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250)

지금까지 나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 암기를 줄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당아영.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그동안 은혜를 많이 입기도 했고 약혼..한 사이니까 이 정도 선물은 해주는 게 도리에 맞을 거다.

주변에 알고 지내는 사람 중 일단 제일 약한 사람이 당아영이기도 하고.

-힐끔

'...'

시선을 내려 성인 남성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가느다란 팔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원.

[...나... 못... 데..]

'음?'

잠시 내 몸을 보고 있는 사이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서 시선을 올리자

[나도 못 받았는데.. 나도 용사님한테 선물 하나 못 받았는데.. 겨우 만난 지 이제 2년 된 여자가.. 나도 용사님..]

"히익.."

성녀님이 화면 너머에서 온몸으로 어두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동안 지켜봐 놓고 겨우 2년에 역전 당하는 나 같은 쓰레기는 죽어야해.. 내가 없는 편이 용사님도 행복할 거야.. 손 한번 못 잡아주는 나 같은 여자는..]

"왜, 왜 그러세요! 진정하세요!"

[용사님.. 사랑했어요.. 부디 다음 생에서는 용사님과 같은 세계에서..]

"아, 알았어요! 뭘 원하는데요! 뭐라도 말 해봐요!"

갑자기 어디선가 가져온 밧줄을 천장에 매달고 있는 성녀님의 모습이 화면 너머로 비치자 기겁하며 그녀를 말렸다.

[...용사님이랑 데이트하고 싶어요.]

"못하잖아요."

[..그러면 대신 섹..]

"그것도 못하잖아요."

[...결혼..]

"왜 점점 단계가 더 올라가는 거 같지."

[해주시나요?!]

"근데 그것도 못하잖아요."

[아아악!!]

성녀님이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쥐어 뜯었다.

..분명 생긴 건 고귀하고 성스러운 아가씨처럼 생겼는데 어째 하는 행동은..

[우우우.. 내가 먼저 발견했는데..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뭔가 무례한 말이 생각나서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

[오타쿠 아니에요.. 피규어나 베개가 있긴 하지만 아니라구요..]

...아. 생각 읽히지.

........

아니 그런 게 왜 있는데요?!

이후 토라진 성녀님을 위로하기 위해 성녀님이 원하는 여러가지 포즈를 취해줘야 했지만 피규어나 베개는 처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장가 가기는 글렀다.

-털썩

[하아아아.. 그러면 용사님! 저는 이만 가볼 테니 다음에 또 봬요! 무사히 살아남아주세요! 늘 응원할게요!]

나는 사라진 상점창을 뒤로 한 채 수치심에 몸을 떨고 있었다.

"내가.. 내가 왜 그런 꼴을.."

-벌컥!

"돌아갈 때 쓸 마차를 구했어요! 가능하면 빨리 출발할 예정인데 괜찮.. 뭐죠 그 순정을 짓밟힌 여인 같은 모습은?"

"...이제 장가 못 갈 거 같아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잔뜩 흐트러져 있던 옷을 고쳐 입은 다음 몸을 돌려 여소천을 바라봤다.

"이제 여기서 볼일은 다 끝났어요?"

"네. 제 검도 찾았고, 혈교를 유인할 신물도 확보해 놨으니까. 돌아가서 준비를 마친 다음 적당한 떄를 잡아 공표만 하면 되겠죠. 그들을 유인할 수 있는 몇 없는 기회니까."

혹시 까먹었을 까봐 다시 설명하자면 여소천과 내가 세운 계획은 이러했었다.

1.내 능력으로 신투의 비고를 알아낸 다음 필요한 물건을 미리 확보한다.

2.신투의 비고에는 과거 혈교의 신물도 잠들어있다. 비록 다른 세계에서 온 언데드들에게 잡아먹혔을지라도 그들이 혈교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이상 신물을 무시할 순 없다.

3.그러니 신투의 비고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널리 알려서 혈교도 반응하게 한 다음 그들을 유인해서 일망타진한다.

"제가 생각했지만 정말 완벽한 계획 아닌가요?"

"..완벽한진 모르겠지만 뭐.."

굳이 흠을 잡을 곳도 없었다.

어차피 나는 전쟁이니 전략이니 그쪽엔 문외한이라 뭐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는 여소천이 경험자니까 그냥 얌전히 따르는 게 낫겠지.

살아온 세월의 차이도 어마어마 하니까 아무래도 삶의 지혜 같은 게..

"..."

"...왜요. 뭐요."

"뭔가 갑자기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는데요."

"기분 탓이겠죠."

검후님도 그렇고 여소천도 그렇고 어떻게 나이 얘기만 하면 속으로 해도 귀신같이 알아듣는 건지 원.

역시 여자는 무섭다.

* * *

"아으으.. 허리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마차행.

오랜만에 밟은 섬서의 땅 위에서 나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허리 통증을 느끼며 허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에휴. 사내가 듬직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그거 남녀차별이에요.."

"또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하신다."

여소천이 내 뒤로 다가와 등을 주물러줬다.

-파직.. 파직..

"흐아으으.."

"좀 시원해요?"

"그쪽에서 조금 더 위.."

"이쪽이요?"

"으응.."

손바닥에 얇게 전류를 펼쳐 근육을 풀어주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야릇한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괜히 누가 들으면 이상한 상상 하겠네요."

-꾸욱 꾸욱

"흐으.."

"신음 좀 참으라니까요!"

"입을 막아도 흘러나와요.."

"..진짜 문란한 몸뚱이네요."

그렇게 여소천에게 마사지를 받고 난 뒤 우리는 헤어질 준비를 했다.

"당신은 이제 독봉 집으로 갈 거죠? 데려다 줄까요?"

"...괜히 의심 받을 수 있으니까 혼자 갈게요."

잊으면 안됐다.

여소천과 나는 비고에서 사고를 쳐서 몸을 섞었다.

정확히는 여소천이 일방적으로 덮친 쪽에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섞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당신만 조심하면 돼요 당신만. 저는 들킬 일 없으니까."

아무리 당아영한테 전에 들은 말이 있다고 해도 바로 '어쩌다 보니 여소천이랑 잤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최대한 숨기고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나 밝히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다.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후기지수인 독봉에 정파의 영웅 두명이라.. 정말 화려한 경력이네요. 밝혀지면 희대의 색마로 이름 좀 날리겠는데요?"

"두 명은 그렇다 쳐도 강간한 그쪽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크흠."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는 여소천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죠. 최대한 안 들키게 해볼게요."

"그, 그렇게 하세요. 저는 검후랑 이후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쪽도 검후님한테 안 들키게 잘 해보세요."

"에이.. 설마 그런 여자한테 들키겠어요. 그 꽉 막힌 여자는 그런 가능성도 생각 못할 걸 요."

"..뭐 저보단 그쪽이 더 잘 알겠죠."

나보다 옛날부터 검후님을 알고 있던 여소천이니 알아서 잘 할 거다.

...아마도.

이후 여소천과 작별 인사를 나눈 나는 당아영의 집으로 향했다.

'들키지말자들키지말자들키지말자들키지말자..'

-후우..

문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침을 꿀꺽 삼키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

"소저 저 왔어요."

-우당탕!

문을 두드린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한 소란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고

-벌컥!

"와, 왔어요? 온다고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편지 보냈잖아요."

"아하하.. 새,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와서요."

왠지 저번에도 한번 겪어본 적 있는 것 같은 익숙한 장면을 뒤로 하고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저, 저기 있잖아요.."

"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자 당아영이 뭔가를 망설이는 듯이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포옹 한번.."

"..뭐, 그래요."

-포옥

"아?"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당아영의 허리에 손을 감고 끌어안았다.

항상 그렇듯 키 차이 상 내가 안기는 형태에 가까웠지만.

"어? 어??"

"왜 그렇게 당황해요? 자기가 해 달라고 해 놓고."

"그.. 그게.. 당신이 애정행각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건 또 무슨 소리래."

"당신이 먼저 포옹 같은 거 거의 해준 적 없잖아요. 애교 같은 건 자주 부려도.."

당아영의 말에 저게 무슨 소린가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뭔가 그랬던 것 같긴 하다.

내가 먼저 당아영에게 적극적으로 입을 맞추거나 포옹을 하는 등 그런 일은 거의 없던 것 같긴 한데..

"...밤에 그렇게 많이 당하는데 굳이 제가 더 할 필요가 없지 않아요?"

아마 그 이유는 내가 평소 당아영에게 밤에 질릴 정도로 애정행각을 당했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평소에 내가 먼저 굳이 그런 걸 해줄 필요성을 못 느낀 거고.

"...겨우 그런 이유였어요?!"

"겨우라뇨. 제가 평소에 얼마나 고생하는데."

"아, 아니.. 저는 친구들이 애인 얘기 할 때마다 왜 우리 애인은 저런 거 안 해주나 고민했단 말이에요.."

당아영도 그런 고민을 하는구나.

그녀의 위치 상 고민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근데 제가 평소에 애교를 자주 부려요?"

"...부리는 거 아니었어요?"

"부린 적 없는데요..?"

진짜 당아영한테 애교를 부린 적이 없는데 평소에 애교를 부렸다니.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소저 눈에 콩깍지라도 씌었나 보죠 뭐."

"아닌데.. 분명.."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밥이나 먹죠. 일부러 시간 맞춰서 온 건데."

괜히 부끄러운 감정이 몰려와서 손으로 얼굴에 바람을 일으키면서 말을 돌렸다.

포옹을 풀고 당아영에게서 등을 돌리려다가

-홱!

"자,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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