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단번에 6년치 포인트가 쌓여있었다.
포인트의 잔액을 확인하자 순간 뇌정지가 오면서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핫.'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 내가 잘못 본 거라 생각하며 눈을 비비고 다시 포인트를 확인하자
[현재 보유 포인트:2217]
포인트는 한톨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허읍?!"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입을 틀어 막아 막았다.
그 정도로 지금 상황은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게 말이 2217포인트라고 하니까 크게 와 닿지 않을 수 있는데 내가 상점창이 생긴 뒤 최대로 모아봤던 포인트가 2003포인트였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망토가 2000포인트 짜리였고 이걸 사려고 6년을 참아가면서 2000포인트를 모은 뒤 3일 동안 정말 이걸 사도 될까 고민하다가 샀기 때문에 2003포인트가 최고 기록이었다.
근데 그걸 단숨에 갱신한거다.
그것도 고작 여소천과 같이한 유적 탐사 한번에.
'2200포인트면.. 저번에 보면서 군침 흘렸던 아티팩트가 대충 2100포인트 쯤이었던 거 같은데..'
머릿속에 그동안 그림의 떡으로 보고만 있었던 수많은 아이템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내 수중에 있는 포인트는 정말 그것들을 살 수 있는 포인트였으니까.
귀환이 1만 포인트였던가?
앞으로 유적 탐사를 4번만 더 하면..
'..근데 유적 탐사로 얻은 거 맞나?'
그러고 보니까 성녀님이 여소천이 '활동'을 할수록 내게 포인트가 쌓인다고 했는데
이 포인트 전부를 유적 탐사를 통해서 얻은 거라고 하기엔 당장 어제 있었던 일이 너무 격렬했기에 의심이 들었다.
'..혹시 섹스해도 오르나?'
'활동'이라고 했지 그 안에 제한이 있다고 말하진 않았다.
유적 탐사를 통해서도 포인트가 오르긴 했을 테지만 포인트가 갑자기 급격하게 늘어난 걸 보면 분명 어제 있었던 일도 적지 않은 지분이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섹스를 통해서도 적지 않은 포인트를 수급할 수 있는 거라면..
'..진짜 눈 딱 감고 10번 정도만 구르면 귀환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꿀꺽
금방 지구로 돌아가는 것도 꿈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러면 스승님은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스쳐갈때쯤
[아, 아니에요!]
상점창 구석에 작은 메세지가 떠올랐다.
[이, 이번이 첫 경험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달성된 업적이 많아서 보너스가 많이 들어온 거지 이제 와서 다시 한다고 그만한 효율은 안 나와요! 오히려 포션값이 더 든다고요!]
성녀님이 보낸 걸로 추정되는 메세지.
'누가 보면 게임 얘기하는 줄 알겠다.'
그녀와 대화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유일하게 고향의 향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서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그녀도 지구 출신은 아닐텐데 어떻게 그렇게 지구 문화를 잘 아는 건지.
혹시 일부로 그런 방향으로 접근해서 호감도를 높여보려는 계획이 아닐까 살짝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앗.]
'...'
[아, 아무튼 이번엔 정말 고생하셨어요 용사님!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힐링도 쓰지 못하는 주제에 사람을 그렇게 혹사 시키다니.. 정말 신이나 성녀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그러다 용사님의 귀중한 성검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어딘가 급하게 말을 돌리는 느낌이 강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꽤 적나라한 말에 절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성검..'
솔직히 대놓고 번식을 위해서 데려간다는 등 속에 담긴 의도는 항상 노골적이었지만 전에 본 그녀의 외모는 그런 말을 할 것 같은 외모랑은 꽤 거리가 먼 외모였기에 더 부끄러운 그런 게 있었다.
[이, 일단 포션은 목록에서 추천해 드릴 테니까 꼭 그걸로 드시고 나중에 다시 연락하는 거에요! 멋대로 포인트 쓰시면 안돼요?!]
-팟!
"...뭐해요? 혼자서 허공이나 보고 있고."
"고, 고개나 돌려요! 얼굴도 보기 싫으니까!"
"...힝."
성녀님의 메세지가 사라지자 마자 여소천이 말을 걸어서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성녀님은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항상.
'..근데 그래도 성녀면 꽤 높은 위치일텐데 다른 일은 없나?'
멸망해가는 세계라고 말하긴 했지만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건 아닐텐데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녀의 일상생활이 궁금해졌다.
분명 나 하나한테 하루 24시간을 투자할 정도로 할 일이 없는 위치가 아닐텐데.
'..내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인가?'
낯부끄럽고 절대 사양하고 싶은 방법이긴 하지만 일단 내가 저쪽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인물이긴 하니까 나라는 인간에 대한 중요도가 높을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래도 하루 종일 지켜보는 건 조금..'
나도 사람인데 그래도 24시간 동안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여러모로 불편했다.
관음증 성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생활도 없이 계속 감시 당하고 있는 건 절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그렇지. 내가 이 세계에 온 지 10년도 더 지났는데 그걸 하루 종일 지켜보고 있..
'..그게 되나?'
아무리 한가한 사람이라고 해도 밥도 먹고 잠도 자는 등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24시간 동안 내 감시만 한다?
그것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쉬는 시간이라도 따로 있겠지.'
생각해보니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어쩐지 살짝 오싹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설마 그 정도로 집착이 심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며 성녀님이 말한 포션을 찾기 시작했다.
목록에서 추천했다고 하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Event!)성녀 에르델의 특제 회복포션]
[성녀 에르델의 정성이 가득 담긴 수제 회복포션입니다. 마나 로드가 망가져 있거나 몸이 약한 이가 복용해도 문제가 없게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졌으며 어째서인지 지금 당장 구매해서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체력 회복에 탁월한 효과가 있고 영구적으로 정력을 소폭 증가시킵니다.]
[가격:10포인트]
..마지막 문구를 내가 잘못 봤나.
-부비적
눈을 비빈 뒤 다시 설명을 바라보자
[~영구적으로 정력을 소폭 증가시킵니다.(절대 사심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시간으로 설명이 추가되어있었다.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그 설명을 바라봤다.
'..잠깐 다시 나와봐요.'
[잘못된 명령어입니다.]
'이제 와서 프로그램인 척 하지 말고요. 어차피 이거 설명 다 성녀님이 적는 거 아는데.'
[크읏!]
뭐야 진짜였네.
아까까지만 해도 급한 척하면서 도망가더니 금방 다시 돌아온 모습을 보자 상점창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차갑게 식었다.
[그,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주세요! 분명 용사님에게 도움이 될 물건이라고요!]
'정력 늘리는 게요?'
나는 본심을 말하라는 듯이 더 차가운 시선을 내보냈다.
[무, 물론 언젠가 우리 세계에 오게 되실 용사님의 정력을 더 강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 용사님한테도 있으면 좋잖아요!]
확실히 정력에 좋다면 멸종위기종도 잡아먹는 게 남자라는 생물이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별로 그런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정력은 지금도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쳐서 오히려 힘들다.
그냥 빨리 끝내고 자고 싶은데 아직 서있다는 이유로 억지로 자지 못하게 하는 삶을 일주일 정도 살아봐야 마냥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느낄 거다.
그때 하루 평균 사정 횟수가 10번이었는데.. 솔직히 정력은 이미 두려운 지경이라 더 늘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 정도면 대체 어디서 정액을 그렇게 만들어내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아니 성녀님도 봤으면 알잖아요. 제가 정력이 부족해요?'
[..혹시 다다익선이라는 말 아세요?]
'저는 싫다니까요?!'
[에이. 몸에 좋은거라니까요. 편식하시면 안되죠.]
'약물은 음식이 아니에요!'
[쳇.]
메세지 뿐이지만 어쩐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챙겨두시는 건 추천 드릴게요. 부가효과인 체력 회복도 효능이 엄청 좋아서 준엘릭서 수준이니까. 나중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에요.]
'체력 회복이 부가효과였으면 진짜 정력제 아니에요?!'
[원래 최대 HP가 늘어나면 그만큼 HP가 회복되는 건 당연히 시스템이에요!]
음.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다.
뭔가 굉장히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저 논리에 반박할 수 있는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래서 판타지 쪽 사람이 대체 게임 시스템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혹시 저쪽 세계에는 상태창이 있어서 몬스터를 해치우면 레벨업..
[용사님. 게임을 너무 많이 하신 거 아니에요? 상태창이니 스테이터스니 스킬이니 현실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걸 상점창을 만든 사람한테 듣고 싶지는 않거든요?!
'..하아.'
게임중독 성녀님에게 말로 패배한 뒤 한숨을 쉬면서 일단 성녀님의 포션을 장바구니에 넣어뒀다.
포인트도 이미 지불했으니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서 쓰면 됐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들고 다니고 싶은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10 포인트에 체력 전부 회복이면.. 가성비는 엄청 좋네.'
진품 엘릭서의 가격이 100포인트쯤 했던 걸 생각하면 엄청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매진-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상하긴 했지만 당연히 수량은 1개로 한정되어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포션도 샀겠다. 아까 들었던 의문도 그렇고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기에 바로 물어보려고 했지만
[쉿.]
-흠칫!
단순한 메세지가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듯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몸이 떨렸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단 둘이 있을 때. 알았죠?]
간질간질한 ASMR을 듣는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귀 안쪽을 간지럽혔고
-팟!
상점창 구석에 있던 메세지가 다시 닫혔다.
'...아.'
어차피 지금은 그녀가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그냥 그녀가 지금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표현이었기 때문에 나도 순전하게 상점창을 닫았다.
확실히 뭘 제대로 해보기엔 옆에 여소천이 있기도 했고.
둘이 사이가 좋지 않을 것 같은데 굳이 두 여자를 한 곳에 모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성녀님이 여소천을 대하는 태도는 잘 모르겠지만 여소천이 성녀님을 욕하는 모습은 자주 봤었으니까.
2207.
상점창을 닫기 전 확인했던 포인트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정상적으로는 6년을 기다리거나 금 2200냥이라는 개인이 다루기에는 굉장히 거대한 금액을 삼정창에 갈아 넣어야 했다.
웬만한 거대 상단의 상단주들도 쉽게 하지 못할 짓이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비싸게 받고 점 봐줄걸.'
그땐 세상 물정을 잘 모르기도 했고 여러모로 때묻지 않은(?) 시절이라 너무 싸게 받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막심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
'..포인트.'
나는 침울한 분위기로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여소천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몸집이 작은데 침울해서 그런지 어깨가 축 늘어져서 어딘가 안쓰러워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강간범 겸 무자비한 정액 강탈범으로 보였는데 그녀로 인해 벌린 포인트를 확인하니 그런 감정도 대부분 해소된 상태였다.
돈으로도 못 버는 포인트를 이렇게나 벌게 해줬는데 그거 잠깐 고생 좀 한 게 뭐 대수인가.
이번만 이렇게 포인트가 많이 벌린다는 게 오히려 아쉬웠다.
만약 계속 그 정도로 포인트가 벌렸으면 4번 정도는 눈 딱 감고 견딜 수 있었을텐데.
이제는 포션값이 더 들 정도로 효율이 떨어진다고 했으니 굳이 그걸 견딜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괜찮아요?"
"...아니요. 제가 쓰레기죠. 말 안 거셔도 돼요.. 그냥.. 저 같은 건.."
"..용서해줄 테니까 일어나요."
"정말요?!"
"..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빨리 차리는 거 아닌가."
이래서야 일부로 용서 받으려고 약한 척 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볼 테니 만일 하명하실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불러주시길.."
마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천마의 거처.
군사는 그의 교주를 향해 그가 정리한 문서를 전달했다.
그녀에게 올라가는 천마신교의 내부의 일에 대한 서류는 대부분 자신이 이미 처리한 뒤 '이건 차마 내 손으로 결정할 수 없다.' 하는 것들이다.
그녀가 얼마나 교주의 일에 관심이 없고 모든 것을 귀찮아 하는지 옆에서 지켜보면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개 군사가 신교의 모든 일을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