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250)

"크흡.. 저도.. 참으려고 했는데.. 자꾸.."

-스릉

"다물겠습니다."

"검을 뽑아야만 말을 듣는 건 좋은 습관은 아니네."

"넵."

"그보다 우선 앉게나.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검후님의 진지한 목소리와 달리 여소천의 입가에 헤실헤실 맺혀있는 미소는 그녀가 지금 이 상황을 꽤 즐기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어째 그녀의 놀이에 휘말린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 연극이 도움이 될 거라고 믿으면서 맡은 배역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검후님. 드릴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인데 부디 노여워 마시고 끝까지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해보게나."

"후우.."

실제로 말하는 것처럼 느낌을 내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실제로 검후님을 눈앞에 두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뛰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 정도로 중요한 상황이라 그런 거겠지.

하지만 이대로 계속 심호흡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실제 검후님에게 말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입을 열어야 했다.

"제가.. 얼마 전 다른 여인과 정을 나누었고.. 그 여인과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몰라 당아영의 이름은 꺼내지 않았다.

"..."

여소천의 동공이 말없이 떨렸다.

확연히 당황했다는 감정이 드러나는 상황.

-꿀꺽

"..죄송합니다. 저번에 검후님과 있었던 그 일도 제대로 매듭짓지 않은 상태로 이런 소식을.."

그때였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가?"

여소천.. 아니 검후님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예?"

"나는 그대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대의 혼사를 나에게 사과할 정도의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그게 무슨.."

"혼인을 치르기로 했다면 그 여인의 곁에 머물러있어야 하지 않겠나. 괜히 부인이 오해할 수 있네."

"...!"

그 말의 의도를 파악한 순간 감동이 몰려왔..

"이게 당신에게 있어선 가장 최상의 결과겠죠. 그럴 가능성이 굉장히 낮긴 하겠지만."

"아."

다가 사라졌다.

결국 지금 상황은 여소천과 돌려보는 상황극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검후님이라면 그렇게 나와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죠. 요즘 그녀에게 심경의 변화가 얼마나 있었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우으.."

"정의로운 거랑 호구는 달라요. 특히 남자 문제가 얽혀있을 때의 여자는 예측하기 힘들거든요."

좋았다가 말았다.

정말 쓰레기 같긴 하지만 저게 내게 있어선 최상의 결과였다.

없던 일로 하자고 했던 말대로 정말 없던 일로 치는 것.

"그런데 당신 당아영이랑 정말 결혼할 생각이에요?"

"..결혼한다고 하면 봐주실 가능성이 올라갈 것 같아서."

"와 진짜 쓰레기네."

"...일단 멸망부터 막아야 결혼이고 뭐고 하지 않겠어요?"

결혼이고 뭐고 일단 세상부터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고 불린다지만 정말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생겼는데.

"이렇게 보니까 당신 정말 색마에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자들 등쳐먹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에요."

"..."

슬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

"또 뭐가 생각났어요?"

"그.. 검후님은 아직 멸망에 대해서는 모르시죠?"

내 말을 들은 여소천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왠지 예상이 가는데요."

"이 문제는 멸망부터 막은 이후에 해결해 보자고 설득하는 건 어떨까요?"

"하아.."

내 말에 여소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미간을 짚었다.

"이제는 그런 중요한 문제까지 당신 여자 문제에 사용하시겠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죠."

"후우.."

여소천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고민에 잠긴 것 같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일단 한번 해보세요. 제가 받아줄 테니까."

"..그거 아직 해요?"

"아까 보셨잖아요? 이거 은근 효과 괜찮아요."

다시 상황극으로 들어가자는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확실히 몰입감이 꽤 괜찮긴 했었으니까.

"..검후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순순히 상황극으로 들어갔다.

"말해보게나."

"사실.. 제가 얼마 전에 다른 여인과 정을 나누었고.. 그 여인과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라?"

여소천이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저번에 나와 그런 일을 나눈 지 얼마나 됐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저번에 내게는 없던 일로 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그, 그게.."

"나는 그때 그대가 그대 나름의 목표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아직 여인과 엮여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대를 이해했었네. 근데 이게 뭔가? 섬서에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혼인? 저번에 그대에게서 그대에게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한 것 같다만."

"자, 잠깐만요. 제가 설명을.."

"변명은 듣지 않겠네.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던 모양이야."

-스릉

검후..아니 여소천이 차가운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저번에 내게 말이 없던 것을 생각하면 섬서에서 새로 만난 여인이겠지. 아니면 그 사이에 감정이 발전했거나.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혼인이라는 중대사를 결정할 정도라면.. 일반적인 관계로 쌓아 올린 사랑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겠군."

"검.. 아니 소천님? 그거 휘두를 거 아니죠?"

"죽어라 색마."

"자, 자, 자, 잠깐만 잠깐만! 말을 꺼낼 시간은 줘야죠!"

"..아. 그러면 '변명은 듣지 않겠네.' 부터 다시 하죠."

깜빡 잊었었다는 듯이 말하는 여소천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이 사람 제대로 몰입했다고.

"흠흠. 그러면 다시 할게요. 변명은 듣지 않겠네.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검후님은 이 세계가 위험하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이번엔 말을 끊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페이스를 저쪽에 주면 안됐다.

"..그게 무슨 말인가?"

"검후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요즘 혈교라고 불리는 이들이 돌아와 중원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걸."

"..허. 겨우 그 잔당들 얘기라면 세계가 위험하다는 말은.."

"사실 그들은 검후님이 아는 혈교가 아닙니다. 다른 세계에서 온 마귀들이죠. 지금은 혈교의 탈을 쓰고 있을 뿐 내용물은 검후님이 아는 혈교와는 많이 다릅니다."

여소천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제 저게 연기인지 실제 반응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대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그 말을 증명할 수단은 있나?"

"그건.."

그리고 돌아온 꽤 위협적인 한마디.

-꾸욱

손을 꾹 쥐고 떨리는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다른.."

"잠깐 멈춰요!!!"

"에?"

얼빠지게 열려있는 내 입을 여소천의 손이 틀어 막았다.

"안돼요!! 그건 말하면 안돼요!! 전 거기까진 감당 못해요!"

"????"

"그, 그 말을 들은 검후를 연기하려면.. 아, 아무튼 안돼요!! 지금도 하면 안되고 실제로 검후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큰일 나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여소천이 저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머리에 새겼다.

-카앙!

-카앙!

햇빛이 들지 않는 깊은 지하실.

중원인지 그 밖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외딴 그곳에서 붉은 눈의 남녀가 검을 나누고 있었다.

둘 모두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탓에 병약한 느낌을 주기 쉬웠지만 둘의 검격을 본다면 그런 인상은 바로 달아날게 분명했다.

중원의 무공처럼 보이면서도 그 위에 알 수 없는 이능이 겹쳐진

중원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예.

두 남녀 사이에도 수준의 차이가 있었는지 합이 오갈수록 여성의 검이 남성의 것을 앞지르기 시작하더니

-챙!

-푹!

여성의 검격에 의해 남성의 검이 그의 손을 벗어나 벽에 박혔다.

대련 도중에 검을 놓친다는 검사로서의 큰 수치.

"..한 수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것을 느끼지도 않았는지 순수하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

-홱

그러나 여인은 그런 사내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마치 바닥을 지나가는 벌레를 보는 것 같은 무심한 표정.

"이, 이익..!"

그녀의 얼굴이 향한 곳은 저쪽 뒤편에서 그들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붉은 머리의 여성이었다.

"뭐 하는 거야!! 고작 저거 하나 못 이겨?! 내가 그럴려고 너에게 온갖 강화 약물을 투자한 줄 알아?! 빨리 다시 싸워! 검 들라고!!!"

"..말을 올리기 죄송하지만 다시 검을 들어도 바뀌는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제 패배입니다."

"이이익..!"

그녀는 사내를 향해 짜증을 부리며 발을 구르다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그와 대련을 한 여성을 바라봤다.

"까, 까불지 마! 니까짓 년이 무슨 수를 써서 로드님의 총애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네 힘이 아니야!! 로드께서 네게 하사해 주신 힘을 네 힘인 것처럼 우쭐대다간 이 라디아님 께서 네년의 심장에 말뚝을.."

"야."

-흠칫!

자신을 라디아라고 칭한 여인은 신랄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느껴지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여인을 보며 몸을 떨었다.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자신의 주인의 곁도 지키지 못한 권속이 감히 로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에 질투심이 나서 건 대련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권속 중에서도 가장 강한 권속으로. 살아있을 적에는 무려 소드마스터였던 데다가 권속이 된 이후에 자원을 아끼지 않고 온갖 강화물품을 덕지덕지 발라줬는데..

'어떻게 저런 주인도 없는 권속년 따위한테!'

깔끔하게 패배했다.

자기 주인도 제대로 모시지 못한 반쪽 짜리 권속한테 패배했단 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물러섰다간 고작 그런 권속한테 쫀 흡혈귀 취급 당하며 동료들에게 멸시를 받을게 분명했다.

뱀파이어는 품격과 자존심이 높은 밤의 귀족. 그들에게 있어서 자존심을 굽히는 일은 목숨을 내놓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살 바에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을 정도니까.

하지만..

'이건.. 못 이겨.'

라디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눈앞의 주인 없는 권속이 검을 뽑기만 한다면 자신의 목은 그대로 날아갈 것이라고.

'나를? 감히 권속 주제에 뱀파이어를?'

이런 생각은 눈앞의 인간에게 통하지 않았다.

천천히 그녀의 손이 검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시야에 그려졌다.

그 순간 라디아는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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