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좋다/안 좋다 정도의 반응이라도 교주의 반응이 필요한 일들은 이렇게 가끔씩 서류를 건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 그녀가 자신에게 시킨 일.
[세상의 재밌는 일들을 보고하라.]
정말 모호한 명령이었다.
처음에 들었을 땐 무언가 숨겨진 뜻이 있는 명령인 줄 알고 한참 동안 낑낑대기도 했었는데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는 걸 깨닫고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뜯은 적이 있었다.
심심하니까 자신을 통해서 바깥 세상의 일이라도 좀 들어보겠다는 의도.
정말 절로 한숨이 나오는 일이지만 별 수 있겠는가.
하라면 해야지.
그 결과가 지금 이것이었다.
초반에는 그래도 꽤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 동안 종이를 들고 바라보면서 가끔씩 피식 웃는 일도 있었는데 그것도 몇 번만 그랬지
요즘엔 다시 이것마저 무료해졌는지 거의 무표정으로 읽다가 던져벼리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슬슬 이 짓도 그만 해도 된다고 명령이 내려오는 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때였는데
"...호오."
정말 오랜만에 그녀가 흥미를 느끼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무면금귀.. 꽤 재밌어 보이는 자로구나."
"아.. 그 점쟁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는 얼마 전 적었던 그의 정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얼굴도,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게 신비한 요술로 자신의 외모를 감추고 다니는 점쟁이.
이전에도 나름 유명세를 떨치긴 한 모양이었지만 최근 있던 일로 중원에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가 한 일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천기를 읽는 재주는 꽤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주도를 즐기는 취미가 있다라.."
"예?"
그는 자신이 저런 정보까지 적었다는 사실은 거의 까먹고 있었다.
솔직히 그에 대해 적은 정보가 어디 한둘이어야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자에 대한 정보 중에 누가 술을 좋아한다는 특징을 굳이 기억에 남기겠는가.
만약 그 재주가 그의 교주에게도 통한다면 안 그래도 절대자에 가까운 그녀의 경지를 더욱 끌어올려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적었던 것이지 저런 반응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그는 더욱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구나."
신교의 잠들어있던 괴물이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신투가 그래도 최소한의 융퉁성은 있는 인간이었던걸까.
다행히 나갈 때도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여기를.. 이 순서대로 누르면.."
숨겨진 장치들을 순서대로 조작해 작동 시킨 결과
-쿠르릉!
"아, 됐다."
"뭐, 뭐죠 이건?"
"그냥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에요. 출구가 생기려는 것 뿐이니까 별일 없을 거에요. 그러니까 안심.."
-휘릭!
시야가 순식간에 돌아가면서 눈앞에 여소천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에 대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쿵!
원래 내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떨어졌다.
"..."
-오싹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간 곤죽이 됐을 거라는 건 안 봐도 자명한 사실.
"..아무 일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오래된 유적인데 좀 녹슬었을 수도 있죠."
"..하긴. 당신이 그러면 그렇.."
"저 아직 화 다 안 풀렸어요?"
"하여간 그 망할 자식은 뭘 해도 제대로 하는 법이 없다니까요! 기관을 만들 거면 제대로 만들어야지 이런 식으로 만들면 어떡해요!"
음음.
바로 말을 바꾸면서 대상을 다른 사람으로 변경하는 여소천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약점 꽤 쓸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 앞장서요. 혹시 또 돌 같은 게 굴러올지도 모르니까."
"...네."
여자 엉덩이 뒤에 숨는 격이지만 이제 굳이 변명하기도 지쳤다.
그러나 이때 내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게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깊은 지하 유적의 최심부였고
그곳에서부터 지상까지 가는 출구라면 당연히 오르막길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엘레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으니
"헥..! 헤엑..!"
-철퍽
나는 계단을 오르다가 그 위로 쓰러졌다.
무리다.
절대 무리다.
이딴 계단을 내 몸으로 전부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업힐래요?"
그때 들려온 조심스러운 여소천의 제안.
"..."
이미 안 그래도 아까 까마득하게 높은 계단이 보였을 때부터 여소천이 업히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었다.
그런데 왠지 여기서 순순히 업히기에는 아직 마음의 앙금이 조금 남아있기도 했고 괜히 그녀가 쓸데없는 오해를 하지 않을까 해서 업히지 않고 고집을 부렸었는데
"...그러면 등 좀 빌릴게요."
아무래도 이건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내게 등을 돌리고 허리를 숙여 업히기 편한 자세를 한 여소천에게 업히기 전에 신신당부를 했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그냥 힘들어서 업히는 것 뿐이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마세요?"
"네, 네."
성의 없는 대답에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여소천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몸을 기대면서 체중을 실었다.
몸집이 작아서 업히기 불편한 감이 있기는 했지만 적당히 자세만 잡으면 나머지는 전부 여소천이 알아서 교정해준다.
-들썩
"읏차."
지금 이렇게.
여소천이 손으로 내 허벅지를 잡고 들어 올리면서 업히는 동안 내가 써야 하는 힘을 최소로 줄였다.
얼굴에 스친 그녀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떻게 갈까요? 빨리? 아니면 느긋하게?"
승차감(?)이 꽤 좋아 편안한 느낌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업혀있는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건 좀 그랬기에
"최대한 빨리 가죠."
잠깐 정신이 나가서 호기를 부려버렸다.
"..최대한 빨리요?"
"네. 최대한 빨리."
"...음. 뭐, 적당히 조절 할게요. 제 목에 팔 단단히 감고 있으세요. 혹시 떨어질 수 있으니까."
그 정도로 빠른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여소천이 시키는 대로 팔에 단단히 힘을 줬고
-탓!
-쉬이이익!
"우와아악?!"
여소천이 엄청난 속도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귀를 때릴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에 여소천의 목에 감은 팔을 더욱 단단히 묶고 턱을 그 위에 올렸다.
"자, 잠깜만! 너무 빨라요!"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참아봐요!"
"히이익.."
안 그래도 빠른 속도인데 두 발이 땅에 닿아있지도 않은 덕분에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력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배의 근육이 움직여 간질간질해지는 그런 감각이 느껴졌고
다행히 여소천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탓!
"자, 도착했어요."
"헤에엑.."
다행히 롤러코스터 운행 시간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 만에 지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꼈었다.
"이제 내려와도 되니까 팔 풀어.."
내가 호흡을 되찾고 있는 동안 여소천이 입을 열었다가 말을 끝까지 잊지 못했는데
"아.. 그.."
'...?'
당장 옆에 보이고 있는 여소천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지금 얼굴을 붉힐 일이 있나 싶어 몸에 감각을 집중하자
'아.'
그 사이를 못 참고 발기 되어있는 자지가 그녀의 등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호, 혹시.."
"이, 이건 본능이에요!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거니까!"
"아, 여, 역시 그렇죠?"
"네, 네! 원래 남자가 산소가 부족하면 뇌에서 작용이 일어나서 자지를 세우는데.. 그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아아.."
"이, 일단 내려주시고요!"
황급히 여소천의 등에서 내려온 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꼿꼿하게 서있는 자지를 손으로 억눌렀다.
방금 내가 뭐라고 변명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횡설수설 한 참이라서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변명은 그대로 말했던 것 같은데 어차피 여소천도 제대로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힐끔힐끔
여소천이 얼굴을 붉히고 나를 향해 살짝씩 눈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싹함을 느꼈다.
혹시 가라앉혀준다면서 여기서 해주겠다는 그런 삼류 야설에나 나올 전개를 선보이지는 않겠..
"호, 혹시 괜찮으면 제가.."
"수작 부리지 마요!"
"아직 말도 다 안 꺼냈어요?!"
"시끄러워요 강간범! 어제 그렇게 해 놓고 아직도 부족해요?!"
양손으로 몸을 껴안으면서 여소천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어제 그렇게 뽑아 먹고도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당아영도 그렇고 이쪽 세계 여자들은 대체 성욕이 어떻게 돼먹은 건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말 검후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그러면 세우지를 말던가요! 먼저 유혹해 놓고!"
"그게 무슨 야하게 입고 다녔으면 강간 당해도 싸다는 논리에요?!"
"...맞지 않아요?"
"?"
"색(色)을 부추기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조신하게 입고 다녀야죠..?"
"...어."
순간 머릿속에 버퍼링이 걸렸다.
이곳이 중원이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시간대로 치면 현대보다 수백 년 전의 과거.
저런 생각이 일반적인 시대이긴 했다.
성에 보수적인 세상이면서 치안도 썩 좋지 않은 만큼 특별히 남을 유혹할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살갗을 노출하는 옷을 입지 않는 시대니까.
하물며 힘이 없다면 더더욱.
"아,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애초에 내 옷은 노출이 없는 옷이다.
이런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아, 아무튼 오해하지 마요! 지금은 하고 싶은 생각 전혀 없으니까!"
"..칫."
"..."
어이없는 눈으로 여소천을 쳐다봤다.
어제 처녀를 뗀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아쉬워할 수가 있나?
아무리 뒤늦게 배운 불장난이 무섭다고 해도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