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250)

바로 방금 전 저 미약 때문에 큰일이 일어났는데 다시 미약을 이용한 함정이라니.

절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자 주변에 푸른 전류가 피어올랐다.

-파지직!

전류로 미약을 태우고 내공을 이용해 약의 기운을 차단하면서 떨어진 주머니를 향해 다가갔다.

열려있는 입구를 확인해보자 대부분 안에 있는 내용물을 흘린 것 같았지만 안에 가루가 조금 남아있었다.

"..."

여소천은 그 가루를 오묘한 몸으로 바라봤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어서 오세요 손님!"

"..술을 조금 사가려고 하는데 제가 술을 잘 몰라서요."

"아하! 그러면 여성 분들한테 인기가 많은 술인데.. 혹시 죽엽청은 아시나요? 근데 아무래도 진짜 죽엽청은 좀 비싸다 보니 그거랑 맛은 비슷하면서 가격은 좀 싼.."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까.."

-잘그락

"그냥 비싼 순서대로 적당히 섞어서 10병만 주세요. 이 정도면 아무리 그 사람이라도 충분히 마시겠죠."

갑자기 등장한 거물 손님 덕분에 일주일 동안 점장의 입꼬리가 귀에 걸리게 되었다는 건 아는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여소천이 술을 사러 간 동안 나는 객잔의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기 귀찮은 것도 분명 이유였지만 나보다는 그녀 쪽이 얼굴이 덜 팔렸다.

아니 정확히는 내 얼굴은 남한테 보이지도 않으니 팔리지도 않겠지만 수상한 망토를 껴입고 이상한 어둠에 가려져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사람은 적어도 중원에 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인상착의가 온 중원에 쫙 깔려있는 처지인데 밖에 나간다?

눈이 조금만 좋아도 내가 소문의 그 무면금귀라는 건 금방 들킬 것이다.

그리고 그건 방을 빌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객잔이 그렇듯이 1층엔 사람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고 2층부터 숙박 용으로 방을 빌려주는 시스템인데

결국 1층을 무사히 통과하는 게 관건이었다.

그래서 방을 빌릴 때는 망토를 벗고 들어왔었다.

나한테 얼굴을 가릴 수단이 망토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팬텀의 가면]

은둔자의 망토를 산 뒤에는 거의 쓸 일이 없던 물건인데 당아영에게 얼굴을 가리고 수련을 받을 때 사용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용자가 원하지 않는 한 얼굴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가면으로 은둔자의 망토에 비해 눈에 띄겠지만 맨 얼굴을 노출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스승님이 얼굴은 계속 가리고 다니라고 했었으니까.

'..사실 이미 많이 들키긴 했는데요.'

이제 와서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가리고 다니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얼굴이 들켜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가?'

유독 요즘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저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얼굴 때문에 화를 입을 거라고 했었으니까.

그나저나 남한테 술을 사오라고 시킨 다음에 방에서 기다리는 건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대부분 내가 가서 사거나 아니면 미리 준비해 놓은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술을 기다리는 건 또 처음이었다.

'여소천이 술을 잘 알려나.. 갈 때 뭐가 맛있는 거라고 말이라도 해줄걸 그랬..'

-덜컹!

"저 왔어요!"

-쿵!

여소천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기껏해야 서너 병 정도를 생각했던 나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위용.

"...그거 다 술이에요?"

"네? 네. 많이 사오라면서요."

지금 세보니까 10병이었다.

독한 술이 많은 중원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꽤. 아니 굉장히 살벌한 양이었다.

그것도 여러 명이면 모를까 겨우 2명인데 10병이면 술로만 배를 채우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아니 술을 배 터지게 먹지 않을까.

"..그거 다 먹을 수는 있어요?"

"당신이 먹는 건데요?"

"예?"

"왜요? 술 잘 먹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아무리 잘 먹어도 정도가 있지

안주도 없이 술 10병?

이 작은 몸으로?

여소천한테 떠넘긴다 해도 6~7병은 처리해야 할텐데

'..어제는 자지를 조졌으니까 오늘은 간을 조져버리겠다는 의미인가?'

점점 위쪽으로 올라오는 걸 보면 다음은 심장을 위협할지도 모르겠다.

한숨을 쉬면서 술 상자를 미리 세워 놓은 탁자 옆으로 옮겼다.

그래. 뭐. 10병.

이 비정상적으로 술이 센 몸과 함께라면 충분히 해볼 만 한 양이었다.

전에 검후님이랑 주점에 갔었을 때도 아마 10병 정도는 마셨을 거다.

중간에 필름이 끊어져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 그랬을 거다.

그러니까 뭐. 10병 정도면 충분히..

-쿵

"...이거 병이 좀 크지 않아요?"

"네? 그냥 이렇게 주시던데요?"

"뭐라고 주문했는데요?"

"비싼 걸로 순서대로 10병만 달라고요."

일반적인 술병보다 더 큰 크기를 가진 술병들을 보면서 혹시 여소천이 악성 재고털이를 당한 것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쿵!

"크으.."

입 안을 가득 채우면서 목을 찌르는 알코올 특유의 짜릿한 감각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각이던가.

못해도 한 달 이상은 됐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 이거지.. 이게 인생이지.."

"..그냥 쓰기만 한데요."

"원래 인생은 쓴 법이에요."

"..그런 말을 저보다 한참은 어린 사람한테 듣는 심정은 뭐랄까.. 굉장히 묘하네요."

-홀짝

여소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술을 조금씩 홀짝였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잔인데 그걸 또 나눠서 먹다니

"그런 건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그게 뭐가 그렇게 많다고 그렇게 찔끔찔끔 먹는 건데요!"

"웃겨요. 제가 먹는 다는데 그거 가지고 뭘 그렇게.."

"이래서 술알못들은..!"

그래도 검후님은 말하면 들어주기라도 했는데.

비슷한 위치의 두 사람인 만큼 성격 면에서 자주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두 사람한테 전부 강간을 당한 남자라는 게 뭔가 이렇게 보니 굉장한 업적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런 업적 따위 달성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소천이랑 다르게 검후님은 나를 치료해주려고 하신 거였고.

"그래도 술 맛은 좋은 걸로 잘 사왔네요."

-꿀꺽

그건 그렇고 술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처음에는 주점 주인이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술을 떠넘긴 거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까 일반 주점에서 취급하기에는 꽤 비싼 술이 맞았다.

아마 비싸서 안 팔리던 비싼 술을 여소천이 온 김에 한번에 처리해버린 것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주점에서는 안 팔리던 술을 처리해서 좋고.

우리는 좋은 술을 많이 얻어서 좋고.

그야말로 윈윈. 모두가 행복한 거래.

"술이 세상을 살리고 있어요.."

"..그쪽 술만 마시면 성격 이상해지는 거 알아요?"

"몰라 그런거.. 그냥 기분 좋아.."

근데 여소천이 나랑 술을 마신 적이 있었나?

'몰라.. 또 천기라도 읽었겠지..'

편하게 편하게 생각하면서 살살 올라오는 취기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풀어지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그래도 여자랑 같이 마시면 상대한테 집중은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여소천이 투덜거리는 표정으로 비어있는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조르륵 흐르면서 잔을 채우기 시작하는 투명한 액체.

-똑

"어."

"이것도 해치웠네요.."

또 병이 빈 것을 보면서 허리를 숙여 상자에 있는 병 하나를 꺼내려는 순간

"자, 잠깐만요!"

"?"

여소천이 다급하게 나를 말렸다.

"지, 지금 집은 그 병은 마지막에 먹죠."

"에..?"

"그, 그.. 주점에서 그게 제일 비싸고 좋은 술이라고 그랬어요! 원래 그런 건 맨 마지막에 먹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

그런 숨은 의미가 있었을 줄이야.

나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손을 움직여 다른 병을 들어 올렸다.

"좋아요! 바로 그 자세에요! 역시 마무리를 좋은 술로 해야지 기분 좋게 술자리가 끝나죠!"

"제, 제 생각도 그래요!"

"이히.."

-딸꾹

이제 절반 조금 넘게 해치운 것 같은데 벌써부터 취기가 올라온 게 느껴졌다.

그냥 별 이유 없이 기분이 좋고 표정이 풀어진다.

내공을 이용해서 취기를 억제할 수 있을텐데

어쩐지 여소천의 얼굴이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

.

.

"이제 마지막 병!"

-쿵!

9번째 병을 해치운 뒤 나는 발을 구르면서 마지막 병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마지막으로 먹자고 했을까.

이 비싼 술들 사이에서 그 정도면 분명 엄청 맛있는 술일 게 분명했다.

"제, 제가 따라드릴게요. 잔 주세요."

여소천이 병을 들고 내 잔을 가져가 내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주세-요!"

술이 전부 따라지기만을 기다리다 두 잔을 채운 뒤 나는 바로 여소천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여소천이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술 두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이거 마시기 전에 질문이 있어요."

"마시고 하면 안대요?"

"아, 안돼요. 대답해야 줄 거에요."

"...그러면 빨리 하세요!"

한시라도 빨리 술을 입에 들이붓고 싶은 마음에 여소천의 질문을 재촉했고

"..제 성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세요?"

"에?"

의외로 꽤나 진지하게 들어오는 질문에 순간 머리를 기울였다.

"아니.. 솔직히 저도 알고 있거든요. 묘하게 애 같고.. 난폭하고.. 자꾸 틱틱대고.. 솔직하지 못하고.. 소통하기 어려운 성격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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