제대로 열고 있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까요."

뭔가 무섭다.

분명 서로 웃고 있는 표정인데 웃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파직

마치 눈빛이 실체를 가지고 부딪히면서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 같은..

아 이건 여소천이 일으키는거구나.

...

"이런 일에 내공 일으키지마요?!"

"그래서, 일단 사과도 했으니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죠."

"아니 제 말은.."

"네. 문 수리비 정도야 이야기할 시간이 아까우니까요."

"..."

하, 인생.

이래서 사람은 힘이 있어야 한다.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있다면 담배라도 한대 피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속으로 투덜대면서 내 몫의 차나 홀짝이는 사이 여소천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일을.. 들으셨다고 했죠?"

"네. 유적을 탐사하다가 청뢰검님이 미약에 당해서 덮치셨다고."

"...하아."

여소천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나는 말없이 여소천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실제로 헤어지기 전에 여소천에게 말해 놓은 게 있었으니까.

"그렇게 안 들킬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언제 들켰어요?"

"돌아온 당일 침대 위에서요."

"...믿은 게 잘못이지."

-쯧

-움찔!

여소천의 혀 차는 소리에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아니 잠깐만. 근데 왜 내가 죄인인 거 같지.

강간 당한 건 난데.

대충 이런 불만을 밖으로 표출해봤지만 동시에 돌아온 둘의 대답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당신이 먼저 유혹했으니까요."

"야한 당신이 잘못한 거니까요."

"...네?"

순간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은 대답.

보통 남자가 여자한테 들을 말이 절대 아닌 말이었다.

"당신 본인은 자각 못하는 거 같은데 당신 무의식중에 자꾸 여자를 꼬시는 경향이 있어요. 당신 본인은 그냥 평범한 칭찬, 간단한 접촉, 사회생활 정도로 생각하는 거 같은데 그걸 받아들이는 여성은 그 정도로 느껴지지 않거든요."

"몸에서 이상하게 야한 냄새도 나는 것 같고요."

"맞아요. 체취? 체향? 그런 게 이상하게 맡으면 뭔가 중독성이 있고 몸이 달아오르는 게 진짜 야한 기분이 든다니까요? 언제는 한번 채취해서 향수로 만들어볼까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어요."

"그걸 본인이 알고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몰라서 여기저기 계속 꼬리를 치고 다니니.."

방금 전까지 서로 기싸움을 하던 두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의기투합해서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듣는 내 정신 상태는 물음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거지?

"저기.. 지금 저만 대화를 못 따라가고 있는 거 같은.."

"당신은 몰라도 돼요."

"맞아요."

-시무룩

내가 고개를 떨구고 반쯤 식어버린 반찬이나 깨작이고 있는 사이 두 여성진은 언제 싸웠냐는 듯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거 아세요? 탐사 도중에도 먼저 유혹했다니까요? 침낭을 두고 온 것 같다길래 당신보다는 제가 몸이 튼튼하니까 그냥 제 걸 쓰라고 넘겨줬더니 같이 쓰자는 거 있죠?"

"그,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래서 기껏 같이 자줬더니 잠꼬대로 제 가슴을.."

...저 여자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침낭이 없어서 같이 자자고 했던 것 같긴 했는데 저런 일은 기억에 없었다.

그리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무슨 아기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잠꼬대로 가슴을 빤단 말인가.

'음해가 너무 심하네.'

속마음은 이랬지만 분위기상 내가 끼어들 수가 없어서 반론을 할 순 없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대화가 오갔고

"의외로 말이 통하는 후배였네요."

"저도 청뢰검님이랑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내가 식사를 다 끝나갈 때쯤 둘이 악수를 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화 끝났어요?"

"아, 당신은 못 들으셨어요?"

"대화에 끼워주지도 않고.. 그냥 배도 고프고 해서 밥이나 먹었죠."

"대화는 잘 끝났어요. 그렇죠 청뢰검님?"

"물론이죠 독봉."

아까까지만 해도 기운까지 일으켜가면서 싸우던 둘이 맞나 싶었지만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아무 질문이나 내뱉었다.

"그러면 결혼은 어떻게 돼요?"

"..."

"..."

그리고 질문한 순간 깨달았다.

그냥 닥치고 있을걸 그랬다고.

"후..후.. 물론 감히 까마득한 선배님을 앞설 수는 없겠지만 청뢰검님은 곤륜에 적을 두고 있는 도사시잖아요? 제가 알기로 곤륜의 도사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 데요?"

"아하하..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꽤 옛날에 있던 규율이네요. 그 규율은 없어진 지 제법 됐거든요."

"혹시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있을까요?"

"방금 전에요."

"후..훗..."

참고로 중원은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였다.

'첩'에는 따로 제한이 없는 걸로 알지만 결국 '처'는 한 명.

게다가 현대 지구와 다르게 성적으로 엄격한 분위기 세상이라 몸을 섞은 남녀는 사실상 결혼까지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당연히 '섹프' 따위의 개념은 없고

마음에 들지도 않는 사람한테 억지로 강간당한 뒤 어쩔 수 없이 혼인을 올려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내 기준에선 사극에서나 볼법한 내용도 이 세계에서는 꽤나 현실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내 말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가 본처고 누가 첩이냐.]

"..."

-삐질삐질

와 진짜 어떻게 질문을 해도 이따구로 하지.

다른 좋은 질문도 많을텐데 그 많고 많은 것 중 하필 저거였다.

사실 저런 해석을 의도한 건 아니고 정말 순수하게 그래서 결혼 문제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아무리 봐도 지금 둘의 모습을 보면 저렇게 해석한 게 분명했다.

"만나기도 제가 먼저 만났고.. 몸을 섞은 시점도 제가 훨씬 앞인데.. 혼인도 제가 먼저 해야 맞지 않을까요?"

"요즘 후기지수들은 선배에 대한 예우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요? 당신이야 기억 못하겠지만 제가 사천당가에 도움을 준 적도 꽤 있거든요. 저한테 목숨 빚을 진 당가 무인만 해도 족히 수십 명은 될텐데.."

"저런.. 만약 당가의 '가주'나 그 '후계자'였으면 빚을 갚을 의무가 있겠지만 저는 그저 '아버지'의 '딸'일 뿐이라서요."

"...사천당가 가주가 자식 교육을 정말 제대로 시켰네요?"

"아버지께서는 아직 스스로 많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자기도 오래 살긴 했지만 진짜 오래 산 선배님들의 삶의 지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이 씨ㅂ"

"잠깐 스톱!!!"

방금 'ㅂ'까지 나왔어!! 내가 들었어!!

"아니 스톱이 아니라 멈춰! 아무튼 멈춰요! 이러다 칼부림 나겠어요!"

"...저는 한번쯤 대련 정도는 해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파지직!

"그.. 소천님은 일단 기 흘리는 것부터 좀 진정하고요.."

"그치만 저 어린 년이 비겁하게 나이 얘기를 꺼내잖아요!! 새파랗게 어린 년이!! 제가 저 나이 땐 산에서 수련만 하고 있었는데!!"

"어휴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반로환동 했잖아요. 애초에 처음부터 늙지도 않았다고 했었고. 그러니까 진정하죠 진정."

최종병기이자 여소천의 역린인 나이 얘기를 꺼내버린 당아영에게 분노한 여소천을 간신히 진정 시키고 있자 여소천이 한참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당신이 고르세요."

"....................네?"

"당신 부인이잖아요? 당신이 고르는 게 형평성에 맞겠죠. 우리끼리 다투는 것보다."

"어..어.."

"네. 그러고 보니 그게 낫겠네요. 당신이 고르세요. 당신 부인이잖아요."

"소저까지?!"

순식간에 나에게 떠넘겨진 폭탄.

한쪽에선 여소천이 눈에서 번개를 뿜으면서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선 당아영이 웃으면서 소매 안쪽으로 수상한 약병을 내비치고 있었다.

차마 어느 한쪽도 고르지 못하는 상황.

-쿵쿵!

그 순간 현관문을 두드린 누군가의 손길은 내게 하나의 동앗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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