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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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각다각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이제 익숙해져서 그런지 옛날에는 그렇게 아프던 통증도 이제 많이 옅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여소천과 둘밖에 없는 마차 안에서

"..지금 뭐하세요?"

"자수 만들기요."

나는 당아영이 챙겨준 자수를 만들고 있었다.

딱히 내가 손재주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기 보다는 그냥 시간을 때우기 위한 일이었지만

-스륵 슥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조금씩 완성되어가는 자수를 보다 보면 어딘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남자가 그런 걸 만들어요? 아무리 주변에 강한 여자들밖에 없다고 해도 그렇지 당신 남자 아니에요?"

"그거 남녀차별이에요."

"..뭐, 은근 어울리는 그림 같기도 하네요. 남자 답게 생기지 않기도 했고."

"..그건 별로 환영하고 싶진 않은데요."

여소천의 말에 한숨을 쉬었지만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슬픈 사실이었다.

내 외모가 남자 답게 생기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성장이 멈춰서 그래요.. 다 자라기만 했어도 남자다운 외모였을걸요.."

"...딱히 그럴 것 같진 않은데요. 타고난 근골 자체가 약골 그 자체라서 근육도 붙어봐야 그닥.."

"으으윽.."

팩트폭력이 너무 아팠다.

아무리 사람이 성장하면 바뀐다고 하지만 그래도 본판이라는 게 있다.

이 몸으로 제대로 커봤자 어디까지 크겠는가.

아마 잘 커봐야 당아영이랑 비슷한 수준이었을 거다.

-투덜투덜

"뭐 어때요. 세상은 키가 전부가 아니에요."

입을 삐죽 내밀고 마저 자수를 맞추려다가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근데 그쪽도 저한테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 않아요?"

"네?"

"성장이 멈춘 건 저나 그쪽이나 똑같.."

-스릉

"..조용히 할게요."

먼저 시비건 건 저쪽이면서 나는 한마디도 못하게 한다.

뭐, 키 얘기에 민감한 건 알고 있었지만.

"흥, 한번만 봐드릴게요. 다시 저한테 그 얘기를 꺼내려 했다간 검후에게 다 일러바칠 거에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한테 당신의 약점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그대로 황천길을 건널뻔했다.

'검후님도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하는데..'

자지 한번 잘못 놀린 것에 대한 대가를 뼈저리게 채감 중인 상황.

당아영은 여소천 덕분에 어떻게든 활로가 눈에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검후님은 아니었다.

당아영과 똑같은 방식으로 충격을 줄 수도 없었다.

검후님을 상대로 그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 차이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중원에 얼마나 있겠는가.

아무리 중원이 넓다고 해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일 거다. 어쩌면 없을 수도 있고.

'아.'

딱 한 명 생각나는 건 있었다.

천마.

검후님 본인이 당시에 압도적인 무력 차이와 그곳에서 오는 무력감을 느끼셨었다고 했었으니 아마 천마님은 그 조건에 부합하긴 할 거다.

근데 내 어장관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검후님과 천마를 붙게 한다?

제대로 미친 소리였다.

그거야말로 색마 아닌가. 색으로 유혹해서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가는 마두.

일어나면 그냥 둘이 싸우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느 쪽이 이기던 사실상 전쟁이었다.

이번 천마는 평화로운 성격이라고 하는데 그걸 굳이 건드릴 필요가 있겠는가.

애초에 고작 나 따위한테 천마신교의 교주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힘 따위가 있을 리도 없고.

'...그러고 보니..'

-힐끔

눈앞에 있었다.

수상할 정도로 세상의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뭘 봐요?"

"궁금한 게 있어서요."

"..왠지 불길한데.. 일단 말이나 해보세요."

"천마는 어떤 사람이에요?"

-멈칫

천마라는 말이 나오자 마자 여소천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정도로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까

"..그 여자는 갑자기 왜요?"

표정이 나빠진 여소천의 모습이 보였다.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좋아 보이진 않는 표정이었다.

"아뇨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요. 그쪽도 직접 보기도 했을 거 같고."

"...아뇨. 그 여자 이야기는 가급적이면 꺼내지 마세요. 아니 그냥 생각도 하지 마세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들리는 소식만 들었을 때 무림 침공도 안 하는 걸 보면 천마 치고는 평화로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여소천이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알아서 신교에 박혀있는 그 괴물이 중원 밖으로 나오면.. 감당하지 못해요. 안 그래도 죽다 만 시체들 때문에 복잡한 상황에.. 그녀는 너무 큰 변수에요. 괜히 자극하지 말고 거기 박혀있게 두는 게 나아요."

흡혈귀들도 죽다 만 시체들, 구더기들 이라고 표현하는 여소천이 천마를 괴물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그 무력이 짐작도 가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센 거지.'

오히려 더 궁금증이 솟았지만 여소천의 반응 때문에 더 이상 천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고

나도 그냥 앞으로 만날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그녀와 만날 일이 있다면

그건 내가 그녀에게 가거나 그녀가 내게 오는 쪽일 테니

어느 쪽이던 절대 환영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 *

"스승님. 그러고 보니 스승님은 화장을 안 하십니까?"

어느날 의문이 들었던 부분이었다.

당연히 밖에 나가지도 않고 우리 둘만 있는 마당에 무슨 화장을 하겠냐만 아무리 그래도 화장 용품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드렸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도 참 스승님 다웠는데

"안 해도 완벽한데 할 이유가 있느냐?"

정말 재수 없지만 할 말을 없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자, 제자인 네 입으로 말해보거라. 이 스승의 외모에 어디 부족한 점이 있더냐? 화장으로 감춰야 할 만큼?"

"..없습니다."

"그래. 의문이 해결 됐다면 다행이구나."

"그런데 그걸 본인의 입으로 말하시는데 거리낌도 없으십니다?"

"예로부터 오만은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오만이란 부족한 이가 본인의 부족함을 모르고 뽐낼 때나 오만인 것. 이건 나 스스로 가질 자격이 충분한 자부심이다."

"네~ 네~."

괜히 물어봤다가 본전도 못 건진 것 같아서 마저 바닥에 묻은 먼지를 쓸었다.

"그리고 화장이 필요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남 말하지 말 거라."

"남자가 무슨 화장입니까 화장은."

"네가 몰라서 그러는거니라. 본인의 외모를 가꾸는 것은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니."

"됐습니다.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네요."

남자들이 거울을 보면서 화장하는 모습이 떠올라 속이 안 좋아졌다.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처럼 생겼다던 말은 누가 하셨는지도 잊으신 모양입니다."

"그땐 네가 나를 너무 경계하고 있기에 풀어주려고 했던 말 아니더냐."

"방금 데려온 사람이 이불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같이 덮어야 한다고 말하면 쉽게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 치고는 꽤 평온하게 자더구나."

"..."

말없이 얼굴을 붉히면서 바닥을 쓸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그날은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편안하게 잘 수 있던 날이었다.

...비록 숨이 좀 막혔었지만.

-다각다각

"후우.."

마차를 타고 가면서도 지금 내 상황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고 계속 한숨이 나왔다.

애초에 하루 이틀 더 생각한다고 해결될 일이었다면 지난 일주일 동안 해결 됐겠지 지금까지 마음고생을 했겠는가.

그 정도로 검후님이라는 벽은 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계속 한숨이 나왔는데 그게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는 썩 좋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뭘 계속 그렇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요? 보는 사람까지 기운 빠지게."

여소천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입을 열었다.

"아, 신경 쓰였으면 죄송해요. 앞으로는 그냥 속으로 할게요."

"아뇨, 그냥 뭐 때문에 그러는지 말해봐요. 보니까 계속 혼자 끙끙 앓을 것 같은데 속 시원하게 뭐 때문인지 듣기라도 해보죠. 혹시 몰라요? 제가 상담이라도 해줄 수 있을지?"

팔짱을 끼고 새침한 표정으로 말하는 여소천의 모습을 보고 과거 검후님에게 들었던 여소천에 대한 묘사가 떠올랐다.

[입이 굉장히 험하고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편이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얼버무리다가 괜히 화를 내기 일수였지.]

그리고 이걸 지구에서 한 단어로 표현하는 말이 있었다.

츤데레.

'...표현 방식이 좀 그래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야..'

"뭘 그렇게 봐요? 눈 안 치워요?"

'..입은 좀 덜 험했으면 좋겠지만.'

하여간 도사라고는 믿지 못할 언동이었다.

검후님처럼 매사에 차분하고 성숙하고 상냥한 그런 성격이었으면..

"하아.."

"또, 또 한숨 쉰다."

"아오오오.. 진짜.."

정작 검후님의 그 성격 때문에 지금 이렇게 고생 중인 것 아닌가.

그 악(惡)에 대해서는 타협 없는 정의로운 성격 때문에.

"모습을 보니까 안 들어도 뭐 때문에 고민 중인지 알 거 같네요. 여자 문제죠?"

"...당연히 티 나겠죠?"

"그러면 안 나겠어요? 애초에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을 제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그 문제겠죠."

"하아.."

그래도 상대가 어차피 내 상황을 알고 있는 여소천이라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지금 숨도 제대로 못 쉬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상담이라도 해줄까요? 아니면 혼자서 끙끙대 볼래요?"

그리고 이 순간에 내밀어진 여소천의 손길.

인생 경험도 풍부하고(?) 검후님과 친분도 있으니 내가 모르는 검후님의 성격에 대해서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같은 여자로서 통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도와주세요."

순수하게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흐흥. 진작에 그럴 것이지."

여소천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당아영은 상황이 어느 정도 괜찮은 것 같고.. 검후가 문제죠? 그 여자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괜히 말 꺼냈다가 들키는 순간 목이 날아가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 중이겠죠. 안 들어도 뻔하네요."

혹시나 했는데 이미 당아영의 일까지 알고 있었다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보 수집 능력이 대단했다.

천지신명의 성녀라는 신분을 이용한 편볍이겠지만.

"네.. 제가 아는 검후님이면 도저히 순순히 넘어가 줄 것 같지가 않아서.."

"음.. 그러니까 그때 당신을 치료하려고 음양합일을 시도했던 거였죠? 그때 검후는 첫 경험이었고.."

"..저도 처음이었는데요."

"...음... 뭐. 네. 당신도 처음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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