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250)

여소천이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짓다가 바로 눈을 내려 깔았다.

누가 누구한테 불만을 품어.

강간범 주제에.

"..일단 먹을 것 좀 갖다 줘요. 이러다 죽겠네."

"ㄴ,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몸의 단백질이 전부 빠져나가서 그런지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여소천이 가져다준 식량을 받아 들었다.

-부들부들

'..대체 얼마나 빨린 거야.'

아무리 원래 몸에 힘이 없다고 해도 젓가락도 제대로 못 들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손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호, 혹시 힘드시면 먹여드릴.."

"수작 부리지 마요."

"...네."

여소천이 훤히 보이는 수작을 부려왔다.

억지로 손에 힘을 줘가면서 깨작깨작 목으로 넘기자 조금씩 힘이 돌아오면서 밥을 먹는 게 한층 수월해졌다.

-불끈

'...'

그 와중에 제일 먼저 기운을 차린 아랫도리를 보니까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생물로서의 본능 중 생존욕구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게 번식욕이라지만 어제 그렇게 당해 놓고도 또 세우고 있는 놈을 보고 있자니..

"왜,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얼굴도 보기 싫으니까 등 돌리고 드세요."

"...네에."

-시무룩

여소천이 침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서 등을 돌렸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강간 당한 것도 서러운데 안 그래도 전부 짜여서 텅텅 비어서 죽어있는 자지를 전기로 전립선까지 자극해가면서 억지로 세운 뒤에 뿌리까지 뽑아간 여자다.

'아직도 아파..'

안 그래도 정력 하나는 정말 엄청난 몸이라 정액의 양도 상당한데 그걸 3번 만에 전부 뽑아버린 뒤 억지로 한번 더 사정했으니 내 자지와 요도가 얼마나 혹사 당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지가 서긴 했는데 오히려 제대로 회복도 안된 주제에 억지로 일어난 탓에 요도관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속으로 눈을 감고 이제 슬슬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애국가를 부르면서 마음을 진정 시키자 이제야 이곳이 전장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쯤 되자 두려운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이 정도면 평범한 사람 몸이 아니라 아예 섹스를 위해 만들어진 섹스머신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 대체 이런 몸이 어떻..게..

'...잠깐만.'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장에 막혀서 하늘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저 위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그건 넘어가고.

'이 몸 빙의 당한 몸이잖아.'

10년이 넘도록 지내온 탓에 이제 슬슬 익숙해지긴 했지만 원래 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남의 몸에 빙의 당한 처지.

그리고 나를 이 몸에 넣은 사람은..

-지긋이

"..."

복잡한 감정을 담아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보통 이맘때쯤이면 먹구름 소리가 들릴 만도 한데 이번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저기요. 뭐라고 반응이라도 좀 해봐요.'

그러고 보니 어제 중간에 갑자기 여소천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도 천지신명의 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대체 왜?'

대체 왜 그런 짓을?

신 씩이나 되는 사람이 굳이 남의 몸까지 빌려가면서 인간 따위랑 섹스를 할 이유가 있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 순간 지구에 있던 시절 봤던 수많은 신화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특히 번개를 상징으로 가지고 있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신 중 한 명이.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왠지 납득이 되는 기분이었다.

왠지 번개라는 이미지가 겹치기도 하고.

그냥 천지신명이 남자를 납치해서 강간하는 취미가 있는 신이라고 생각하면..

-쏴아아!

"흐꺅!"

갑자기 머리 위로 물이 쏟아졌다.

"무, 무슨 일 있어요?!"

"가, 갑자기 어디서 물이.."

"물이요..?"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보자 먹구름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것이 보이다가 사라졌다.

[흥.]

왠지 머릿속에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차갑게 식은 머리와 별개로 다시 머리에 열이 올라왔다.

아니면 아닌 거지 사람한테 물을 뿌린단 말인가.

심지어 번개 가지고 뭐라고 했더니 비로 방향을 틀었다.

대놓고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

"여, 여기. 이걸로 닦으세요."

여소천이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천을 건넸고 나는 그것을 모아 몸을 닦았다.

-탁탁

"아오.. 진짜.."

대충 닦은 물을 털어내자 다시 내 눈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여소천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그동안 미루고 있었지만 하긴 해야 하는 일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 어떻게 할까요."

"네, 네? 뭐, 뭐가요?"

"제가 일방적으로 당한 거긴 한데 일단 몸을 섞긴 했잖아요. 책임이니 뭐니 그런 건 다 떠나서 일단 검후님이나 당아영한테 어떻게 말할 건데요."

"아.."

여소천이 그건 미처 생각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가는 여소천의 표정.

"..혹시 대책 없는 건 아니죠?"

"무, 물론이죠! 설마 겁탈 하면서 그런 것도 생각 안 했겠어요?!"

그건 하는 게 이상한 상황 아닐까.

이런 생각이 스쳐갔지만 일단 여소천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고

"...이렇게 된 이상 둘이서 사랑의 도피를!"

"개소리 하지 마요!"

"노, 농담이에요!"

여소천의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그것을 들으면서 여소천의 몸을 밀쳐냈다.

"...일단 농담은 그만두고 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워보죠."

여소천을 밀어낸 손을 바닥에 대고 털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매듭 안 짓고 갔다가 어긋나기라도 하면 우리 둘 다 끝장나는 수가 있으니까."

"..검후요 당아영이요?"

"둘 다요."

아무리 여소천이라고 해도 둘 모두에게 찍힌 상태에서 멀쩡히 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검후님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당아영도 본신의 무력은 여소천에게 닿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위치를 생각하면 사천당가 전체의 추격을 받게 되는 셈이다.

그러면 나도 여소천을 따라 같이 도망 다니거나 순순히 투항(?)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텐데.

'...'

어느 쪽이든 절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돌아가기 전에 매듭을 지어 놔야 했다.

우리가 돌아가서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역시 최선은 서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겠죠?"

"..아무래도 그렇죠."

굳이 우리 둘이 가서 '사실 둘이 유적을 찾으러 갔었는데 여소천이 미약함정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제가 겁탈 당했어요!' 라고 말할 이유는 없었다.

일단 듣는 순간 칼부림부터 일어날텐데 미쳤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겠는가.

어차피 우리 둘만 있는 곳에서 일어난 우리 둘만 관련된 이야기인데 굳이 그걸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최선의 방법은 우리 둘 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을 닥치고 있는 거였다.

"..그쪽 입장에선 다행이겠네요. 적어도 강간죄로 잡혀갈 일은 없겠어요."

"하..하.."

"진짜 내가 이런 상황만 아니었어도 바로 신고하는 건데."

-꿀꺽

내가 원망을 담아 여소천을 노려보다 여소천이 침을 삼키면서 내 눈을 피했다.

"흥."

지금은 저 얼굴도 제대로 보기 싫은 기분이라 나도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래도 3번째 사정에서 끝내기라도 했으면 그동안의 정도 있고 함정에 당해서 어쩔 수 없기도 했으니까 넓은 아량으로 봐줄 수도 있었겠지만

4번째 사정은 정말 선을 넘어도 제대로 넘었었다.

자지가 서지도 않는 상황에서 전립선이 전기로 자극 당해 억지로 정액을 내뱉을 때의 고통 섞인 쾌락은 정말 당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끝나자 마자 눈까지 뒤집으면서 쓰러졌겠는가.

-부들부들

정말.

정말 다시는 당하고 싶지 않은 짓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지금은 안된다고 나중에 해준다고 사정까지 했는데 그 대가가 사정이라니.

기분이 좀 풀린 뒤라면 모를까 적어도 당분간 여소천을 향한 내 호감도는 마이너스를 찍을 예정이었다.

"그, 그러고 보니 밖에 나가면 근처에 마을이 있던 거 같은데 거기서 술이라도 사드릴까요?"

그런 내 낌새를 눈치챈 걸까.

여소천이 평상시의 나였다면 먹힐 제안을 했다.

"...흥."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소천을 향한 호감도가 마이너스를 찍은 상태.

삐진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비, 비싼 걸로 사드릴게요. 그 주점에서 제일 비싼 걸로."

"..."

"아,하하.. 그러고 보니 겨우 이런 마을에 파는 술에 마음이 찰 리가 없네요. 섬서로 돌아간 뒤에 제대로 된 주점에서 사드릴게요."

"..."

나는 여소천의 말에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마음이 상한 것도 있었지만 이제 그녀의 말이 그렇게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다.

당장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가.

그 신투의 비고다.

비록 기대했던 거에 비해 부족하긴 했지만 저기 쌓여있는 황금을 처리하면 못해도 금 수백 냥은 나올텐데

저걸 다 쓴 뒤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술에 그렇게 목을 맬 필요가 없었다.

하려고만 한다면 내가 돈으로..

"...혹시 서역 쪽에 인맥 같은 거 있어요?"

"인맥이요..?"

"생각해보니 와인.. 그러니까 서역의 술을 예전부터 구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기왕 생각난 김에 물어보는 거에요."

술에 맛을 들린 뒤 당연히 와인을 찾아보려는 노력도 했었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중원이다 보니 술은 동양의 술이 대부분이었고 색다른 기분도 좀 느껴보고 싶어서 서역의 술을 수소문 했었는데 아무래도 서역과 교류하는 상인은 보기 드문 모양인지 아무리 찾아도 실마리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기왕 생각난 김에 사회적 위치 자체는 높은 여소천에게 물어봤던 건데..

"...이, 인맥이요.. 아하하.."

-삐질삐질

아니나 다를까.

"..히키코모리."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울림이 좋진 않아요."

대부분의 세월을 곤륜산에 박혀있던 그녀가 그런 인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곤륜 자체가 속세에 대해서 폐쇄적인 성향이 짙은 곳인데 뭘 기대할까.

'..그러고 보니 이제 유적 탐사도 끝났는데 포인트도 들어 왔겠구나.'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상점창을 열어 포인트를 확인했다.

생각해보니 배경이 판타지 쪽인 상점창의 물건들의 특성 상 와인도 찾아보면 있을 것 같았다.

특별한 효능이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와인 따위에 귀중한 포인트를 사용하지는 않겠지만.

'..그러고 보니 예전엔 포션도 자주 사 먹었었지.'

몸 상태가 허해지니까 자연스럽게 포션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격도 그렇게 비싸진 않으니까 유적 탐사가 끝나고 들어온 포인트를 조금만 투자하면 지금 몸 상태에서 건강하게..

[현재 보유 포인트:221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