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250)

눈앞의 인간의 무심한 눈 안쪽으로 차갑게 내려 앉아있는 어떠한 감정을.

그리고 라디아는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광기.

그들이 전장에서 그들의 위대한 주인인 로드 바르슈타인을 볼 때 느낄 수 있던 광기였다.

그제서야 라디아는 깨달았다.

왜 로드께서 이 권속을 그렇게 총애 하셨는지.

이 권속은 로드와 동류였다.

그리고 그것이 라디아의 목이 떨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각한..

-파앙!

"자, 자. 진정하거라. 이 정도면 충분히 된 것 같으니."

그 순간 귓가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던 남성의 목소리와는 다른 여성의 목소리였지만 목소리 만으로도 영혼을 울리는 그 감각은 다른 이들은 구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천한 권속 라디아가 로드를 뵙습니다!"

"그래. 라디아. 음.. 네 관할이.."

"제 7 연구팀 소속입니다!"

"그래. 그랬지. 음."

로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감히 그분과 눈을 마주치고 있을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라디아가 눈을 살짝 돌려 건방진 권속을 바라봤을 때 그녀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 미친년이 감히 검을 아직도 집어넣지 않았어?!'

그녀는 무릎을 꿇지도 않고 검을 그대로 뽑은 상태로 로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상태로.

-덜덜덜덜

로드는 절대 상냥하신 분이 아니다.

그녀는 로드의 마음에 든 것 같다고 기고만장 하게 다니다가 하루만의 변덕으로 그가 그 자리에서 피 웅덩이로 변해 죽어버린 장면을 아직도 기억했다.

"그대도 이제 검을 집어넣거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동료들간의 사소한 다툼까지 간섭하진 않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목숨까지 잃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고."

-덜덜덜덜

라디아는 아직 상냥하게 들리는 로드의 목소리가 더 낮아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했다.

만약 여기서 저 권속이 사고라도 더 쳤다간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권속은 보통 미친년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수고한 만큼 보상은 받아야겠는데."

라디아는 로드께 대고 당당하게 대꾸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저 권속은 끝났다고.

감히 로드의 뜻을 거스르고도 살아남은 자는 지금까지 본 적 없..

"아아. 그건 그렇군. 자, 원하는 만큼 취하게. 승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니."

'어?'

라디아는 머리를 한대 얻어맞기라도 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그녀가 보고 들은 장면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로드께서.. 자비를..?'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볼 수 있었던 것은 어느새 시야를 가득 메운 여인의 얼굴이었다.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빼려던 순간

-꽈악

"꺄악!"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억지로 자신의 머리를 들어 눈을 마주치게 만들자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시야를 메우기 시작했다.

"내놔."

자신의 것을 취하겠다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으로부터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뭐, 뭘 드리면 될까요?"

그리고 눈 안쪽에 보이는 차갑게 가라앉은 광기 외에 한 가지 감정을 더 느낄 수 있었다.

"돈, 재료, 약물, 강해질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힘을 향한 강한 열망을.

* * *

-펄럭 펄럭

"꽤 무자비하게 털더군. 설마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전부 털 줄이야."

"불만이야?"

"그럴 리가 있겠나. 상대를 제대로 보고 덤비지 못한 그 라디.. 그녀의 잘못이지. 내가 말렸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에 목숨을 잃지 않았겠는가."

검화는 바르슈타인의 말을 들으며 그 뒤에 그래도 목숨 값에 비하면 싸다는 말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랬다면 이 세계에서는 임무와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절대 죽지 말라는 내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되니까. 감히 내 명령을 어기는 것에 비하면 전재산을 잃는 것쯤이야. 새발의 피에 불과하지."

"..."

그동안 그녀가 바르슈타인과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점은

그녀는 정말 모든 뱀파이어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런 사고방식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고.

"그나저나 그 정도면 꽤 강해진 것 같은데 아직도 그렇게 힘을 갈구하다니. 그 원수라는 자가 상당히 강한 모양이야?"

-멈칫

검화는 검을 닦던 손을 멈추고 머릿속에 한 얼굴을 떠올렸다.

한때 정말 사랑하고 세상의 전부였던 부모와도 같았던 스승님이지만

이제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원수였다.

자신을 죽인 것까지는 원망하지 않았다. 스승님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까드득

'용서 못해..'

자신도 하지 못했던. 유성이를 건드는 짓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스승님이라면 절대 유성이를 탐내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만큼 배신감은 더더욱 컸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스승님이.

매일 올곧은 모습만을 보이시며 그것을 자신에게 가르쳤던 스승님이 그런 짓을 할 줄이야.

나이도 먹을 대로 쳐 먹어 놓고 유성이를 탐해?

유성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유성이가 스승님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억지로 밀어붙이고 겁탈한게 분명했다.

그때 자신에게 말했던 유성이도 좋아했다던 말은 전부 개소리가 분명했다.

-까득.

그래야만 한다.

"흐, 대답하지 않아도 알 것 같군. 꽤 까다로운 원수를 둔 모양이야."

"..."

"뭐, 물론 이 몸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 가공할 정도의 성장 속도를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항상 놀랍군. 특히 그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오는 힘은 유독 특이해서.. 항상 기적을 일으키곤 한단 말이지."

"...사랑.."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정말 까다로운 감정이야. 대체 그게 뭐라고 서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기껏 힘들게 해 놓은 완벽한 계산을 어그러트려놓곤 하는 건지."

뒤에서 바르슈타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그녀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치를 떠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깨부수어 왔을 지도.

하지만 내게 그딴 건 알 바가 아니었다.

-뽀득 뽀득

나에겐 내 사랑이 제일 중요하니까.

스승님을 넘어서서 그 품에 안긴 유성이를 다시 내게 뺏어오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내게 더 이상 남에게 베풀 친절이라는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내가 준 새로운 이름은 마음에 드는가? 그러고 보니 소감을 못들은 것 같군."

그녀가 이 세계의 언어는 어렵다고 나를 부르는 명칭.

소드 플로라(Sword Flora)      

이세계의 언어로 검과 꽃을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검화라는 별호 보다는 저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내가 네 나이였을 때 나의 별호도 검화였다.]

비록 뜻은 같을 지언정

저의 꽃은 당신의 꽃과 다를 겁니다.

'스승님.'

"그러고 보니 인간들이 한다는 그 섹스.. 교접이라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나? 나는 직접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고 했으니 그대는 아마 해보았겠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구체적인 소감을 좀 들어보고 싶다만."

"......"

"자, 그러면 이제 지금까지 정리한 내용들을 한번 읊어보게.. 아, 아니 읊어보죠."

아직도 연기의 후유증이 남아있는지 검후님의 성대모사를 하던 여소천이 급하게 원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분명 처음에는 나를 도와준다는 목적이었는데 정작 여소천은 꽤 재밌게 즐긴 모양이었다.

"재밌었어요?"

"재, 재밌었냐뇨! 그게 도와주는 사람한테 할 말이에요!"

"그런 거 치고는 되게 즐기시는 거 같던데."

"즈, 즐기는 게 뭐가 어때서요! 괜히 쓸데없이 죽상인 것보다는 낫죠!"

"..뭐 그렇긴 하지만."

"기껏 도와준 거니까 정리나 해봐요! 다시 그 연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하아."

한숨을 쉬면서 연극 도중 틈틈이 썼던 종이를 꺼내 그동안 정리했던 주의 사항들의 목록을 눈으로 훑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최상단에 위치하고 별 모양으로 강조까지 되어있는 문장.

"절대 내가 다른 세계 출신이라는 걸 말하지 않는다."

"음음."

처음 말이 나온 뒤에도 계속 강조했던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꼭 감춰야 하는 거에요? 어차피 그쪽은 다 알고 있잖아요. 굳이 검후님만.."

여소천이 거듭 강조하면서 만류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그렇게 까지 감춰야 할 사실인가 싶었다.

이미 스승님이나 여소천은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고 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 그 여자는 알다시피 고지식한 면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 그것도 중원 출신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 소년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게 썩 좋게 보이진 않을 거라는 거죠. 혹시 모르잖아요. 악귀로 취급 당해서 베려고 들지도."

"..그러게요 대체 누가 다른 세계의 사람을 소년의 몸에 넣은 걸까요."

"저, 저 쳐다보지 마세요? 제가 한 거 아니에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여소천을 바라봤다.

하긴, 나를 이 몸에 집어 넣은 건 천지신명이니까. 여소천이랑은 관련 없..

"갑자기 화나서 그러는데 한 대만 때리면 안돼요?"

"제가 한 거 아니라니 까요?!"

"화신체잖아요. 사실상 본인으로 취급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분의 명이나 부름을 받을 뿐이지.. 몸을 빌려드리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러면 저번 일은 뭔데요?!"

"그, 그것도 거의 10년 만에 있던 일이라고요! 저라고 거기서 몸을 빌려드리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10년 만에 몸을 빌려서 내려와서 한 게 키스?

'진짜 뭐 하는 사람.. 아니 신이지?'

이딴 게 신?

아무리 무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파면 팔수록 무례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행적이다.

"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멈추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왜요."

"또 볼기짝을 때리라고 명령하시는 걸 지금 간신히 막고 있거든요..!"

"..."

'즈..승흡..느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사과 기도를 올려 보냈다.

여기서 더 생각하면 계속 무례한 생각이 떠오를 것 같아서 일부러 딴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여소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다시 하라는 데요?"

"...네?"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하라는 데요?!"

여소천이 내게 당황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대체 어떤 식으로 사과했기에 이러는 거냐는 뜻이겠지.

-까득

정말 이가 절로 갈렸지만 다시 순수하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한번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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