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250)

[아아아아아!!!!]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바, 반칙이에요! 이건 반칙이에요! 이러는 게 어딨어요!! 그런 방법으로 우회해서 즐길 건 다 즐겨 놓고 간섭력은 전혀 주지 않는 게 어딨냐고요!!]

"성녀님..?"

[기껏 용사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찌걱

왠지 어디서 물기 섞인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뭔진 모르겠지만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요.]

"..."

[...잠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올게요.. 죄송해요..]

"어.. 네.."

[녹화해둔 건 있으니까 그거라도..]

"네?"

-팟

뭔가 마지막에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았는데 성녀님이 순식간에 사라져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뭐지?"

여소천도 그렇고 성녀님도 그렇고 오늘따라 성녀들이 쌍으로 이상하다.

멀뚱멀뚱 성녀님이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고 있다가 시선을 다시 아래쪽으로 내렸을 때

"...아."

이미 퉁퉁 불어버린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성녀님이 다시 나타난 건 시간이 꽤 흘러 점심때가 다 되어갈 때쯤이었다.

[흠흠. 아까는 실례했어요. 저도 모르게 너무 침울한 나머지 그만..]

"...괜찮아요. 성녀님도 개인적인 시간은 필요한 법이니까."

뭘 하다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녀님은 오히려 좀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는다면 거의 하루 24시간 내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니까.

[후훗. 저는 용사님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답니다.]

"은근슬쩍 작업 걸지 마시고요."

[여인의 마음을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는 건 제가 원하는 용사님의 모습이 아닌데요!]

"잘 됐네요. 이참에 다른 용사좀 찾아 보세요."

[아쉽게 됐네요! 이제 와서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거든요!]

"쳇."

개인적으로 도움은 감사히 받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종마행은 사양이다.

그렇다고 정말 다른 용사를 찾아보겠다고 떠나버리면 나는 상점창을 쓸 수 없게 되니까 여러모로 곤란하게 되는 셈이지만

'어떻게 지구로 귀환만 한 다음에 연락을 끊는..'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뽑아 먹을 것만 뽑아 먹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성녀님이 저한테 원하는 한 가지가 제 인생이잖아요."

[어쩌면 제법 로맨틱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제 인생을 용사님에게 드릴 테니 용사님도 제게 인생을 바치는..]

"퍽이나."

애초에 저런 판타지 배경의 달콤한 로맨스가 아니라 아포칼립스 배경의 질펀한 떡타지인데 뭘 로맨틱하게 포장하고 있단 말인가.

남자가 멸종한 세계에서 나 혼자만 남자라니

현실적으로 온몸이 구속 당해 하루 종일 정액만 짜일 종마로 전락할게 뻔하지 않은가.

애초에 내가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성녀님한테 있었다.

[..그, 그건 말이죠..]

"됐고, 물어볼게 있어요."

지금까지도 계속 했던 이야기 대신 오늘 당장 궁금한 걸 질문했다.

"..혹시 저 자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요?"

여소천도 그렇고 성녀님도 그렇고

평소 둘 모두 내게 숨기는 게 많다는 건 짐작 했지만 오늘은 수상함의 정도가 도를 넘어섰다.

내가 아무리 여자의 마음은 잘 모른다지만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100% 무슨 일이 있었다.

"제가 평소에 여소천한테 여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욕을 먹긴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하거든요!"

[그, 그게 말이죠.. 아하하..]

눈에 띄게 당황하며 시선을 피하는 성녀님.

그 모습을 보자 머리 위에 전구가 켜지 듯이 감이 팍! 하고 왔다.

"..혹시 저 자는 사이에 면간 당한 거 아니죠?!"

갑자기 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과 함께 양손으로 가슴팍을 끌어안았다.

[..와. 이건 여러 의미로 대단하네.]

"뭐가요?!"

[아, 아뇨.. 용사님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제가 모시는 여신님의 이름을 걸고.]

뭔가 성녀님의 표정에서 순간적으로 차가운 눈빛이 보였던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흠흠. 아무튼 그 얘기는 뒤로 미뤄두고 지금 당장 할 얘기만 해보죠.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니까요.]

"성녀님은 한가하지 않아요?"

[저야 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 용사님 곁에 있을 수 있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용사님이 그렇지 않잖아요? 당장 옆방에 있는 그녀도 그렇고.]

성녀님이 화면 안에서 손가락으로 옆방을 가리켰다.

..하긴. 오히려 시간이 부족한 건 내 쪽이지.

성녀님은 오히려 나를 24시간 관음 중일 만큼 시간이 넘쳐 흐르는 입장이었다.

[관음 아니거든요!]

"동의도 없이 24시간 지켜보는 게 관음 아니면 뭔데요?"

[..사랑의 스토킹?]

"앞에 '사랑'이란 단어를 붙인다고 범죄가 미화되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사랑의 CCTV..]

"아니 판타지에 CCTV가 왜 있어요."

보면 볼수록 이 사람 사실 판타지 출신이 아니라 지구 출신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구 문물들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지구에 대해서 공부한 게 있다고 해도 게임도 알고 CCTV도 알고 말장난 치는 것도 그렇고

"..혹시 지구에서부터 저 스토킹 했었어요?"

[치직.. 앗 용사님 갑자기 통신이.. 칙..]

"맞구나?!"

생긴 것만 멀쩡하지 이 사람도 보통이 아니네?!

그러면 나 하나를 지금 최소 10년 이상 스토킹 중인거야?! 지구에서부터?!

[일편단심이라고 해주시죠. 에헴.]

"일편단심도 그쯤 되면 무서운데요.."

[도망간 용사님이 나쁜 거니까요..!]

"저도 딱히 도망가고 싶어서 도망간 건 아닌데요?!"

잘난 천지신명 때문에 도망 당하게 된 거지 딱히 내 의지로 도망간 건 아니었다.

아니 이쯤 되면 구해줬다는 말이 마냥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건 아니야.'

내가 당한 걸 생각하면 그건 아니었다.

음.

구해줬다는 걸 믿으려고 해도 내가 이 세상에서 당한 게 얼만데 그걸 순순히 믿겠는가.

[자, 기억하세요 용사님. 이곳이야말로 용사님의, 용사님을 위한, 용사님에 의한 천국, 낙원, 유토피아, 파라다이스. 인세에 다시 없을 이상향이라는 것을.]

"그렇다고 이쪽도 신뢰가 가지는 않네요."

[왜죠?!]

그냥 그쪽이나 이쪽이나 라고 보는 게 맞았다.

역시 그냥 양쪽에서 받을 것만 받아먹는 저울질을 하면서 지구로 튀는 게 아무리 봐도 최선의 계획이었다.

..가기 전에 스승님이랑 대화도 좀 해보고.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도 데리고 귀환할 수 있나요?"

[지구로의 귀환은 힘들어요. 대신 소환 의식이라면 저희가 어떻게든 힘을 써보면 한 명 정도는 더 불러올 수 있을..]

"수작 부리지 마시고요."

[쳇.]

어떻게 보면 참 순수해서 안심이라고 해야 하나.

대놓고 나를 어떻게든 끌고 오려는 게 모든 언행에서 티가 나서 오히려 대하기 편했다.

[흥, 됐어요. 저도 삐졌어요. 그냥 물건이나 추천해드릴 테니까 그거나 사고 가세요.]

"..안 아끼고요?"

[아끼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좋을 물건들만 추천해드릴 테니까요. 괜히 아끼다가 변고라도 생기면 그쪽이 더 곤란하니까 쓸 때는 써야죠. 가뜩이나 위험한 세계인데.]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힘들게 모은 포인트인만큼 조금 아깝긴 했지만

[아끼다가 죽으면 죽도 밥도 안돼요?]

"..."

눈을 질끈 감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성녀님이 추천해준 물건은 총 2가지.

[태양빛의 브로치]

[태양이란 만물의 근원이자 세상에 생명을 순환시키는 어머니. 진실된 생명은 따스하게 감싸되 거짓된 산 것들은 태양 앞에 감히 서지 못할 지어다. 이것은 생명의 여신 ■■■■의 이름 하에 펼쳐진 율법이니 죽되 죽지 못한 악귀들이여, 우리들의 빛은 그대들을 태워 죽여 진실된 죽음을 선사하리라. -3대 교황. 세르딘 브라이트-]

[신성한 밧줄]

[이교도를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죠! 우선 밧줄로 묶습니다! 그 뒤 호수에 집어 던집니다! 마땅한 호수가 없다면 적당한 깊이의 수조도 괜찮습니다! 이후 만일 밧줄을 끊고 나온다면 그것은 사이한 이교도의 힘으로 풀어낸 것이 분명하니 창으로 찔러 기름과 함께 불태워 죽입니다! 네? 못 풀면 어떡하냐고요? 괜찮습니다! 사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물고기였을테니까요! -한 이단심문관-]

"뭔가 간단한 네이밍에 비해 설명이 무서운데요."

[아무래도 전쟁 당시에는 많은 분들이 정신적으로 지쳐있었으니까요..]

아니 교황은 그렇다 쳐도 이단심문관은 거의 팀킬 아닌가?

손에 들려있는 하얀 밧줄을 찝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 밧줄의 효과는 그냥 쉽고 간단했다.

자동 수복 기능이 달린 엄청 단단한 밧줄.

[그 세계 기준으로 초절정의 고수라도 쉽게 끊을 수 없을 거에요. 마력.. 그러니까 내공 운용을 방해하는 기능도 있으니까 여러 곳에 요긴하게 쓰일 거에요. 일단 한번 제압만 하면 어느 정도 자동으로 구속하는 성질까지 있으니 힘이 약한 용사님이어도 사용하는 데는 문제 없을 거고요.]

'초절정까지라..'

자연스럽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경지를 생각하면서 이 밧줄이 묶을 수 있는 대상을 생각해봤는데

'...당아영?'

아무리 생각해도 당아영 혼자였다.

검후님:어림도 없음

여소천:어림도 없음2

스승님:초절정은 넘을 거 같음

'...분명 절정도 약한 건 아닌데.'

오히려 그 나이에 절정고수면 천재라는 말도 부족하지만 하필 비교 대상들이 대상들이라 약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물건은 붉은색의 태양마크가 인상적인 브로치였다.

은은하게 따뜻한 빛을 내뿜고 있는 브로치.

[인간의 생명력은 강화시켜주고 언데드에겐 쥐약인 여신님의 태양빛을 내뿜는 브로치에요. 한순간에 강한 빛을 내뿜어 섬광탄 대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만약 그 대상이 뱀파이어라면..]

저 정도 설명 만으로도 어떤 물건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 뱀파이어랑 마주칠 일이 생기면 쓰면 되겠네요."

[바로 그거죠!]

성녀님의 말에 따르면 세계와 그를 다스리는 신이 달라서 그런 건지 이 세계의 태양빛은 뱀파이어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브로치에서 나오는 태양빛은 여신의 권능이 온전히 담겨있는 일종의 성물이기 때문에 뱀파이어들에게도 통할 거라고.

"하아.. 이래서 언제쯤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

한숨을 쉬면서 다시 상점창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얼마에요?"

[네? 아, 300포인트요.]

"이것도 살게요."

[요, 용사님? 비록 그 물건이 가격에 비해서 좋은 물건이긴 하지만 용사님한테는 별로 도움이 안되는..]

"줄 사람이 있어서요."

구매 버튼을 누르자 내 손 위에 검은색 암기가 나타났다.

모든 빛을 흡수하기라도 하듯이 칠흑 그 자체의 색을 가지고 있는 암기였다.

[두번째 그림자]

[형체가 있는 것은 모두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지울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그대의 그림자가 그대의 목숨을 노릴 때. 그대는 무엇을 느끼는가? -로그 마스터-]

[설명만 보면 뭔가 엄청나 보이지만 그렇게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물건은 아니에요. 주인이 원하는 곳을 추격하고 자동으로 돌아오는 기능 정도가 전부죠. 이름에서 연상 되는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은 로그 마스터 본인의 능력이었던 데다 아무래도 암기라는 건 다른 무기보다 훨씬 주인의 역량을 많이 타는 무기니까요.]

겨우 300포인트 짜리에 엄청 거창한 능력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저 정도 기능이 마법 같은 것도 없는 이 세계에 딱 적당한 정도겠지.

"어차피 제가 쓸 무기도 아닌데요 뭐."

[..그분한테 드리려고요?]

"아시다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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