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50)

자고 일어난 뒤 여소천이 식량을 꺼내는 사이 나는 침낭을 정리했다.

내가 하필 침낭을 두고 오는 바람에 여소천이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지 못했지만 이제 그것도 오늘이면 마지막일 것이다.

오늘이야말로 보물이 있는 곳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니까.

-부스럭

빌린 침낭을 고이 잘 접어서 짐 가방에 넣던 도중 깊숙한 곳에서 뭔가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푹신하고 돌돌 말려져 있는 침낭의 감각이.

-스륵

"..."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어 안을 들여다보자 가방 안에 총 2개의 침낭이 들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여소천에게 빌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좆됐다.'

-삐질삐질

아무래도 그때 졸려가지고 제대로 뒤져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분명 그때는 없었었는데 왜 지금은 있단 말인가.

"왜 그래요? 무슨 문제 있어요?"

"네, 네?"

가방을 열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향해 여소천이 질문했다.

머리를 빠르게 회전 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침낭이 하나밖에 없어서 같이 쓰자는 말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실 내게 있었다는 게 걸리면 여소천이 화를 낼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계속 감추고 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돌아가서 짐을 확인하면 결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저기 화내지 말고 잘 들어봐요."

"네?"

"잘 뒤져보니까 제 침낭이.. 있었네요? 없는 줄 알았는데. 하하하.."

식은땀을 흘리면서 여소천을 향해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웃는 사람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잘하면 봐주지 않을..

"..."

"..."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여소천의 분위기가 척 보기에도 좋지 않아 보였다.

그 상태로 10초 정도 흘렀을까

"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뒤늦은 비명이 유적 속에 울려 퍼졌다.

"자, 잠깐만요. 우리 화내지 말고 우선 진정한 다음에 제 변명을.."

"그걸 변명할게 어딨어요! 죽어요! 죽으라구요! 이 색마! 일부러 그런 거죠! 일부러 저를 그렇게 만들려고..!"

"자, 잠깐만요! 때리지 마요! 아악!"

살의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동안 나를 여러 번 때려본 솜씨 답게 절묘한 힘 조절로 고통만 느껴지도록 내 등을 가격했다.

"아야야야.."

"엄살 부리지 마요! 제가 당한 수모에 비하면 그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얼굴을 찌푸리며 여소천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은 부위를 매만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모를 당했길래 이렇게 까지 감정을 실어요.."

물론 내가 잘못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정말 감정이 제대로 실린 스매싱이었어서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같은 힘으로 때리더라도 감정이 실리냐 안 실리냐에 따라서 고통도 다른데 이번엔 진짜 따가웠다.

"잠 좀 불편하게 잤다고 이렇게 까지.."

"다, 닥쳐요! 당신이 뭘 알아요!"

"그러면 말을 하던가요! 말을 해야 알죠! 말은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요! 뭐 때문에 그렇게 감정이 상한 건데요!"

"읏.."

잠깐 고통 때문에 심술이 난 내 말을 듣고 여소천이 잠깐 주춤하더니

"시, 시끄러워요! 당신이 잘못한 거잖아요! 당신이 그때 가방만 잘 뒤졌으면 됐잖아요!"

"...읏."

그대로 반격했다.

"그, 그렇게 싫어할 거면 침낭을 빌려주지 말지 그랬어요!"

"하, 이제 적반하장으로 나오네요! 제가 기껏 당신의 그 허약한 몸을 신경 써서 제걸 양보해줬는데 이제 주지 말지 그랬냐고 한다고요?"

"이 허약한 몸에 넣은 게 누군데요! 저라고 이런 허약한 몸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그걸 말하는 건 또 반칙이죠! 저는 거기에 관여한 적 없다니까요?!"

"당신이 모시는 분이 한 일이니까 당신한테도 책임이 있는 거죠!"

그 뒤로도 유치한 말싸움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내가 원래 이렇게 애 같은 성격은 아닌데 어째 여소천이랑 같이 있으면 계속 이렇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진 말싸움에 서로가 지친 뒤에야 휴전을 선언하고 일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까지 화냈는지는 말 안 해줄 거에요?"

"..."

여전히 여소천이 그렇게 까지 화낸 이유는 미스테리였지만.

* * *

그렇게 한참을 더 걸어간 뒤

우리는 거대한 공동에 도착했다.

"와아아.."

거대한 공동을 메우고 있는 것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신기로 추정되는 물건들이나 낡은 책 모양의 비급, 그리고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양의 황금이었다.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많고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의 무더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저기에 다이빙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표정이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다는 표정이네요. 하여간 욕심은 많다니까요."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면서 왔는데 좀 욕심 좀 부려도 되죠."

"한 고생이라곤 걷는 거랑 이미 방법까지 다 알고 있는 함정 해제밖에 없었잖아요? 진짜 탐험가들한테는 기만처럼 들릴걸요 그거."

"제가 얻은 능력인데 뭐 어때서요!"

꼬우면 지들도 천기를 읽던가.

정말 오랜만에 천지신명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거 팔면 다 얼마나 나올까.'

-추릅

비고에 있는 금이니 당연히 가짜 금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사이 여소천이 내 감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마음은 이해 하지만 저걸 다 가져갈 생각이라면 그만 두세요. 가져갈 공간도 없고 뒤에 올 사람들 몫도 남겨는 놔야죠. 기껏 비밀리에 여기까지 와 놓고 바깥에 대량의 금을 풀어서 세상의 관심을 당신에게 집중 시키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 않겠지만."

"...아."

급격하게 침울해진 기분에 고개를 푹 숙였다.

"윽.."

그런 내 모습을 본 걸까

"아, 알았어요. 전부는 무리겠지만 적당한 정도면 제가 처리해줄 테니까. 밖에 나가서 금화로 챙겨 드릴게요."

"정말요?!"

"네에.. 뭐. 저도 돈이 부족한 위치는 아니니까요."

"오오.."

..그런데 잠깐만.

"근데 그쪽 도사 아니에요?"

"도사가 돈 좀 많을 수도 있죠 뭐."

"..."

다른 도사도 아니고 여소천이 그런 말을 해도 되나 싶었지만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검후님도 그랬지만 도사라고 풀만 뜯어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

음.

"..근데 돈이라면 저보다는 당아영이 훨씬 많을걸요. 당신이 말만하면 사천당가의 전재산을 들고 올 기세던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죠."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당신이 하기에 따라서 정말 그럴 수도 있어요. 단유성이 아니라 당유성이 돼야겠지만. 어차피 원래 이름도 거의 비슷하네요."

"..결혼은 생각 없어요."

여소천과 지내는 사이 잠깐 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제 밖에 나가면 다시 여자 문제로 골머리를 썩어야 한다.

"하아.."

그래도 한동안 별생각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았었는데.

이제 나가면 당장 당아영에게 뭐라고 얘기해야 좋을까부터 생각해야 한다.

"..우리 그냥 여기서 같이 살래요?"

"네, 네?!"

"농담이에요.."

여소천이 또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지면서 소리칠 조짐이 보이길래 빠르게 발언을 철회했다.

반쯤 농담이 맞긴 했지만 가능하다면 그냥 여기서 여소천이랑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올 걱정도 없는 비밀스러운 유적 안. 어떻게 보면 산 속보다 훨씬 속세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물론 이 안에서 식량을 수급할 방법이 없으니까 불가능 하겠지만.

그냥 답답한 마음에 한번 해본 소리였다.

"아.. 그.. 그게.."

"...?"

"다, 당신만.. 괜찮으면.. 저도.."

"뭐라고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제 검이나 찾으러 갈 거에요!"

여소천이 고개를 홱 돌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여소천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도 나는 몸을 돌려서 다른 보물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유독 반짝거리는 금덩이들에 시선이 절로 쏠리긴 했지만 여기 있는 다른 물건들도 그에 준하는 보물.

어쩌면 나한테도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단전을 고쳐준다거나.'

사실 이제 와서 이 나이에 단전을 고쳐봐야 뭔가 제대로 수련하기에는 늦은 나이겠지만 그래도 이 허약한 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아플 때 약도 제대로 듣지 않는 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단전을 고쳐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펄럭

'근데 이런 건 무슨 내용이려나.'

대충 무공 이름처럼 생긴 제목이 적힌 책을 집어 들고 천천히 장을 넘겨봤다.

혹시라도 구결이라도 외우면 큰일 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주의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음.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본 무공이라고 해봐야 고작 삼재심법.

그거 하나 읽어 놓고 제대로 수련도 하지 않은 놈이 신투의 비고에 있는 책을 펼쳐 들었으니 하나도 못 알아 먹는 게 당연했다.

다시 고이 제자리에 내려놓고 다른 거나 찾아볼까 생각하던 순간

-쿵!

"?!"

여소천이 사라진 방향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괜찮아요?!"

나는 서둘러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왜 또 떨어져 있어요?"

"피, 피했는데.. 함정을 이중.. 아니 삼중으로 심어놨었어요.."

그때처럼 구덩이에 떨여져 있는 여소천의 모습을.

"...하아. 일단 나오세요."

나는 한숨을 쉬면서 여소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구덩이 안쪽을 내려다보자 안쪽에 솜이나 베개처럼 보이는 하얀 물건들이 가득했다.

구덩이 안쪽으로 하얀 가루가 흩날리는 모습이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했지만 그렇다고 여소천을 두고 갈 수도 없었기에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손은 그대로 내밀고 있었다.

"..."

"뭐해요? 빨리 나오세요."

여소천이 잠깐 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가 내 손을 붙잡으면서 말했다.

"저기..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정말 중요한 질문이에요."

-꽈아아악

여소천의 손이 내 손을 꽉 옥죄어 오는 게 느껴졌다.

"혹시 달리기에는 자신 있으세요?"

말과 다르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내 손을 잡아오는 그녀의 악력을 느끼자 절로 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달리기엔 자신 있냐뇨?"

"아.. 별거는 아니고요.. 그냥 당신이 지금 최대한 도망가야 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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