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250)

'뭐지?'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마지못해 처음인 걸로 치고 넘어가자는 그런 뉘앙스의 말처럼 들렸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뇨 없어요. 뭐.. 그렇죠."

"???"

"그냥 넘어가죠. 그래서 그때 둘 다 첫 경험을 교환했는데.. 당신이 검후에게 없던 일로 하자고 말했었죠. 서로에게 좋지 않을 거라는 핑계를 대면서."

"윽.."

지금 와서도 느끼는 거지만 정말 쓰레기 같은 발언이었다.

아무리 내 의사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내 목숨을 위해 희생하신 분께 그런 말을 하다니

착한 검후님이어서 잘 넘어갔던 거지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싸대기를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맞을 각오도 하긴 했었다.

정말 맞았으면 죽었겠지만.

"..근데 그렇게 말해 놓고 지금 당아영이랑 또 사고를 쳤다.. 근데 그걸 검후에게 들키면 색마라고 몰려서 목이 날아갈 것 같다.. 이거죠?"

"ㄴ, 네.."

"왜 그래요. 색마 맞잖아요. 그냥 당당하게 인정하세요. 자기는 목숨을 구해준 은혜도 잊고 다른 여자랑 잔 쓰레기라고."

"인정하면 죽잖아요?!"

"그러게 누가 당아영이랑 자래요?"

"아으으.."

당아영에겐 정말 미안했지만 그날의 일은 내 인생 최악의 실수였다.

술을 먹든 뭘 먹든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근데 이미 일어난 걸 되돌릴 순 없잖아요.."

"전형적인 쓰레기의 사고방식이에요."

"그치만 사실인걸요.."

잠깐 올라갔던 기분이 다시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좀 도와주세요.. 상담해 준다면서요.."

"상담만 해준다고 했지 해결해준다 고는 안 했는데."

"우리 사이에 이러기에요?"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요?"

여소천의 나몰라라 하는 태도에 이쪽도 열이 올랐다.

이렇게 싸우면 어린애들 같아서 안 그래도 둘 다 어린 외모인 걸 신경 써서 말 안 하려 했는데 안되겠다.

"그쪽도 제 입술 가져갔잖아요? 그것도 무자비하게! 꽉 끌어안고 혀로 유린했으면서!"

"푸흡!"

서로 암묵적으로 꺼내지 않고 있던 예전의 일을 꺼내왔다.

여소천은 여기서 이 말이 나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제, 제가 한 일 아니거든요?! 제가 아니라 천지신명님이 한 거에요!"

"누가 했든 당신 몸으로 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천지신명이 그런 짓을 왜 저질러요! 다른 사람 몸 빌려서 다 자라지도 않은 남자애 입술이나 뺏는 게 천지신명이에요?!"

"다 안 자랐다뇨! 당신 몸도 정신도 약관 넘긴 성인인 거 모를 줄 알아요?!"

"그게 중요한 거에요?!"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다른 의미로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는 문제라!"

대체 그게 왜 중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고

"아무튼 이제 와서 남남이라고 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날 우리가 키스한 거 검후님은 모르거든요? 수틀리면 같이 죽는 수가 있어요? 당아영이랑 다르게 이번엔 제가 피해자라고요?"

"윽.."

그랬다.

아무리 입 만이라고 해도 이 세상은 성적으로 꽤 보수적인 세상이라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남자가 여자한테 입술 좀 유린 당했다고 어디서 떠들어 대봐야 제대로 귀를 기울여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검후님이었다.

"아무리 그쪽이 옛 전우라고 해도 봐주진 않겠죠!"

"크읏.."

비록 나도 추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여소천도 확실히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패가 내 손에 있었다.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여소천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그, 그런데 저는 사과 했잖아요! 저번에 당신이 책임질 필요 없다면서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기에요?!"

"그, 그건.."

예상치 못하게 여소천으로부터 역습이 날아왔다.

"제가 잘못을 했고 그래서 그 대가로 책임까지 진다고 했는데! 그걸 본인이 필요 없다고 거절해 놓고 이제 와서 이렇게 나와요?! 완전 꽃뱀 아니에요?!"

"애, 애초에 키스 한번 했다고 결혼까지 가는 게 이상한 거에요?! 그렇게 따지면 제가 길 가는 아무 여자 붙잡고 키스한 다음에 책임진다고 말하면 다 해결 되게요?!"

"..그건 될 거 같은데."

"뭐요?"

"아, 아니에요."

만약 남들이 여소천과 내가 싸우는 장면을 본다면 꽤 귀여워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침 둘 다 키도 작고 어려 보이는 외모라서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어린애들끼리 싸우는 모습처럼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정작 오고 가는 대화는 전혀 애들 수준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기껏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좀 제대로 도와주세요. 어차피 우리 둘만 입 다물고 있으면 검후님은 그때 있던 일 알지도 못해요."

"..왠지 그렇게 말하니까 내연녀가 된 기분이에요."

"검후님이랑 제가 딱히 연인 관계도 아닌데요 뭐."

말하고 나서도 지금 상황이 참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검후님과 나는 서로 교접은 했지만 아무 관계도 아니고

그 상태에서 당아영과 반쯤 약혼을 맺었으며

여소천이랑은 크진 않더라도 육체적인 교류를 나눈 상황.

'...진짜 색마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여소천의 경우는 오히려 내 쪽이 피해자였지만 결과만 보자면 색마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양은 몰라도 질만 보자면 몇몇 색마보다 뛰어날지도 모르겠다.

정파의 영웅 두 명에 최고의 후기지수인 봉황..

죽어서 지옥에 간다면 오히려 색마들이 내게 엄지를 치켜세우지 않을까.

잠깐 그런 슬픈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요. 도와주죠. 그쪽이 정말 검후의 손에 참수되면 이쪽도 곤란하니까."

"..근데 정말 참수를 할까요?"

"확률은 반반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예전에도 스스로 자신의 아픈 손가락을 깎아낸 적이 있으니까."

"어 그런 일도 있었어요?"

"...네. 있었죠."

여소천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도 검후의 약점을 잡고 협박이라도 해볼까요? 원래 협상의 기본은 상대의 약점을 잡는 건데."

'와 이딴 게 도사?'

"도와주려는 사람한테 너무하네요."

"생각도 읽을 줄 알아요?!"

"아뇨 당신 표정에 다 드러난다니까요."

여소천의 핀잔에 머리를 긁으며 그녀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검후님의 약점..'

좀 더 평화로운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도중

"약점이란 게 뭐 별건 가요. 당장 당신 목에 했던 짓만 해도.."

"..목이요?"

여소천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래서 내가 의문을 가지고 되묻자

"..아. 이건 아니구나."

"?"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착각했네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어떤 말인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목이 약간 따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지 말고 일단 검후님에 대한 파악을 한번 다시 해보죠. 여러가지 상황을 가정해보고 그때 검후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한번 생각해보는 그런 방식으로."

"협박은 안 하고요?"

"그.. 도사라면 보통 평화로운 방법부터 찾지 않아요?"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말 뿐인 협박이라면 평화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이런 사람이 성녀일까.'

아니. 생각해보니까 이 세상에서 이 정도면 평화로운 편일 수도 있다.

일단 문제가 일어나면 칼부터 뽑는 세상이니까 저 정도면..

'..그래. 이 정도면 양반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스님들이나 도사들도 무를 갈고닦는 세상인데 뭐

협박이라도 말로만 하겠다는 것 정도면 평화로운 게 맞았다.

"아무튼.. 상황 가정이라고 했었죠? 그러면 저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요."

"뭔데요?"

"제가 검후를 연기하는 거죠. 그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연기요..?"

"저를 검후라고 생각하고 행동해 보세요. 그러면 제가 그녀가 할법한 반응을 보일 테니까."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절친..이라고 까지 할 건 아닌 것 같지만 전쟁터에서 등을 맞대고 싸웠던 사이 아닌가.

나보다 검후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성별이나 나이대(?)가 비슷하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네요.. 둘이 닮은 점이 많으니까.. 꽤 괜찮은 방법이겠어요."

"저 왠지 모르겠는데 검이 뽑고 싶어졌어요."

"기분 탓이에요."

"으음.."

'항상 속으로만 생각하는데 어떻게 낌새를 눈치채는 건지..'

감이 좋은 무인들의 세상이니 여자의 직감도 어쩌면 정말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 잠깐만.

"..저기 방금 설득할 때 쓸 말이 하나 떠올랐는데요."

"뭔데요?"

"나이 차이를 얘기하는 건 어떨까요?"

"10할의 확률로 참수 되고 싶다면 말리진 않을게요."

"힝.."

그래도 나름 현실성 있는 변명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진짜 여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요. 비록 나이는 먹었어도 마음 만은 그때 그 시절을 유지하고 싶은 게 여자인데. 심지어 몸도 젊은 몸인데."

"근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대체 둘 몇ㅅ.."

"지금 이 자리에서 죽고 싶다고요? 아무리 봐도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 같은데."

"..."

정말 궁금하긴 했지만 그래도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의식 저 깊은 곳에 묻어두기로 결심했다.

다른 사람이 상담 상대였다면 모를까 하필 대상이 여소천이니 나이 얘기는 아예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상냥한 검후님이 설마 나이 얘기 좀 했다고 나를 죽일 것 같지는 않..

...지만 그래도 민감한 이야기니까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기로 하고

"뭐부터 얘기해볼까요?"

"일단은 순수하게 자백부터 해보는 건 어떨까요? 무릎 꿇고 싹싹 비는 거죠."

"도게자라도 해야 하나.."

"아, 잠깐만 있어봐요. 저도 조금 준비 좀 할 테니까. 크흠. 흠."

여소천이 잠깐 목을 가다듬더니

"이 정도면 어울리나?"

검후님과 꽤 비슷해 보이는 목소리를 냈다.

"어, 어떻게 한 거에요?"

"내공을 이용한 잡기지. 성대의 발성을 조절하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 쯤이야 쉽게 할 수 있네."

"..말투까지 따라하시네."

"..말투는 그냥 둘까요?"

"아뇨, 뭐.. 몰입하기 좋게 그냥 말투도 바꾸죠."

"알았네."

분명 모습은 여소천인데 검후님의 목소리와 말투가 나오는 상황이라 보면 볼수록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걸 참게 된다.

저렇게 작고 어려 보이는 외형으로 검후님의 목소리와 말투라니..

"푸흡.."

"웃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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