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250)

"아 지하에 묻혀 있.."

-콰자자자작!!!!!

여소천이 검을 휘두르자 푸른 벼락이 내려치면서 주변 바닥이 초토화 되었다.

사람이 검 한번 휘둘러서 크레이터를 만든 상황.

말로 듣기만 했지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던 비현실적인 광경에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저, 저기.."

"아, 아직 안 나왔네요. 다시 한번!"

-콰르르릉!!!!!!!

눈이 아플 정도의 푸른 섬광이 다시 내리쳤다.

귀가 울릴 정도의 커다란 굉음이 들려온 것은 그 다음이었다.

거의 아까보다 2배는 더 커진 규모의 구덩이.

"아. 아무래도 저기가 입구인 것 같네요. 자, 가보죠!"

내가 어버버 하고 있는 사이 여소천이 구덩이 사이로 드러난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건축물로 걸음을 옮겼다.

금방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따라가면서 본 그녀의 뒷모습에서

그녀의 귓가가 유난히 붉게 물들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

.

.

민망한 일이 있긴 있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온 노릇.

"당신 길은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죠?"

"제가 읽은 천기가 제대로 기록된거라면요."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어느새 평소처럼 투닥거리고 있었다.

어느 쪽이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서로 아까 있었던 해프닝은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는 듯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뭐, 천기가 잘못될 리는 없지만 결국 그걸 읽은 게 당신이니 조금 못 미더운 부분이 있네요. 잘못 읽어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함정이라도 밟으면 어떻게 해요?"

"그쪽은 호신강기 두르면 살잖아요."

"그야 당연하죠. 아무리 제작자가 그 개자식이라지만 겨우 유적의 함정 따위에 당할 정도로 헛되게 수행하진 않았어요?"

"그렇죠. 정말 오랫동안 수련 했겠죠."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은데요."

"기분 탓이에요. 아 이 앞에 함정 하나 있어요."

여소천의 말에 가볍게 대꾸하면서 앞으로 나와 천기에서 읽었던 함정을 해체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근처 벽 안쪽에 스위치를 누르면 되는데..'

그러나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벽 안쪽에 숨겨진 스위치를 찾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스위치가 너무 멀리 있었다.

팔을 밀어 넣어서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되는 함정인데 팔이 짧아서 스위치를 못 누르는 상황.

"..하아."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저 안에 있는 스위.. 누르는 걸 누르면 되는데 팔이 안 닿아요."

"어휴. 당신이 그러면 그렇죠. 비켜봐요."

여소천이 내 말을 듣자 내가 있던 자리로 다가와 안쪽으로 팔을 밀어 넣었다.

참고로 여소천이 나보다 키가 크긴 했지만 그건 정말 고작 1~2cm 차이로

그녀가 나보다 팔이 길어봤자

"...이익.."

그녀도 안쪽까지 팔이 안 닿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벽에 몸을 짓눌러가면서 팔을 끝까지 밀어 넣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항상 키가 작다고 놀리긴 했지만

'..성인 맞네. 음.'

벽에 짓눌리는 지방 덩이리를 보면 그녀가 성인이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견을 표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키가 작아서 크게 돋보이지 않을 뿐이지.

'...'

괜히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아까 있던 일이 떠올라 머리를 휘저었다.

그러는 사이 여소천은 여전히 팔을 넣고 낑낑대고 있었다.

그래도 항상 투닥거리던 여소천이 저렇게 낑낑대고 있으니 뭔가 안쪽에서 오묘한 기분이 올라왔다.

내가 못하는 걸 저쪽도 못하니까 동질감도 드는 것 같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해 놓고 저렇게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실소가 나오는 것 같았다.

'길이 보니까 턱도 없어 보였는데 그냥 포기하고 검으로 누르면..'

-달칵

"아. 됐네요."

"잠깐만. 밑장 뺐죠 방금."

나는 급하게 여소천의 어깨를 잡았다.

"뭐, 뭐가요! 제대로 팔 뻗어서 닿은 건데요!"

"방금 허공섭물 썼죠!! 제가 아까 봤거든요!! 당신 팔로 닿을 길이 안 되는 거!"

"새, 생사람 잡지 마세요! 제가 왜 이런 겨우 이런 일에 허공섭물을 쓰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제 팔 길이를 어떻게 알아요! 재 봤어요? 네?"

"윽.."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긴 했다.

내가 그녀와 팔 길이를 재본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지금 재보죠! 손 줘봐요!"

"..네?"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키가 작은 사람들한테는 나름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아무리 작아도 얘보다는 크지.' 의 생각이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깔려 있다고 해야 하나.

"하, 하! 추, 추하네요! 저번에 키로 밀렸다고 팔 길이로 위안이라도 해보려는 거에요?"

"키로 지니까 이거라도 이겨야죠!"

"흐, 흥! 조, 좋아요. 자. 비교해 보시고 본인의 주제를 아시면 좋겠네요."

여소천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다른 쪽 손을 내밀었다.

외모와 어울리는 꽤 고운 손이었다.

'일단 손 크기부터..'

그녀의 손바닥을 펴고 거기에 내 손바닥을 대보았다.

둘 다 외모가 외모인 만큼 손도 작은 편이었지만 재본 결과

"손은 제가 더 큰데요!"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다시 재봐요!"

"다시 재도 똑같은데요! 제가 살짝 더 크네요!"

의외로(?) 손은 내가 더 컸다.

아주 살짝 이었지만 그래도 이기는 부분이 생기니까 뭔가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진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살짝 복구 되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만난 여자 중에 나보다 손이 작은 건 여소천이 처음이었다.

굳이 재본 적은 없지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것도 차이가 적당해야 의미가 있는 말이다.

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다.

"그, 그럴 리가.."

여소천은 겨우 손 크기가 밀린 게 그렇게 충격이었는지 살짝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똑같은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녀의 마음도 이해가 가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녀도 나와 비슷하게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상황 아니었을까.

"흐흠. 이래 보여도 남자라고요."

"..제대로 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말하는 목소리였는데 왜 하필 저런 말만 귀에 제대로 꽂히는 걸까.

속으로 헛기침을 하면서 아무것도 못들은 것처럼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대로면 팔 길이도 제가 더 우세하겠네요. 자, 팔 대보세요."

"...썼어요."

"네?"

"허공섭물 썼어요! 쓴 거 맞으니까! 그냥 넘어가죠!"

"그래도 재기로 한 건 마저 재야죠."

"저, 저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

"얍."

계속 뒤쪽으로 감추려던 손을 낚아챈 뒤 도망가지 못하게 깍지를 꼈다.

방금 전까지 몸부림치던 여소천이 갑자기 굳은 것처럼 얌전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 상태에서 팔 길이를 재보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뭐, 뭐 하는 거에요!"

-팍!

"아야."

여소천이 약간 힘을 실어 내 손을 쳐냈다.

"아,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외간 여자의 손은 그렇게 함부로 다루는 게 아니에요!"

"..이제 와서요?"

"아, 아무튼! 그냥 제가 진 걸로 할 테니까 넘어가자고요! 아직도 갈 길은 멀잖아요!"

여소천은 그렇게 말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어 잠깐 아직 함정 하나 남았.."

-콰직! 콰직!

-쾅!

-서걱!

"..었는데."

순식간에 그냥 나무 조각이 되어버린 함정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정파의 최고 고수 중 한명. 인간을 초월한 괴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괴물을 놀렸던 거고.

"...어."

왠지 모르게 사과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고개를 숙이려던 도중

"뭐해요? 빨리 와요. 괜히 뒤쳐지지 말고."

살짝 뒤를 돌아 나를 재촉하는 여소천과 눈이 마주쳤다.

왠지 여소천의 볼이 붉게 물들어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알았어요."

그녀가 용서해준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으며 지하라 그런지 왠지 더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계속 함정을 해체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리 천기를 읽어서 길을 전부 알고 있다고 해도 이곳은 중원의 모든 곳을 제 안방처럼 들나들고 다니던 신투의 비고.

그 규모가 보통 거대할 리가 없었다.

거기에 미로처럼 꼬여있는 길들과 수많은 함정들까지 생각하면 일반적인 방법으로 이 유적을 탐사하려면 거의 달 단위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다음 해까지 바라봐야 할 정도로.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우리는 지금 제일 빠르고 함정도 적은 길로 찾아가고 있기 때문에 길어봤자 2~3일 정도면 끝까지 도착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이 시대의 열악한 기술력으로 정말 이런 시설을 짓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

"대체 신투는 뭐하던 사람이에요?"

그러니 내게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무공이라는 기적을 눈으로 본 상황이라도 이런 시설을 특별한 기계도 없이 인간의 손으로 지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만약 하려고 한다면 인부들도 무공을 익힌 사람들로 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 자식이 뭐하던 사람이었냐고요?"

"네. 유적의 규모를 보니까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괴짜죠 괴짜. 정말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그런 사람이요."

여소천은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이가 갈렸는지 이를 가는 소리를 냈다.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건지 이상하게 저한테만 못되게 굴고 자주 놀렸어요. 다른 동료들도 저를 자주 놀리긴 했지만.. 그 인간은 유독 심했거든요."

"나이가 많지는 않으셨나 보네요?"

"몰라요? 항상 복면을 쓰고 다녀서 외모도 모르거든요. 성별도 몰라요. 하는 짓이나 말투를 보면 남자인 것 같기도 한데.. 혹시 모르죠. 여자일지."

"..흠."

외모도, 성별도 모르는 신투라.

왠지 모르게 동질감이 드는 느낌이었다.

한때 완전한 신비주의를 위해서 성별까지 감추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내 망토 안에 사실 절세미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때쯤엔 기겁하면서 그냥 여기저기에 남자라고 밝히고 다녔었다.

안전해지기 위해서 모습을 감추는 거지 위험해지기 위해서 가 아니었으니까.

"여러모로 수상한 자긴 했지만 그때는 손 하나라도 아쉬운 상황이었고 정작 직접 나서서 싸우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제법 도움이 됐던 건 사실이에요. 적의 기밀 정보를 가져온다거나 의식에 필요한 재료를 훔쳐온다거나. 의외로 활약을 많이 하긴 했으니까요. 훔치는 거 하나는 정말 잘했거든요."

"괜히 신투가 아니네요."

"뭐, 신 이 붙은 별호는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아, 그리고 천마가 혈교주를 곤죽으로 만든 뒤에 제일 먼저 움직인 것도 그 자식이었어요. 모두가 몸이 굳어있던 사이에 인간의 형체도 남아있지 않은 혈교주의 시체를 뒤져서 혈교의 신기를 가져간 자도 그자였고요."

"아. 여기 있다는 그거요?"

"네. 그리고 다음날에는.. 여기서부턴 말 안 해도 알겠죠?"

"...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