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서걱서걱
"아니지. 그게 아니다 플로라. 나이프는 그렇게 잡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잡는 거라네."
바르슈타인은 테이블 맞은편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검화를 나무랐다.
"..어차피 고기는 잘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지. 그런 결과론적인 사고방식은 무례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고 그대가 나의 피를 받은 뱀파이어가 된 이상 이 부분은 아무리 나라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네. 귀족에게 테이블 매너란 또 다른 심장.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대는 뱀파이어가 될 자격이 없네!"
-척!
바르슈타인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에게 삿대질을 날렸다.
속으로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검화였지만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바르슈타인이 알려준 자세대로 나이프를 다시 잡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검은 이름도 이상하고 모양도 이상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검이었다.
고기 하나를 우아하게 잘라 먹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칼이라니.
'완전 사치네.'
-사락
그녀가 손에 든 나이프에 스테이크가 부드럽게 잘려나갔다.
아무리 모양이 익숙하지 않다고 하지만 결국 검.
요령을 찾는 것쯤이야 금방이었다.
"옳지. 이제야 좀 볼만하군. 여전히 부족한 점이 보이긴 하지만 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야."
"이런 걸 꼭 지켜야 하는 거야?"
"Manners Maketh Man. 매너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네. 아, 매너는 예의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예의?"
피가 줄줄 흐르는 덜 익은 고기를 손바닥만한 검으로 잘라서 우아하게 입안에 넣는 것이 예의인 세계라니.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피곤한 세계일 것 같았다.
"하여간 자네는 다 마음에 드는데 이 세계 출신이라 배울 점이 많다는 게 조금 불편하단 말이야. 뭐, 이 미개한 세계에서 자랐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
모욕으로 느껴질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바르슈타인과 지내면서 저런 말에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그녀에게 이 세계에 대한 애정 따위는 없었다.
만일 바르슈타인이 유성이의 욕을 했다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그래서, 요즘은 불편한 점이 없나?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게. 그대는 마음에 들었으니까. 키워보는 재미가 있.."
-쿵!
"바르슈타인님! 카르멘님에게서 급한 연락이.."
"누가 내 식사를 방해해도 좋다고 했지?"
"커헉!"
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내가 피를 뿜으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대도 모르지는 않을텐데.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식사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끅.. 끄륵.. 죽을죄를 지었.."
"누구 마음대로 죽을죄를 지었다는 거냐. 그대의 목숨은 나의 것. 마음대로 죄의 무게에 나의 것을 올려놓지 말거라."
"끄르륵.."
평소 자신을 향하던 유순한 모습과는 다른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
검화는 조용히 마저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먹다 보니까 왠지 먹을만한 것 같았다.
"..뭐,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으니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게."
"쿨럭.. 쿡.. 가, 감사합니다."
"그래.. 이번엔 무슨 소식인지.."
-스륵
바르슈타인은 쓰러진 사내를 일으켜줄 생각도 없는지 두루마리만 가져와 스스로 펼쳤다.
말없이 두루마리를 읽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크흡.. 크하하핫!"
그녀가 돌연 소리 내며 웃기 시작했다.
"재밌군.. 아주 재밌어.. 아, 내가 그대를 두고 혼자서만 웃었군. 그대도 이 서신의 내용이 궁금한가?"
"..별로."
"사양할 필요 없네. 그냥 재밌는 이야기야. 기껏 투자한 부하 10명 정도가 핏물로 변했다는 그런 이야기지."
"...?"
"하아.. 그렇지. 이 정도는 되야 감히 마(魔)라는 이름을 쓸 자격이 있지. 아주 재밌어."
유성이에 대한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는 검화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르슈타인은 혼자서 입을 열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괜히 이 몸을 소환했던 계집이 그렇게 학을 때면서 말리던 게 아니긴 하군. 설마 아무리 그래도 전멸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괜히 이 세계의 마왕 같은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마왕..?'
순간 무슨 의미인가 했지만 금방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마(魔)의 왕(王)이라고 불릴 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세상 누구에게 물어봐도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 사람을 떠올릴게 분명했다.
'마교를 건드린 건가?'
당연히 내 머릿속에도 한 인물이 떠올랐고
공교롭게도 스승님에게 가끔씩 들어봤던 인물이었다.
[혈교가 스스로 마교를 건드려 자멸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미 중원은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었을 수도 있단다. 물론 그때는 나도 이 세상의 인물이 아니었겠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20년 전의 혈교와 지금의 혈교가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같을 뿐 거의 다른 조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과거의 혈교의 잔당들이 우연히 차원을 넘어 바르슈타인을 소환했고 껍데기만 남아있던 혈교를 바르슈타인이 점령한 뒤 자신의 수하들로 채워 넣은 형태였으니까.
만일 혈교가 정말 그 당시의 혈교였다면 설마 이미 마교를 건드려서 파멸 해 놓고 다시 마교를 건든다는 그런 미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나? 이 세계에서는 천마라고 불리는 모양이던데."
"..엄청 강하다는 것 정도는."
"그대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정말 유명하긴 한가보군. 뭐 그래봤자 한낱 인간이 위대하신 그분의 위용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굳이 스승님이 당시 그 전장에 있었고 그 일 뒤로 평생을 천마가 중원에 쳐들어올 때를 대비하면서 사셨다는 얘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하지 않았다.
정말 필요 없는 이야기니까.
"..근데 괜찮은거야? 부하들을 잃은 거 아니었어?"
부하들을 잃었다는 말을 하는 모습 치고는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였기에 입을 열었다.
화재를 돌리고 싶기도 했다.
어차피 유성이와 관련될 일도 없는 여자 따위.
그 여자가 중원을 정복하든 마교에서 그대로 썩어서 늙어 죽든 내 알 바 아니었다.
"하, 지금 이 몸에게 괜찮냐고한 것인가?"
바르슈타인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세계 하나를 집어삼키려는 전쟁인데 탐색전으로 10명이면 싸게 먹힌 거지. 전쟁에서 일개 병사의 목숨 따위 숫자에 불과하네. 그들은 사람이나 인격체가 아니야. 그저 적과 싸울 때 쓸 수 있는 칼이자 총이자 총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
"아. 그러고 보니 그대는 총과 총알이 뭔지 모르겠군. 활과 화살로 치환해서 생각해도 이해에는 무리가 없을 거야."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목숨 따위 안중에도 없고 세상 무엇보다 자기 목적이 중요한 사람.
어쩐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의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살아온 인생을 생각했을 때 잔혹한 면은 그녀 쪽이 훨씬 위인 것 같지만.
"승리했을 때 아군이 얼마나 남아있든지 상관없어. 위대하신 그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실 수 있게 준비하는 것만이 나의 평생의 숙원이자 존재 의의. 그것만 달성할 수 있다면 설령 이 몸과 영혼이 닳아서 바스라지더라도 만족할 수 있어."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뭐지?"
"당신에게.. 그 위대하신 분은 어떤 존재야?"
지금까지 그녀와 지내면서 그녀의 모습은 자주 봐왔다.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말처럼 나에게는 제법 친절을 베푸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녀 왈 그녀의 소유물이라는 뱀파이어들은 정말 소유물로 취급하고 관리한다.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설령 옳은 일을 하는 충직한 부하라도 망설임 없이 처벌해버리는 잔혹한 모습.
배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창조주. 나의 모든 것.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그것도 그것이 한 사람을 위한 감정에서 비롯된 거라면 더더욱.
.
.
.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당신은 이 세계에 어떻게 건너온 거야?"
"음?"
"혈교가 소환했다고 듣기는 했는데 다른 차원을 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싶어서."
"그럴 리가. 차원을 넘는 마법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마법 중에서도 가장 높은 난이도와 자원을 요구하는 분야 중 하나다. 안에 있는 존재가 다른 차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음과 동시에 다른 차원의 존재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차원 방벽에 틈을 만드는 게 기초가 되어야 성립 가능한 마법이니 어디 쉬울 리가 있겠는가. 솔직히 나도 이 미개한 세계의 술법 따위로 어떻게 이 몸을 불러냈는지는 의문인 부분이야. 지금은 기적이 통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근데 그건 왜 묻는 건가? 그대도 다른 차원에 관심이 있나?"
"..그냥. 나도 유성이랑 다른 세계로 넘어가서 단둘이 사는 것도 가능할까 생각했어서."
"음?"
"이 세계는.. 좀 위험하니까."
일단 유성이를 스승님의 손에서 뺏어오는 게 우선이었지만 그걸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었다.
유성이와 하고 싶은 게 아직 많았다.
유성이랑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구경거리를 보고.. 아이도 낳아서 잘 길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기에 이 세계는 너무 위험했다.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한 우리 유성이에게는 너무 위험한 세계다.
그렇기에 다른 세계의 존재를 알았을 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성이와 함께 다른 세계로 넘어가면 혹시 모를 무림맹의 추적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유일한 같은 세계 출신의 사람으로서 유성이가 내게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푸흣.. 자주 느끼는 거지만 그대도 정말 정상은 아니야.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차원을 넘는다는 생각을 하다니."
"..."
"풉.. 무지에서 비롯된 만용이라고 이해하려고 해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군. 아무튼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니 그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괜히 내가 있던 세계의 여신들이 용사를 선출할 때 내부에 있는 인물로 선출하는지 아는가? 다른 차원에서 사람을 불러오는 게 상상 이상의 미친 짓이기 때문이야. 신이라고 해도 함부로 시행할 수 없을 정도로."
'결국 기적이란 말이네..'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잠깐이지만 혹했던 생각을 가라앉혔다.
일단 이런 생각을 하는 것보다 유성이를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기적적으로 혈교에서 바르슈타인의 소환에 성공했고 덕분에 바르슈타인의 종복들까지 이 세계로 넘어올 수 있게 되면서 혈교가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는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나도 부활했다.
하나의 기적이 불러온 결과.
대체 이 기적을 허용해준 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유성이가 스승님의 마수에 놀아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됐으니까.
비록 지금 당장 구할 수는 없겠지만..
-꽈악
'..조금만 기다려.'
머릿속으로 유성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검을 손에 쥐었다.
나는 스승님과 다르니까.
* * *
-철벅
"수고했네 흑풍대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교의 군사는 흑풍대주라고 불린 이가 가져온 수급을 보따리에 싸 넣었다.
바로 얼마 전 그는 그를 호출한 교주에게 불려갔었고 그 뒤 이런 말을 들었었다.
[본교 밖에 웬 모기들이 서성이는 것 같아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잠시 재미 좀 봤으니 뒤처리는 그대에게 맡기지.]
그녀가 말하는 모기가 정말 모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벌레. 그것도 피를 빠는 해충. 당연히 다른 세력의 세작임이 분명했다.
[..제가 부족하여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디 죽여..]
[그대가 죽으면 본교의 일은 어떻게 처리하란 말인가. 물러가기나 하게.]
그녀의 처소에서 물러난 뒤 군사는 서둘러 그 수급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수급을 발견한 장소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는데
그곳이 신교와 수 백 리는 떨어져 있는 산의 초입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상시에도 처소에 틀어박혀 무료하게 지내던 그녀가 갑자기 변덕이 생겨 산을 돌아다닌 게 아니라면 그곳에서 본교의 교인이 아닌 자들의 기척을 발견하고 도망칠 틈도 주지 않고 처리했다는 말이었다.
'이 힘으로 중원 정벌을 나선다면 온 세상이 본교의 아래에 무릎을 꿇을 것인데..'
교주의 힘을 다시 실감하면서도 그 힘을 쓰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신교의 군사로서 감히 품기 무례한 생각이었지만 그들의 교주는 정말 한 집단의 지도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당장 그 자신도 그녀의 직무 태만에 의해 신교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혼자서 처리하면서 간혹 있는 그녀의 사실상 심부름에 가까운 명령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전대 교주들도 자신의 무공 수련에 열중하느라 신교의 일은 많은 부분을 다른 이에게 맡겼다고 하지만 그녀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
그 뿐인가.
그녀의 이런 면모가 다른 교인들에게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그녀의 행동을 전부 무공 증진을 위한 폐관이라고 감추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건 전부 자신과 흑풍대주의 일이었다.
자신이 관심 있는 일 외에는 정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는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취미라면 주도(酒道)를 즐기는 것이 있겠지만
대체 세상 어느 누구가 천마신교의 교주와 술상을 앞에 두고 제대로 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억지로 상을 치하한다는 명목으로 그 자리에 앉은 교인들의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는 그 모습은 항상 볼 때마다 대신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힘이 곧 법도인 이 마도에서는 그녀가 곧 정의이고 법이었으니.
부디 그 절대자의 걸음이 언젠가 중원으로 향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그는 오늘도 붓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보낼 중원의 소식들을 정리한 문서를 적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