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진정성을 높이기 위해 허리까지 살짝 숙였다.
그러나 이어진 여소천의 말에
"애, 애교 좀 섞어서 해보라고.."
"에이씨 그냥 때려요. 그냥 시원하게 맞고 말지. 시발."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았다.
진짜 저런 걸 신이라고.
.
.
.
"...으윽."
인상을 찌푸리면서 손으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설마 때리란다고 진짜 때릴 줄이야.
-몰캉몰캉
"뭘 봐요? 뭐 구경 났어요?"
"아, 아뇨.."
"좀 살살 좀 때리지 좀.. 으으.."
내가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얼얼한 정도를 보면 빨갛게 달아있을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 각도랑 힘을 조절해서 때렸으니까.. 그냥 아프기만 할 거에요.."
-찌릿
"죄, 죄송해요.."
원망의 감정을 담아서 째려보자 여소천이 몸을 움직여 내게서 조금 멀어졌다.
그래도 미안한 감정은 있다 이건가.
"...하아. 됐어요. 그쪽도 어쩔 수 없이 한걸텐데."
원망스러운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녀도 천지신명이 시킨 일이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성녀니까. 그 성질 나쁜 신의 명령을 듣는 입장이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본인이 좋아서 때린 것도 아니고 즐긴 것도 아닌데 너무 미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좀 살살 때려주지.."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아직도 엉덩이가 얼얼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따끔거리는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자니 옛날에 스승님과 지내던 시절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내 엉덩이가 예쁘다고 했었나 그런 말을 들은 적 있던 거 같은데
'하여간 생긴 건 멀쩡하면서 성희롱은 심해요.'
스승님에게 성희롱 당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그렇게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못 본지 엄청 오래됐네.'
1년 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강호에 나와서 겪은 일들의 밀도 덕분에 전혀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건 사고만 보자면 스승님과 지내던 10년보다 더 많았다.
지루하다는 이유로 위험을 무릅쓰고 산 밖으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제 와서 후회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때 거기 남아 혼자서 3년 동안 스승님을 기다린다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정말 새로운 즐길 거리에 목 말라 있었으니까.
'애초에 제자를 혼자 남겨두고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우겠다던 스승님이 잘못한 거야..'
괜히 스승님을 생각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정을 부렸다.
1년이면 모를까 3년이라니. 길어도 너무 길었다.
스승님처럼 나이가 많으면 모를까 내 나이에 3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데.
그 시간 동안 혼자 농사지으면서 풀때기나 뜯으면서 살라고?
'흥.'
나는 그렇게는 못산다.
천기를 좀 다룰 줄 알 뿐이지 내가 도사나 스님도 아닌데 그런 짓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벽곡단만 먹으면서 수련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강해지겠다는 열망과 목표가 있으니까 그 인고의 시간을 버티는 게 가능한 거지 내 경우에는 그냥 쌩으로 3년을 혼자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도망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절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저, 저기.."
"왜 불러요?"
"슬슬 근처에 도착해서 아마 내일부터는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어느새 비고 근처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당연하지만 마차를 끌고 비고 앞까지 갈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우리 뭐 털러왔소~' 하는 광고를 떄릴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걸어서.. 으으.."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힘이 빠졌다.
이 허약한 몸으로 언제 거기까지 걸어간단 말인가.
간다고 끝도 아니고 그 거대한 비고 속에서 함정들을 피해서 다녀야 하는데 그것까지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졌다.
"힘들 거 같으면 업어드릴까요?"
"..업어요?"
순간 내 시선이 여소천의 전신을 훑었고 그 모습을 본 여소천이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쳤다.
"작아 보여도 당신보단 크거든요! 충분히 업을 수 있거든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말 안 해도 그 시선의 의미는 누구나 알아챌 수 있어요!"
'쳇.'
혀를 차면서 편하게 내리고 있던 모자를 다시 머리 위로 올렸다.
"흥! 업히고 놀라지나 마세요! 경공으로 순식간에.."
"가면 제가 죽지 않을까요."
"..조금 천천히."
약간 시무룩해진 여소천의 모습을 보며 대체 저 여자의 실제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는 걸까 속으로 생각했다.
* * *
-사락 사락
"..여긴가?"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여인이 손에 지도를 든 상태로 지도와 눈 앞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척 봐도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태도.
"저기 어르신. 길 좀 여쭙겠습니다."
"으응? 처음 보는 사람이구만."
그런 그녀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무언가를 여쭈어볼 것이라는 건 쉽게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이 근처에 있는 산에 요괴가 나타난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습니까?"
"요괴?"
"네.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자랑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요괴 퇴치를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요괴.. 요괴라.."
산 근처에 있는 외진 마을이었기에 외부인이 올 일은 거의 없었고 그런 외부인이 요괴를 찾아 왔다는 말은 더욱 낯선 것이었지만 노인은 오랜만에 보는 외지인을 위해 기억을 더듬었고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에게 뭔가를 들었던 기억은 나는군. 원래 이 근처에 있는 산에 요괴가 많다는 말을 들어는 봤던 것 같아."
굉장히 오래된 기억을 꺼낼 수 있었다.
절대 여인의 외모가 제법 미려한 수준이었기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르신의 할아버님 말씀이십니까? 혹시 금색 털을 가진 여우 요괴도 들어보셨습니까?"
"그거까지는 잘 모르겠군. 미안허이."
"아, 아뇨. 괜찮습니다.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노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헤어진 여인은 다시 손에 든 지도를 바라봤다.
조상 대대로 요괴를 사냥하던 그녀의 집안 창고에서 구한 물건.
'팔미호.. 아니 이젠 구미호인가.'
예전에 조상님 중 한분이 꼬리가 여덟 개 달린 여우를 발견했지만 너무 재빨라 미처 사냥하지 못하고 그 여우를 발견했던 산만 위치를 남겨 놓았다는 지도이다.
지도가 많이 낡은 것을 보면 그 사이에 꼬리가 하나 더 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천 살을 먹은 여우는 신에 필적한 힘을 가진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아직은 요괴.
늦기 전에 토벌한다면 세상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체를 팔아 돈을 마련하는 것은 부가적인 것이고.
'새 검도 장만하고 싶고.. 요즘 집이 많이 낡아서 보수를 한번 해야 하는데 지금 빚도 꽤 있고.. 더 늦기 전에 결혼 자금도 쌓아야 하는데..'
고민이 굉장히 현실적이었지만 여인은 자신의 볼을 탁탁 치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산을 바라봤다.
확실히 요괴가 산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산이었다.
하지만 요괴 사냥꾼으로서 미래에 큰 해악이 될지 모르는 요괴를 가만히 두고 있을 수 없는 노릇.
'반드시 찾아주겠어.'
주먹을 불끈 쥐면서 다짐을 새겼다.
요괴라면 사람을 마주치기 싫어할 테니 산 속 깊은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일부터 중턱 위로 샅샅이 뒤지는 거야.'
"저기 잠깐 길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엇. 넵. 죄송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끼릭끼릭
수레에 고기, 책, 다과 등등 잡다한 물건을 싣고 지나간 사내를 뒤로 하고 다시 주먹을 번쩍 들었다.
'난 할 수 있다! 기다려라 요괴!'
"넌 오늘도 갔다 왔냐? 지치지도 않아? 거기 아무도 없다며? 벌써 1년하고 반도 더 지난 것 같다."
"에이. 선수금은 받았는데 일은 해야죠. 그리고 별로 안 힘들어요. 길 정리가 꽤 잘 되어있어서."
"어휴 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애가 아직도 못 잊은거람."
나중에 여인이 이날의 선택을 크게 후회하게 되지만 그것은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소천의 승차감(?)은 제법 괜찮았다.
옛날이었다면 이런 작은 여자한테 업힌다는 게 남자로서의 자존심 비슷한 거에 상처를 낼 수도 있는 일이었겠지만
'몰라.. 이제 자존심이고 뭐고..'
이제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이미 그런 자존심 따위 지키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일반인 여자 하나 못 이기는 몸으로 괴물들이 득실 득실한 세상에서 무슨 자존심을 세우겠다고.
당장 나를 업고 있는 여소천도 겉으로 보기에만 작아 보이지 마음만 먹으면 산도 벨 수..
'있나..?'
그거까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난 괴물인 건 확실했다.
겨우 나 따위가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소리였다.
그리고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이동하는 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편했었다.
여소천도 작긴 하지만 어차피 나도 작기 때문에 억지로 업힌다는 느낌도 없었고
괜히 무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이 균형 조절이나 힘 조절도 능숙해서 빠르게 이동하는 것에 비해 불편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자세가 유독 편하게 느껴지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처음에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자세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여소천이 다짜고짜 취했던 자세가 지구에서 공주님 안기라고 불리던 자세였고
자존심과 별개로 수치심은 남아있었기에 거부한 것도 있었지만
여소천과 나의 신체 조건 상 그 자세에서는 영 민망한 부위들이 서로 닿게 되는 까닭에..
아무리 조심히 달린다고 하더라도 몸이 조금씩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
"..."
지금 여소천과 나 사이에 민망한 분위기가 흐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아, 오해하지 말자. 사고를 친 건 아니었다.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멈췄으니까.
그게 간신히여서 문제였지.
'...원래 몸이 이렇게 민감했나.'
저번에 키스했을 때도 그렇고 이상하게 여소천만 연관되면 몸이 훨씬 민감해지는 것 같았다.
당아영이랑 지내면서 내가 꽤 허접이라는 건 자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조금 빠를(?) 뿐이지 남자 노릇도 제대로 못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진짜 뭐가 있나.'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긁었다.
아무리 사람 몸이 민감해도 정도가 있지 겨우 키스랑 이.. 아무튼 이것 만으로 절정 직전까지 몰리는 건 민감한 수준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정도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직전에라도 멈췄으니까 이 정도로 그친 거지 그 이상으로 나아갔으면..
'..그건 진짜 사고야.'
상상만 해도 몸이 오싹해졌다.
안 그래도 당아영이랑 친 사고 때문에 검후님을 설득하느라 머리가 아픈 지경인데 여기서 여소천까지 얽히면 절대 감당 못한다.
그러니까..
"그.."
"자, 자! 다 왔으니까 빨리 들어가죠! 이 근처라고 했었죠? 하하하하, 금방 찾을 수 있겠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