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50)

"하늘에 맹세코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시면 봐드릴게요."

일부로 목소리를 낮게 깔면서 여소천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모를 거 같았어요? 그렇게 티 나게 있으면서 모를 거라고 생각하다니. 너무 순진한 거 아니에요?"

"아, 알고 있었어요?"

여소천은 내가 판 덫에 걸려든 모양이었다.

"모를 리가 없잖아요 모를 리가. 그렇게 대놓고 했는데."

"그, 그런.."

여소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여기서 조금만 더 압박하면 금방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아.."

여소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왠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소천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애초에 이런 좁고 한정된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짓이 얼마나 있겠는가.

떠오른 후보는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는 사이에 내 얼굴에 낙서를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간식을 뺏어 먹은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엔 여소천의 눈에 비친 내 얼굴이 멀쩡했으니까 아닌 것 같고

"잠깐만. 말 안 해도 알 것 같아요."

결국 남은 후보는 하나.

"저 자는 사이에 제 간식 훔쳐 먹었죠!"

나는 자신만만하게 내 추리의 결과를 여소천에게 공개했다.

"...네?"

"이 어두컴컴하고 좁은 지하에서 할 수 있는 게 뭐 그거밖에 더 있겠어요? 기껏 해봐야 자는 사이에 얼굴에 낙서 정도겠지만 얼굴은 깨끗한 것 같으니까 후보에서 탈락했어요."

당당하게 가슴을 피면서 여소천을 향해 손가락을 세었다.

"어때요! 제 추리가!"

"어.. 네.. 사실 아까 배가 너무 고파서 조금.."

"흐흠. 예상 대로네요. 뭐, 자존심이 강하시니까 인정하기 싫으셨을 수도 있겠네요."

"...죄송해요."

"맨입으로요!"

여소천의 만행(?)을 밝혀내서 일까

내 텐션은 평소보다 한참 올라간 상태였다.

"미리 말하지만 쉽게 용서해줄 수는 없.."

"..돌아가면 술 사드릴게요. 엄청 비싼 걸로."

"좋아요!"

안 그래도 최근 술을 못 마셔서 굶주린 상태였는데 술이라니.

간식 뺏어 먹힌 정도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오히려 넘칠 정도의 거래였다.

그것도 여소천이 비싸다고 할 정도의 술이면..

-추릅

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입 밖으로 빠져나간 침을 혀로 급하게 혀로 핥자

-움찔

여소천이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떨었다.

"왜 그래요? 혹시 부담돼서 그래요?"

"아.. 네.."

"뭐 무리해서 비싼 걸로 사주실 필요는 없어요. 아무 술이나 잘 먹긴 하니까."

"..알았어요."

분명 긍정의 의미가 담긴 목소리였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표정이 떨떠름해 보였다.

이렇게 자고 일어난 뒤의 대화가 끝나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우리는 다시 보물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

-터벅.. 터벅..

검후는 차갑게 가라앉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멍한 표정으로 길을 거닐었다.

평소의 그녀를 아는 이들이었다면 그녀의 정의감으로 가득 찬 눈 대신 새까맣게 죽어버린 눈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걱정을 할 것이 분명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고독한 편이었기에

수발을 들어주는 여인 외에 평상시에 마주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장문인도 아닌데 오히려 장문인보다 무공의 경지는 물론이고 배분까지 높은 그녀의 존재가 화산의 다른 이들에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걸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끔씩 다른 이들을 만나 검을 봐주는 일은 있었지만 그것 외에 개인적인 친분을 쌓은 이는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제자를 키우던 시절에는 연이 닿아 사귀게 된 이들이 몇 있었지만..

그 일이 일어난 뒤에는 전부 그녀 스스로 내쳐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아.."

그녀의 고민을 알아채 줄 사람도. 들어줄 사람도 없다는 뜻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검을 수련하려고 해도 계속 머릿속에 심마가 피어올라 수련을 방해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제자에 의해 인생을 망치게 된 이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자기 혐오와 죄책감.

오랜만에 제자와 다시 만난. 어쩌면 잘못된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는 것에서 오는 안타까움과 절망감.

그리고 그날 나눴던 그와의 정사를 잊지 못하고 계속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경악 등등.

지난 세월동안 그녀가 '검후'로서 쌓아왔던 감정과 자존심은 점점 금이 가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녀를 정의롭고 품위 있는 영웅이라고 치켜세우지만 검후 본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그 정의롭고 품위 있는 분위기는 자신이 검후로서 쌓아온 감정과 자존심에서 기인한다는 걸.

그리고 그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이상

그녀는 더 이상 정의롭고 품위 있는 영웅의 행세를 할 수 없다는 걸.

"...안돼."

거기까지 상념이 미치자 검을 꽉 쥐며 그녀가 아직 은거하지 않고 화산에 남아 수련하던 이유를 떠올렸다.

천마.

20년 전 봤던 그 무위는 지금도 두렵고 도저히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어째서 인지 지금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녀가 변덕을 부려 중원으로 그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중원에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그때 그 앞을 조금이라도 막아 서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여기서 무너져선 안됐다.

그가 봐준 점에서도 그러지 않았던가.

천마가 화산을 앗아간..다..

'...원래 이런 내용이었나?'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만약 저 내용이 아니라고 해도

지금은 저 내용이라고 믿어야 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화산을 지키기 위해서.

아직 검을 무디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절대로.

이후로도 유적 탐사는 순조롭게 이어져 가고 있었다.

내가 읽은 천기를 바탕으로 대부분의 함정은 해체가 가능했고

최대한 함정을 해체하면서 나아가자 딱히 위험할만한 것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지구에 있던 시절의 상식 때문에 몬스터 같은 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요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런 먹을 것도 없는 유적에 그것들이 어떻게 살아요?]

이곳은 꿈과 환상이 가득한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현실적인 무협의 세계.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진짜 그쪽이 재미 하나는 있었을텐데.'

용사로 소환한다고 했으니 이런 비실대는 몸보다는 무력도 어느 정도는 있을 거고

마법이 있는 세계니까 편의성도 잘하면 지구에 있던 수준만큼 즐길 수 있을 거고

온갖 로망이 가득한 다른 종족들도 많았을..

'..아 멸망한 세계라고 했었지 참.'

생각해보니 저쪽도 마냥 좋은 세계는 아니었다.

저주 때문에 멸망 직전까지 몰려서 다른 세계에서 남자를 소환해야 할 수준이었으니까.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저쪽은 목숨과 안전 하나는 제대로 보장해줄 거라는 거였다.

저쪽 세계 입장에서 나는 여러 의미로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하아.'

안전하고 즐길 거리는 많을 판타지 세계로 가서 죽을 때까지 종마노릇을 하느냐

위험하고 지루한 무협 세계에서 하루하루 살아남을 걱정을 하면서 사느냐.

정말 지옥의 이지선다였다.

'..그냥 지금 눈앞의 일이나 제대로 하자.'

어차피 지구로 귀환하거나 저쪽 세계로 소환될 수 있는 포인트를 모으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지금 당장은 생각해봤자 별로 의미가 없었다.

당장 저번에 모았던 400 포인트도 성녀님 얼굴 보자고 전부 소비해버리지 않았던가.

'너무 간절해 보이셔서 사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낭비 같단 말이야.'

그래도 400 포인트면 적당한 마도구 하나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금액인데 그걸 너무 헛되게 쓴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솔직히 외모는 엄청난 수준이긴 했지만 그래봤자 화면 너머에나 있는 거지 실제로 만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니터 안 캐릭터도 아니라 실제 사람한테 눈요기를 부탁할 수도 없지 않은가.

'..왠지 그 성녀님은 좋다면서 해주실 것 같긴 한데..'

내 몸(?)을 노리시는 입장에서 이제 웬 떡이냐면서 해주실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하.. 내 팔자야..'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텅 빈 포인트라도 보기 위해 상점창을 불러냈다.

내 팔자가 정말 기구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 스승님과 지내던 산에서 뛰쳐나온 걸 후회하기도 늦기도 했지만

어차피 그곳에 있었어도 멸망의 위험이 이 세계에 드리우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이렇게 나온 덕분에 멸망을 막을 확률이 높아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속으로 위안을 하는 사이에 상점창에 나타난 포인트는..

'..400포인트?'

성녀님에게 쓴 포인트를 그대로 돌려받은 수치였다.

분명 그때 일 뒤로 오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1년 분이 넘는 포인트가 들어온 상황.

여소천이 활동할수록 간섭력이 쌓여 포인트가 늘어난다고 듣기는 했지만 상상 이상의 수치였다.

"와아.."

눈을 빛내면서 그 짧은 시간에 채워진 400 포인트를 바라봤다.

설마 여소천이랑 유적 탐사 좀 했다고 이렇게 포인트를 많이 줄 줄이야.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니니까 전부 끝난 뒤에는 500 포인트 정도도 기대해봐도 좋았다.

'1만 포인트.. 불가능한 건 아닐지도..'

사실상 불가능한 여정이라고 생각했던 귀환이라는 목표가 바로 눈앞까지는 아니지만 꽤 선명하게 그려졌다.

'진짜 겨우 탐사 좀 같이 했다고 그 잠깐 사이에 400 포인트나..'

이렇게 퍼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모처럼 좋은 일이 생긴 만큼 기분 좋게 웃으면서 상점창을 닫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상점창이 닫히기 전 구석에 작은 일렁임이 생기며 그곳에 글자가 쓰여졌고

[..보여드릴까요?]

성녀님이 보낸 메세지로 추정되는 문구를 읽자 상점창이 닫히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

순간 몸이 굳은 상태로 그때 봤던 성녀님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고 그 뒤 아주 잠깐 동안 머릿속에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얼굴에 손으로 바람을 펄럭였다.

"아. 근데 저희 이제 얼마나 더 가야.."

그 순간 앞서가던 여소천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인지 고개를 돌렸고 나는 빠르게 모자를 올려서 내 얼굴을 어둠으로 가려버렸다.

"...갑자기 모자는 왜 올리세요?"

"약간 추운 거 같아서요."

"으음.."

"아. 그래서 얼마나 더 가야 하냐고 물어봤죠? 잠시만요.. 제 기억 상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조악하게 만든 지도를 펼치면서 지금 우리가 있을만한 장소를 집으려던 순간

"...근데 저기 저건 뭐죠?"

여소천이 복도 끝에 있는 저 먼 곳을 가리키면서 내게 물었다.

이쯤에 특별히 뭔가 나올 일이 없어서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정말 저 먼 곳에 흐릿하게 무언가가 반짝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눈살을 찌푸려가면서 최대한 그곳을 노려다 보자 반짝거리는 물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는데

-반짝반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