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250)

"어.. 그렇죠..?"

"그런데.. 만약 당신이 이 성격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면.. 고치려고 노력해 볼게요. 솔직히 말해보세요. 검후같은 성격이 취향이잖아요. 외모도 그렇고."

"으응.."

여소천의 말에 다시 고개를 반대로 기울였다.

성격을 고친다라.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네?"

"성격이 뭐 마음먹는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들어보니까 20년 전에도 그런 성격이었다더만. 이제 와서 뭘 바꾸려고 해요."

"그, 그치만 당신이.."

"저 딱히 검후님같은 성격이 이상형인 건 아닌데요?"

내 말에 여소천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이쪽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 내 이상형이 검후님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아, 아니었어요?"

"네.. 멋지고.. 성격도 좋고 상냥하신 분인 건 맞는데.. 이상형..까지느은..?"

애초에 딱히 이상형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스승님이랑 지내던 시절에는 사람 자체를 스승님밖에 못 만났었고

나온 뒤에도 어차피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연애는 꿈도 꾼 적이 없었으니까.

"그, 그러면 이상형이 뭔데요?"

"으음.. 굳이 생각해본 적 없긴 한데.."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말해보면

"저를 속이지 않는 사람..?"

"..."

"제일 중요한 거에요. 거짓말은 나쁜 거에요. 제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

머리에 알코올이 껴서 그런 건지 별다른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 저를 혼자 두지 않는 것 정도..?"

"으음.."

여소천이 복잡한. 뭔가 깊은 고민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도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자, 됐죠? 빨리 주세요. 현기증난단 말.."

여소천의 앞에 있는 내 잔을 향해 손을 뻗던 그 순간

-탁!

여소천이 양손으로 잔을 들더니

-벌컥벌컥!

"아아?!"

그대로 자신의 입속으로 내용물을 흘려보냈다.

기대하고 기다리던 술을 눈앞에서 뺏겨버린 상황

"콜록 콜록.. 자, 잠시만요.. 제가 설명할게요."

"...뭐가요."

"사, 사실.. 이 병에 약이 타져 있었어요.. 사실 비고에서 챙겨온 약을 이 술에.."

"왜 그랬어요?!"

"죄, 죄송해요! 제가 순간적으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바람에.."

여소천이 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여소천이 비고에서 남은 약을 챙겨왔고 그걸 술에 넣어서 나한테 먹이려고 했다는 것까지 알았다.

그런데 잠깐만.

"근데 그걸 당신이 마시면 어떡해요?"

"아."

"..."

술에 취해 몸도 마음도 흐트러진 상황.

나는 이 상태로 앞으로 몇 초 안에 여소천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내일 아침에 무사히 눈을 뜨고 싶다면.

"이, 일단 진정해요. 우, 우리 소천이 착하지.."

나는 상황을 빠르게 판단한 뒤 맹수를 다루듯이 그녀를 향해 양 손바닥을 내밀고 조심히 몸을 뒤쪽으로 뺐다.

"..."

"우, 움직이면 안돼요..  그렇지.. 일단 천천히 심호흡부터.."

"..제가 무슨 짐승이에요?"

"아."

다행히 아직 바로 제정신을 잃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리 당신이 무공을 모르는 몸이라고 해도 저를 그렇게 얕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저번에는 방심해서 그랬던 거지 고작 미약 따위에 당할 정도로 낮은 경지가 아니에요?"

"..정말요?"

"당연하죠. 그동안 수련한 세월이 얼만데. 내공을 이용하면 겨우 평범한 춘약 따위. 해독하는 건 일도 아니에요?"

여소천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자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여소천의 경지라면 고작 미약 따위에 당하는 건 말이 안됐다.

저번엔 함정에 걸리기도 했고 대처할 틈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바보도 아니고 한번 당하지 두 번 당하겠는가.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해독 시키고 있을 테니까 혹시 그동안 괜히 저 자극하지 마시고요."

"...바로 되는 거 아니었어요?"

겨우 평범한 춘약 따위를 해독하는 건 일도 아니라더니.

"그러면 특별한 춘약인가 보죠."

"아하!"

내가 그건 몰랐네!

머리 위로 전구의 불빛이 켜지면서 깨달음을 얻은 뒤 여소천의 말대로 괜히 그녀를 자극하지 않도록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 그녀를 자극할까 숨소리도 최대한 죽이고 몸을 완전히 굳은 채로 놔뒀는데

-삐질삐질

"...으응."

식은땀을 흘리면서 어딘가 야릇한 신음소리를 흘리는 여소천을 보자 불안감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다.

이미 전과(?)가 있는 만큼 그녀를 향한 신뢰가 절대 두껍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그녀에게 있는 신뢰란 작은 의심만으로도 금방 깨질 수 있는 수준밖에 안됐다.

'..미리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가만히 있으면 그녀가 실패했을 때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겁탈당할 게 분명했지만 그녀를 자극할 확률은 낮았다.

도망칠 경우 그래도 옆방으로 이동한 뒤 문을 걸어 잠그거나 1층으로 도망가버리면 무사히 밤을 넘길 수 있겠지만 괜히 그녀를 자극할 수 있었다.

어느 쪽이 좋은지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지옥의 이지선다.

'에이 그래도 경지가 있는데 겨우 약에 당하진 않겠지.'

'아니 근데 그러면 어제는 뭔데? 어제는 약에 당했잖아.'

'방심했었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지. 보통 약도 아닐 거고. 그래도 이번은 두번째니까 안 당하지 않을까?'

'어제랑 같은 짓 당하면 니가 책임질 거야? 얼마나 아팠는지 기억 안나?'

'..도망갈래?'

내면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던 사투도 결국 도망 쪽에 추가 쏠렸고

"...으윽."

여소천이 신음 소리를 내면서 눈살을 찌푸린 순간 결국 도망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벌떡!

그러나 내가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쾅!

"됐어요! 이제 제정신.."

"에?"

"어?"

여소천이 탁자를 세게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만 발이 탁자와 꼬여버린 나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탁자 옆으로 쓰러졌고

쓰러지는 와중에 여소천이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본 뒤 시야가 암전했다.

-쿵!

"에극.."

충격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여소천이 나를 붙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추락하는 방향을 조절해 내가 받는 충격은 최소화했다.

대부분의 충격을 여소천이 흡수하는 자세.

그 결과 여소천과 지금 내가 취하게 된 자세는

-물컹

"괘, 괜찮아요?"

"..."

가슴과 가슴이 맞닿으면서 뭉개지고 거의 몸을 완전히 밀착한 자세였다.

턱 아래로 여소천의 목이 보이는 상태.

아마 여소천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금방 일어날게요. 잠깐만 기다.."

내가 급하게 땅을 집고 일어나려던 순간

-덥석

갑자기 내 허리로 여소천의 팔이 감기더니

"스으으읍..."

"히익?!"

내 목에 코를 파묻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하아.. 스읍.. 하.."

"뭐, 뭐 하는 거에요 징그럽게?!"

"잠깐만..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요.."

"기, 기분 이상하니까 빨리 놔줘요!"

여소천의 호흡이 바로 옆에서 느껴져서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하아.. 하아아.."

"자, 잠깐만.. 좀.. 떨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히려 더 강하게 달라붙어 오고 떨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여소천.

나는 틈을 노리면서 온몸의 힘을 팔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떨어.. 지라고요!"

-팍!

그녀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품속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샤샤샥

그녀가 다시 껴안지 못하게 벗어나자 마자 바로 뒤로 물러선 뒤 손으로 내 몸을 끌어안았다.

이미 순결은 잃은지 오래인 몸이지만 뭔가 순결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뭐 하는 건데요! 왜 갑자기 냄새를 그렇게 킁킁.."

여소천을 노려보면서 신경질을 부리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다.

"..."

"...저기 분위기가 왜 그렇.."

여소천의 눈빛이 어제 봤던 그것으로 변해있었다.

약에 취해서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던 그 모습으로.

"...아하하. 이제 밤도 늦었고. 서로 취한 것 같으니까 저는 이만 제 방으로 가볼.."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탈출을 시도했다.

슬금슬금 다리를 움직이면서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소천에게서 거리를 벌..

"핫?!"

"?!"

"저, 정신 차렸어요! 네, 네. 어우. 큰일 날 뻔했네."

여소천이 갑자기 고개를 퍼뜩 들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확실히 목소리나 분위기나 평소의 여소천과 비슷해 보였다.

"괘, 괜찮은 거 맞죠?"

"네, 네.. 약 기운도 저항했고.. 저도 모르게 그만 천연 미약을 흡입하긴 했는데.. 간신히 버텼네요. 진짜 위험했어요."

여소천은 아직 정신을 마저 차려야 했던 건지 고개를 또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튼 이제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였기에 마음을 한층 놓고 손을 풀었다.

"그, 그러면 저는 다른 방으로 가볼게요.. 잘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봐요.."

"네.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 봬요."

여소천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내가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사이

-텁.

"?"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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